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der “Through Zero”

그래도 스토너 팬들에게는 유명을 넘어 현재 장르 최고의 밴드들 중 하나라고까지 얘기되는 밴드라지만 스토너라면 일단 색안경을 끼는 취향인지라 이 밴드를 접하게 된 건 나로서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Elder라는 밴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장르의 전형을 넘어 70년대 프로그의 향기와 인디 록, 스토너의 그림자가 드리운 둠 메탈이 흥미롭게 어우러지는 “Omens”가 계기였고, “Innate Passage”는 아마 일반적인 스토너 팬이라면 이거 왜 터지는 맛이 없냐고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원래 스토너에 별 정이 없고 오히려 프로그다운 웅장함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결국 Elder라는 밴드가 현재 걷고 있는 방향은 앨범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프로그레시브 록(특히 크라우트록) 스타일을 역력히 의식한 류의 사이키델릭 둠 메탈 정도라고 하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Through Zero”는 더 나아간다. “Innate Passage” 스타일의 웅장함은 조금은 자제되어 있지만 밴드는 이제 거의 Yes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한 신서사이저를 내세우고 있고, ‘Sigil to Ruin’에서처럼 거친 리프는 분명히 살아 있지만 과격하지 않되 무게감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정도면 그냥 무게감을 강조한 Pink Floyd풍 프로그레시브 록인데 키보드만큼은 크라우트록의 가장 화려했던 부분을 재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앨범은 전반적으로 사색적인 분위기이지만 동시에 무척 강렬한 연주를 보여주고, 이쯤 되면 그저 인디 록 스타일의 보컬처럼 느껴졌던 Nick DiSalvo의 목소리도 어느샌가 John Anderson 스타일로 들리며(사실 꽤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면서도 개별 파트들의 복잡한 연주들은 세심하게 배치되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평온하게 흘러가면서도 살짝 사이키함을 휘감은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는 Ozric Tentacles가 90년대 초중반 그런지의 좋았던 시절과 그 이후의 매스 록(djent를 얘기하는 건 좀 과도해 보인다)을 참고하면서 좀 더 멜로딕해진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스토너고 뭐고 이 시대의 헤비 프로그 걸작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정말 멋진 앨범이다.

[Blues Funeral Recordings, 2026]

Rosetta Stone “An Eye for the Main Chance”

Rosetta Stone의 바야흐로 데뷔작. 말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The Sisters of Mercy 그림자를 지울 수 없는 스타일을 1991년에 들고 나왔으니 장르의 마일스톤과는 무척이나 먼 거리가 있지만, 80년대 초반 적당히 메탈적이고 적당히 어두웠던 포스트펑크의 스타일을 벌써 10년은 흘러간(그리고 ‘고딕’이라는 스타일에 대한 냉소를 감추지 않았던) 시절에서 이만큼 잘 살려낸 앨범은 보기 드물었고, 그런 면에서 이 데뷔작을 고딕 록의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견이 없지는 않겠지만 Nine Inch Nails를 지나치게 감명깊게 들었는지 인더스트리얼 물을 먹고 나온 이후의 앨범들은 이 앨범이 보여준 고딕의 전형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80년대 초중반 고딕 록의 스타일을 제대로 재현한 90년대의 퍽 드문 사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The Sisters of Mercy가 최고인 건 어쩔 수 없고 결국 이들이 ‘로제타 클론’이라는 멸칭도 떨쳐내긴 아마 요원하겠지만 그래도 ‘Deeper’나 ‘Leave me for Dead’ 처럼 화끈한 ‘리프'(덕분에 Fields of the Nephili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를 보여주는 곡이 있고, ‘Subterfuge’처럼 장르 특유의 리버브 잔뜩 먹은 ‘mystic’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재현하는 곡도 있고, 거기다 적당한 쟁글쟁글 기타와 아무래도 다이내믹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The Sisters of Mercy에 비해 확실히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지라 메탈헤드에게는 이 쪽이 더 꽂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Rosetta Stone 스스로가 이미 장르의 선구자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고딕의 선구자들이 때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과한 진지함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비교하면 Rosetta Stone은 그저 본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음악에서 감출 수 없는 댄서블함은 사실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마 그 댄서블함 때문에 Cleopatra 레코드가 90년대의 많은 고딕 록 밴드들을 제쳐두고 Rosetta Stone의 앨범들을 심심찮게 내놓는구나 싶기도 하다.

왜 인기가 없고 평가도 안 좋은지는 잘 알겠지만 뒤늦게 이 밴드의 팬이 돼버릴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들으면서 솔직히 감명받고 있는 중이다.

[Expression, 1991]

Arckanum “Helvítismyrkr”

Arckanum 생각난 김에 간만에 들어보는 2010년작. 사실 이 밴드의 걸작을 고른다면 당연히 밴드의 초기작이나 아니면 앨범 커버에서 트롤이 사라진 이후의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한 “ÞÞÞÞÞÞÞÞÞÞÞ”이 되겠지만 나로서는 이 앨범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굳이 따진다면 이런저런 얘기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트롤커버와 함께 포크풍을 걷어낸 이후에는 때로는 Gorgoroth를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몰아치는 스타일로 변모한지라 초창기의 지글거리는 사운드보다는 돈맛 풍기는 묵직한 음질이 더 어울릴 것이고, Debemur Morti도 좋은 레이블이었지만 Season of Mist로 적을 옮기면서 밴드는 종래 보여준 것보다는 확실히 돈맛나는 사운드(물론 상대적인 의미이긴 하다)를 보여주는지라 이제는 음악을 들으며 호쾌함까지 느낄 수 있다. Arckanum 같은 밴드의 음악이 원래 그런 맛으로 듣는 부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ÞÞÞÞÞÞÞÞÞÞÞ” 이후 “Sviga Læ”가 좀 비틀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이 앨범에서도 “ÞÞÞÞÞÞÞÞÞÞÞ”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다층적이지만 그리 복잡하지는 않은 리프가 곡의 묵직한 흐름을 이어가고, 블래스트비트를 동반하는 격렬한 리듬을 갖고 있지만 리듬이 리프들을 압도하지는 않으며, 덕분에 청자는 다층적인 리프가 만들어내는 어두운 분위기와 중간중간 익숙한 전개가 지겨울세라 보여주는 플루트나 바이올린 연주, 이런저런 효과음들이 던져주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고 특히나 Arckanum을 들어온 이들이라면 우리의 Shamaatae가 곡을 어떤 스타일로 쓰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는 편인데, 그렇게 짐작하고 들으면서도 즐겁게 들리는 곡을 만들어낸다는 게 Arckanum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Arckanum이 기존에 잘 써먹었던 거침없는 트레몰로가 중심이 되는 ‘Nifldrek’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사실 스타일의 변화 운운하며 글을 시작했지만 Arckanum은 음악의 근간을 바꾼 적이 없고 그저 스스로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켜 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실 달라진 건 트롤 커버와 잦아든 포크풍밖에 없는 셈인데, 가끔은 때로는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그 트롤스러움을 다시 보고 싶을 때도 있는지라 Arckanum 미발표곡 모음집 같은 거라도 하나 나왔으면 좋겠다. Arckanum 7집 말하면서 얘기가 왜 이렇게 흐를까….

[Season of Mist, 2010]

Old Wainds “Stormheart”

Old Wainds가 2024년에 앨범을 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래도 나 음악 좀 열심히 들었네 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영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밥벌이는 중요할지니 덕업일치를 이뤄내진 못한 이로서는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는데 음반 그렇게 구하고 다니면서 그런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이도 있으니 그럴 때는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랬다 저랬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 쓰는 이부터도 모르겠으니 이 얘기는 이쯤하고.

이 무르만스크 출신 밴드를 처음 접했던 것은 Stellar Winter에서 재발매됐던 “Здесь никогда не сходят снега(Where the Snows are Never Gone)” 데모였는데, 데모다운 음질(이라기엔 사실 데모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만 참아낼 수 있다면 그 즈음에 나왔던 블랙메탈 앨범들 중 최고로 꼽을 만한 몇 장에 속할 만한 작품이었고 이후로도 노선 변동도 없지만 그렇다고 수준도 딱히 떨어지지 않는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새로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기에 아 그렇게 망했구나… 짐작하고 있던 차에 10년만의 신작이 나온 만큼 반가움은 분명한데, 그래도 30년동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사실 저 데모 시절의 때로는 Ildjarn 뺨칠 정도의 거친 톤의 연주는 다소 매끄러워졌다. 물론 휘몰아치는 사운드는 여전하지만 기존보다는 좀 더 매끄러운 멜로디와 곡의 흐름을 보여주는 편인데, 특히나 다소 전형적인 앨범의 서두를 넘어 ‘Northern Starfall’의 다이내믹한 질주에 이어지는 폭발력은 Blazebirth Hall의 밴드들이 가장 잘 하고 Drudkh에게 지금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극적인 스타일을 이 밴드가 무척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now Swarm’의 은근히 디프레시브한 면모는 사실 Old Wainds에게 기대할 만한 모습은 아니기는 한데, 어쨌든 충분히 서늘한 분위기이기는 하고 시간이 그만큼 많이 지난 만큼 이들도 이래저래 들었던 것이 많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듣다 보면 Arckanum이 지금껏 활동하면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대충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요새 이 정도로 pagan한 블랙메탈을 연주하는 밴드도 그리 흔치만은 않아 보이는만큼 더욱 반갑다. 다음 앨범은 10년까지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Darkness Shall Rise, 2024]

Ripper “Towards Rebirth”

2010년대 초중반에 아마도 절정에 달했을 ‘스래쉬메탈 리바이벌’ 무브먼트(라고 할 정도인지 모르겠는데)를 사실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스래쉬 밴드들이 간만에 좀 몰려 나온다는 자체야 나쁠 게 없겠지만 상당수는 나름의 개성을 살려보겠다는 의도였겠지만 모던한 사운드 메이킹이나 그루브함을 강조하다가 그때껏 스래쉬를 찾아듣는 이들이 대개 원하지 않는 모습에까지 나아간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강경노선을 표방한 밴드들보다는 크로스오버/하드코어 스타일을 선택한 이들 중에 만족스러웠던 사례는 그리 많지만은 않은 편이었다. 알려진 이름이라면 기껏해야 말이 크로스오버지 누가 들어도 죽어라 달리는 80년대 후반 스타일이었던 Power Trip 정도랄까.

이 칠레 스래쉬 밴드는 뛰어난 리듬감을 과시하는 편이긴 하지만 크로스오버/하드코어보다는 전형적인 스래쉬메탈, 때로는 데스메탈에 가까운 사운드를 연주하는 밴드라는 점에서 그 시절 등장한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이름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애매하게 베이에이리어나 독일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Merciless 정도의 데스-스래쉬 노선을 선택한데다, 스래쉬메탈 특유의 ‘건강한’ 코러스(덕분에 이 부분은 좀 하드코어스럽기도 하다만)를 가장 잘 써먹을 줄 아는 밴드라고 생각하는데, 밴드의 기존 음악이 때로는 거의 Death의 한창 시절 프로그레시브에 가까울 정도의 현란한 리프를 선보이는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직선적이고 묵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Towards Rebirth’부터가 이 밴드에게서 막상 찾으려면 잘 안 보이던 노골적일 정도의 올드스쿨의 기운을 보인다는 사실이 이 앨범에서 밴드가 의도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The End of Universe’ 같은 곡을 듣자면 그저 잘 달려주는 데스래쉬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빛나는 리프들을 발견할 수 있고, 데스메탈과 스래쉬메탈의 경계선 즈음의 사운드에 얹혀진 기대 이상으로 수려한 멜로디는 이 밴드가 생각보다 무척 다양한 매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새삼 보여준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Critical Defiance와 비교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이 정도로 뽑아준다면 긴장해야 할 쪽은 Ripper가 아니라 오히려 Critical Defiance일지도? 그만큼 맘에 들었다는 뜻이다.

[Dark Descent,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