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Funeral “Journeys Into Horizons Lost”

Black Funeral은 미국 블랙메탈의 꽤 오래 된 이름이고 지금까지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동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이 밴드의 음악이 그리 기억에 남았던 적은 개인적으로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오래 된 밴드들이 많이들 그렇지만 데뷔작인 1995년의 “Vampyr – Throne of the Beast”가 보통 평이 좋은 편이고, 앨범명 덕분인지 그 시절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Full moon Prod.는 이 밴드를 ‘vampyric black metal’이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그렇다 보니 이 밴드의 앨범을 구한 이들은 Cradle of Filth 스타일을 기대하고 구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며 30분간의 구리구리함에 질려버린 나머지 USBM에 오랫동안 학을 떼어버린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남 얘기인 듯하지만 내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 데뷔작과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 이 데모는 생각보다 훨씬 인상적인 음악을 담고 있다. 어쩌다 보니 뱀파이어 얘기로 밴드가 시작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하던 밴드임도 드러나고, 영화판에서는 그냥 엘프들 죽으면 가는 천국마냥 묘사되던 발리노르가 원래는 전쟁도 하고 그리 평화로운 곳만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밴드를 주도하는 Akhtya Nachttoter가 Darkness Enshroud에서 다크 앰비언트가 어디까지 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던 뮤지션임을 생각하면 때로는 Von이나 Blasphemy마저 떠오르는 이 거칠고 치열한 블랙메탈이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이런 거 하느라 피곤했으니까 그런 침실용 음악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양심상 이걸 명작이라고는 못 하겠으나… 인트로 ‘Within the Ballinok Mountains’는 그래도 정통적인 스타일로 분전하고 있는 뒤의 블랙메탈 트랙들을 조금은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멋들어진 분위기를 보여주는만큼 일청을 권한다. 과장 섞으면 90년대 중반 블랙메탈의 잊혀진 빛나는 순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쓰고 보니 앨범에서 인트로가 제일 좋다고 하는 게 칭찬인가?

[Abyss, 1994]

Paradox Twin, The “A Romance of Many Dimensions”

The Paradox Twin은 2018년부터 앨범을 발표해 왔고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온 영국 프로그 밴드라고 하나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도 나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많지만은 않지만)벌써부터 반응들이 나름 시끌시끌한데다… John Mitchell이 게스트로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껏 프로그레시브 록을 찾아 듣는다는 이라면 관심을 갖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당연히 나처럼 Arena나 Frost 같은 밴드를 좋아하는 경우라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쩌다가 이 밴드를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하면 난들 이유를 어찌 알겠냐마는 앨범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레시브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 그러니까 메탈을 그만둔 이후의 The Gathering과 “Alternative 4” 이후의 Anathema를 연상시키되 적당한 일렉트로닉스와 프로그레시브한 구성을 통해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류의 스타일을 마주하면 메탈헤드로서는 한 번에 꽂히긴 좀 어렵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섬세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때로는 이를 넘어 무력감을 묘사하는 이 앨범에서 – ‘Pixel Shader’ 정도를 제외하면 – 강렬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Anathema의 “Weather Systems” 스타일에 적당히 거친 리프를 더한다면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Porcupine Tree 풍으로 나름의 격렬함을 보여주는 ‘My Main Function’이나, 이 앨범의 우울함을 마지막에 희망차게 바꿔놓는 멋진 보컬(과 John Mitchell의 솔로잉)이 돋보이는 ‘Nested Scratch’ 같은 곡이 있는만큼, 앨범의 매력적이지만 일반적인 사회인보다는 히키코모리에 가까워 보이는 화자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그저 우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Bjork와 Stevie Nicks를 적당히 짬뽕한 듯한 여성보컬과 이상하게 그와 비슷하게 들리는 남성보컬의 듀엣이 돋보이는, 어둡지만 기대보다 훨씬 낭만적인 음악이라는 정도로 해 두자. 하긴 다차원의 로맨스라는데 당연한 얘긴가?

[White Star, 2026]

Këkht Aräkh “Morning Star”

“Pale Swordsman”으로 (좋든 나쁘든 간에)업계 최고의 어그로꾼으로 자리매김한 Këkht Aräkh의 신작. 로맨틱 블랙메탈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 아니냐를 떠나서 “Pale Swordsman”은 어쨌든 살짝 묻어 있는 포스트록의 색채만 빼고는 꽤 공고하게 블랙메탈의 컨벤션을 따라가는 앨범이었고, Lifelover풍의 건반을 제외한 리프는 의외로 90년대 중반 Darkthrone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깔끔해진 음질로 선보이는 “Transylvanian Hunger” 짝퉁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을 정도이므로, 사실 ‘로맨틱’ 어쩌고 하는 소개에 과하게 긁히지 않는다면 철혈의 메탈헤드가 이 앨범에 꽂혔다 한들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Morning Star”는 어떤가? 우리의 이 어그로꾼은 앨범이 나오기도 전에 블랙메탈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로서는 이름모를 뮤지션들(래퍼인 Bladee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Varg²™은… 테크노 뮤지션의 블랙메탈식 말장난에 다름아닐 것이다)과의 협업을 예고함으로써 이미 상당한 우려와 어그로를 끌어놓았지만 그에 비해서 앨범은 꽤 무난한 블랙메탈에 가깝다. 중간중간 Ulver풍의 포크나 앰비언트를 곁들이는 전작과 유사한 스타일의 블랙메탈인데, 특히나 ‘Angest’나 ‘Land av evig natt II’는 좋았던 시절의 Judas Iscariot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공격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포크 바이브 강한 ‘Genom Sorgen’처럼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던 멜로우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보여주는 어쿠스틱 소품들은 사실 블랙메탈보다는 멜랑콜리한 포스트펑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면에서는 이 밴드가 성공적인지는 좀 애매하지만 확실히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Bladee가 그런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래퍼라지만 오히려 Crying Orc보다도 멋들어진 클린 보컬을 선보여 사람을 놀래키지만, 역시나 Bladee의 손길이 닿았는지 언더그라운드 랩 느낌의 뮤직비디오, 꽤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비트의 배치가 모두 이 블랙메탈 앨범에 등장한다. 좀 더 들어봐야겠지만 되게 재미있는(삐딱하게 본다면 되게 ‘웃기고 자빠진’) 앨범이다.

[Sacred Bones, 2026]

Apocryphon “Apocryphon”

샌프란시스코 출신 사이키델릭 데스메탈 밴드. Esoteric을 사이키델릭 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있으나 둠도 아니고 사이키-데스는 그래도 Blood Incantation 등장 이후에는 드물게 보이는 용어지만 2011년에는 이게 말이 되기는 하나 싶은 얘기였다. 굳이 따진다면 Blood Incantation이 사이키델릭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밴드에 묻어 있는 스페이스록 스타일 때문일 것인데, Apocryphon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은데다 사실 가사를 제외하면 별로 사이키한 구석이 없는 이 음악을 사이키-데스라고 부르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밴드 본인들이 그렇다는 데야 어쩔 수 없다.

음악은 베이에이리어 출신 답게 데스메탈이지만 때로는 슬램에 최적화된 리듬감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간혹 그라인드코어마냥 갈아대는 면모도 엿보이고, 어쨌든 사이키-데스를 표방했기 때문인지 등장하는 샘플링(이를테면 ‘Blood of Serpents’)과 노이지함도 찾을 수 있다. 흥미롭다면 그러면서도 정작 음악의 골간이 되는 데스메탈은 꽤 정통적인 부류에 가깝다는 건데, 말하자면 그라인드코어가 섞여들어가는 부분에서 Circle of Dead Children 같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정작 리프는 Autopsy나 Immolation풍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파충류 얘기나 조금은 잔혹한 데가 있는 유머(이건 생각해보니 또 Carnivore 스타일일지도)를 발견할 수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데스메탈 팬이라면 꽤 많은 즐길거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Jeff Leppard가 도와주기도 하고 나름 기대받는 줄 알았건만 이 EP 이후 싱글 딱 하나 내고 망해버렸더라(Fabricant와의 스플릿이 있긴 하지만 수록곡 하나가 바로 저 싱글인지라). 이런 밴드 순식간에 망해버리는 건 다반사이지만 꽤나 아쉽다. 한 장 내고 망하려고 데뷔 EP에 100장 한정 나무박스 버전을 준비하는 호사를 부렸을까.

[Self-financed, 2011]

One of Nine “Dawn of the Iron Shadow”

이 뭔지 모를 이름의 미국 블랙메탈 밴드는 아홉 나즈굴에서 밴드명을 따 왔다고 하니 톨킨 얘기로 점철된 류의 블랙메탈을 연주할 거라는 건 분명해 보이고, 그런 면에서 전통적이기보다는 좀 더 ‘모던한’ 류의 메탈 음악을 주로 내놓았던 Profound Lore에서 나올 만한 음악인가 생각도 들지만, 말 나온 김에 Profound Lore의 카탈로그를 잠시 살펴봤더니 Cruciamentum이나 Abruptum(물론 재발매)의 이름도 보이더라. 뭐 생각해 보면 Spectral Wound도 여기서 나왔으니 이 레이블이 전형적인 부류의 블랙메탈을 내놓는다 하여 이상하게 여길 것도 아니긴 하겠구나 싶다. 각설하고.

음악은 전형적인 심포닉이라고 하기는 좀 달라 보이고 그보다는 던전 신스 물 많이 먹은 멜로딕 블랙메탈 정도로 얘기하는 게 맞아 보인다. 톨킨 얘기로 점철된 근래의 이런 류의 스타일이라면 아무래도 Stormkeep같은 밴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Dreadful Leap’ 같은 곡에서 보여주는 행진곡풍의 전개에서는 “Dol Guldur”의 Summoning을 의식했을 법한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앨범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Emperor와 Vinterland를 잘 섞어놓은 듯한 노르웨이풍 리프인데, 행진곡풍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격렬한 트레몰로와 함께 폭발시키는 전개에서는 한창 시절 노르웨이 심포닉 블랙메탈의 묵직한 이름들의 빛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Of Desperate Valor’의 꽤 낭만적인 어쿠스틱 연주는 덤이다. 장르의 팬이라면 일청을 권한다.

[Profound Lore,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