예전(정말로 예전)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프래그머티즘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머리가 한참 굵어진 지금도 도통 모르겠고, 극동의 어느 나라의 교과서에 그래도 한 소절을 박아넣었으니 나름 의미있는 지적 사조이겠거니 하면서 접한 인물 중 하나가 리처드 로티였다. 따진다면 리처드 로티는 네오 프래그머티즘이니 애초에 첫 만남 자체가 좀 잘못됐던 거겠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고, 그렇게 접한 저작에서 받았던 인상은 과연 이 ‘석학’을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애초에 보편성이나 거대 서사를 구축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이 시간과 우연의 산물(또는 그와 유사한 무언가)로 귀착되는 이상 리처드 로티의 주장은 철학자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집요하게 지적하는 비평가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덕분에 1989년 저작이 2020년에 재출간되는 쾌거를 일궈낸 이 책도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하긴 애초에 대표작을 두고 의외점을 찾는 시도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는 하다). 삶의 방식이 하나의 이념으로 포괄되거나 동질화될 수 없음이 아마도 명확히 입증된 것처럼 보였던 1989년 로티는 그런 동질성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역사적 토대가 결국 우연의 산물임을 깨닫고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지향점으로 삼자는 취지라고 할 수 있으려나? 결국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데는 이념은 (경우에 따라 도움이 되는 도구일 수는 있겠지만)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럼 이념 없이 연대할 방법은 무엇인가? 로티가 제시하는 방식은 우리는 결국 우연성의 토대에 기초한 만큼 유한하고 한정되며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열린 자세만이 가능하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를 발판삼아 참신한 메타포를 만들어내고 연대를 위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가자! 그러니까 읽으면서 어우 이분은 어떻게 맞는 것 같은 말만 하네? 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갸웃거리)다가 종국에는 뭔가 비전문가의 싸구려 토크콘서트를 듣고 나온 다음에 드는 찜찜함이 남는다. 저 새로운 어휘가 뭔가? 참신한 메타포는 뭔가? 나는 모르겠다. 아마 리처드 로티 본인도 모르겠거니 생각한다. 그 정답이 튀어나오는 순간, 우연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우리의 세상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리처드 로티 저, 김동식/이유선 역, 사월의책]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