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J Band “Armageddon”

Armageddon 얘기 나온 김에 한 장 더. 알고 보면 Vertigo에서 나온 이 그리스 프로그 밴드의 데뷔작은 나오자마자 신성모독을 이유로 판매금지를 얻어맞고 전량 회수조치에 들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카피들만이 시장에 남으면서 초절정 희귀반이 되었다라는 게 잘 알려진 얘기인데, 이제는 Vertigo 오리지널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면야 여기저기서 재발매된 덕분에 꽤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처럼 헝그리한 음악 애호가라면 아마도 이건 부틀렉일까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Second Battle반을 구한 사례가 많지 않을까 싶다. 오피셜일 거라 일단 믿고 듣는 게 청자의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래도 음악은 나쁘지는 않다. 아마게돈이라고 해서 화끈한 맛을 기대해선 곤란하고 앨범 전체가 사이키함을 강조한 정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는 편인데(물론 ‘Armageddon II’ 같은 예외도 있다) 일반적인 프로그 팬이라면 과한 미니멀함에 피로함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Gong 같은 스타일을 좀 더 심각한 분위기로 풀어내면서 약간의 포크 바이브를 섞었다고 생각하면 좀 더 흥미로워질지도? Aphrodite’s Child의 “666” 마냥 등장하는 그리스어 나레이션도 학습효과 때문인지 이 묵시록 이야기와 잘 어울리게 느껴진다. 사실 신서사이저 연주는 Aphrodite’s Child보다는 Akritas 느낌이 강한 편인데… 뭐 어느 쪽이든 영국보다는 독일풍이란 것은 분명하니 그리스식 크라우트록이라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류의 앨범들이 대개 그렇듯이 희귀한 만큼 대단한 걸작이냐 하면 그건 확실히 아니지만 좋은 앨범이다. “666”이 1972년작이니까 한 8년만 일찍 나왔으면 “666”의 시퀄마냥 훨씬 좋은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생각하면 1974년에 나왔어도 판매금지 맞았을 거 같으므로 그냥 팔자 사나운 밴드의 아까운 데뷔작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Vertigo, 1982]

Armageddon(UK) “Armageddon”

Armageddon이란 단어는 록/메탈에서 밴드명이나 앨범명으로는 꽤 흔히 보이는 편이고, 단어가 단어인지라 대개는 꿈도 희망도 없는 분위기를 그려내곤 하는데, 그리다 못해 밴드의 운명조차 꿈도 희망도 없어져버린 사례들이 아무래도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작명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 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그래도 록/메탈의 역사에서 Armageddon이란 이름을 써먹은 수많은 밴드들이 그래도 내놓은 의미있는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 앨범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아니겠나 하는 게 사견. 물론 이 밴드조차 저 작명의 중요성을 극복하진 못한지라 밴드의 중심이 되었던 Keith Relf는 앨범이 나온 다음해 기타 치다가 감전으로 사망한다는 당혹스러운 사고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 한 장뿐인 앨범도 이후 다시 재발매되기까지는 한 15년 걸렸으니, 나름 그 시절 걸물들이 모여 만든 밴드의 팔자치고는 대단히 박복했던 셈이다. 말하고 보니 저런 사실을 들어 배철수를 한국의 Keith Relf라고 외치던 혹자가 기억나는데 아무 상관없는 얘기이니 각설하고.

그래도 결국 Renaissance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이 밴드의 음악은 어쩌다 저렇게 뽑혔는지 너무 헤비메탈처럼 보이는 커버만큼은 아니지만 멤버들의 본진을 생각하면 기대보다 많이 하드록에 기울어진 스타일이었다. 특히나 Bobby Caldwell(미국 AOR뮤지션 그 분 아님)의 드럼은 때로는 Motörhead가 생각날 정도로 스트레이트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Buzzard’ 처럼 이런 드러밍에 힘 잔뜩 들어간 기타 리프가 어우러진 곡을 혹자는 프로토-메탈의 모범사례로 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앨범을 찾아듣는 이들은 아무래도 하드록보다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더 좋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Last Stand Before’ 처럼 이런 화끈함과 함께 이 분들의 본진은 어쨌든 프로그레시브 록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추천하는 게 좋아 보인다.

어쨌든 펑크가 폭발하기 전 영국 하드록의 의미 있었던 지점…. 이라고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니 이후 재발매되는 데 15년이나 걸린 거 보면 다른 사람들 생각은 꼭 그렇지는 않았었나 보다. 역시 판장사 할 팔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치며 넘어간다.

[A&M, 1975]

Age of Heaven “Armageddon”

생소할 뿐만 아니라 찾아본들 나오는 것도 거의 없는 독일 90년대 초중반 고쓰 밴드의 데뷔작. 사실 앨범 생긴 거만 본다면 이게 어떤 음악일까 짐작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독일 고쓰의 나름 뿌리깊은 이름인 The Garden of Delight의 앨범을 주로 냈던 Dion Fortune 발매작이므로 고쓰 록 아니면 고쓰 기운이 묻어나는 신스팝 정도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The Sisters of Mercy를 따라갔을)4인조인데 키보드를 넣어주면서 정작 드러머는 없는 편성인 것도 그렇다.

그렇게 나온 음악은 사실 나쁘지는 않다. 아무래도 영국의 고쓰 클래식들이 포스트펑크의 기운과 영국 특유의 쟁글쟁글 리프를 감추지 못했다면 그보다 10년 늦게 튀어나와서인지 좀 더 힘있는 하드록 리프가 주가 되고, creepy한 정도랄 것까진 아니지만 90년대 초중반 초기 던전 신쓰의 기운을 풍기는 인트로도 나쁘지 않으며, Doctor Avalanche의 톤을 모사하는 듯한 드럼머신도 취향에는 맞지 않지만 장르의 전형에 그리 비껴가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The Sisters of Mercy의 그림자 짙은(특히 “Vision Thing”) 분위기와 멜로디는 이 밴드가 어디 가서 아류 소리를 듣지 않기는 어려웠겠구나 짐작케 한다. 이럴 거면 아예 좀 더 메탈릭하게 나가서 Love Like Blood같은 음악을 했다면 좀 더 살림살이 낫지 않았겠나 싶기도 한데… 세상에 만약은 없을지니 의미없는 얘기일 뿐이다.

그래도 앨범 초반부의 ‘The Providence’와 ‘Black Dust’는 그 시절 독일 고쓰 씬이 생각보다 저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랄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팬이라면 일청을 권해본다.

[Dion Fortune, 1994]

Medalyon “In the Test of Time”

몰랐는데 이 앨범이 작년 말에 재발매됐다기에 간만에. 가끔 미국 파워메탈의 ‘hidden gem’ 식으로 언급되기는 하는 앨범이고, 이 앨범을 재발매한 Arkeyn Steel은 살짝 프로그레시브 터치를 담아낸 미국 파워메탈의 역작이라는 식으로 얘기하곤 있지만, 큰 맘 먹고 앨범을 재발매했을 레이블의 애정어린 시선을 살짝 걷어내고 본다면 이 앨범이 그 정도로 걸작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데뷔작인 “Visions”가 중간중간 과시적인 오케스트럴이 있을지언정 결국 Queensrÿche 초창기풍 파워메탈의 공식을 좀 더 따라가는 편인 음악이었다면 좀 더 ‘프로그레시브’에 기울어진 류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89년도 아닌 1999년에 나온 이 앨범을 시대를 앞서갔네 할 것도 전혀 없다. 말하자면 레이블이 광고성일지언정 보내주는 찬사에 부합하려면 장르의 미덕을 모두 담아낸 걸작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 정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무래도 이 앨범에 만족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애초에 ‘hidden gem’이라고 딱히 싸게 나오지도 않는 이 앨범에서 가성비를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그런 사정을 다 떠나서 80년대 US 파워메탈에 애정이 있는 청자라면 나쁘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Geoff Tate보다는 차라리 Midnight를 좀 간사하게 바꾼 스타일에 가까운 Rick A. Shay의 보컬은 솔직히 듣다 답답할 때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신의 기량만큼은 분명히 보여주고, 음악이 음악인지라 고음역에서는 Ray Alder을 떠올릴 만한 부분도 없지 않다. 듣다 보면 이거 CCM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찬송가풍인 데가 있는데(이를테면 ‘I’ve Gone Beyond’) 덕분인지 장르의 전형에 비해서는 사실 그리 화끈하다 하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정적이라면 정적인 전개를 굴곡 있는 리듬을 통해 나름대로 극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뭐 그래도… 소시적 James Rivera가 활발하게 저니맨처럼 활동하던 시절(지금은 뭐 하릴없이 노신다는 얘기는 아님) 적당히 프로그한 구석이 있는 밴드들에서 보여주던 퍼포먼스에 비해 이들이 더 낫다거나 하는 말은 못하겠다. 장르의 팬이라면 일청을 권해본다.

[Fortunate, 1999]

Blood from the Soul “DSM-5”

Blood from the Soul의 저 데뷔작은 많은 이들의 예상이 그랬듯 (폭망까지는 몰라도 여튼)망했으나… Shane Embury의 인더스트리얼에 대한 관심만큼은 진짜였음은 Meathook Seed는 물론 이후의 커리어에서도 꽤 잘 드러나는 편이다. (Dark Sky Burial이라든가 솔로작이라든가….) 사실 이 쯤 되면 데스메탈-그라인드코어 말고 커리어의 다른 한 축이 인더스트리얼 메탈이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Blood from the Soul은 없어지지 않았고 Sigh의 Mirai를 새로운 멤버로 꼬시고 있다는 등 소문도 간혹 들려오곤 했지만, Earache가 데뷔작의 매운맛을 기억하고 있어서였는지 그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베이퍼웨어마냥 후속작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내가 사장이었더래도 굳이 또 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인더스트리얼에 진심이었던 Shane Embury는 Blood from the Soul을 잊지 않았고 드디어 2020년에 새로운 멤버들을 끌어들여 이제 듀오도 아닌 제대로 된 밴드로 재편하면서 27년만의 후속작 “DSM-5″를 발표하기에 이른다…는 게 이 앨범에 얽힌 이야기다. Shane Embury라는 이름의 묵직함 때문인지 Nasum이나 Soilwork 등에서 활동한 잘 나가는 후배들이 합류했다. Lou Koller는 합류하지 않았지만 새로 들어온 보컬도 Converge의 보컬(이자 레이블 사장님)인 Jacob Bannon이니 전작의 그 하드코어 보컬이 실패의 요인이라 생각한 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 쯤 되면 27년만이긴 하지만 전작의 노선에 연장선상인 앨범을 기대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럼 앨범은 어떤가? 일단 전작의 드럼머신 대신 Dirk Verbeuren의 파워풀한 드럼이 들어가면서 전작 특유의 건조한 인더스트리얼 메탈 느낌은 좀 덜해졌다. 사실 ‘Subtle Fragment’처럼 느릿한 템포 가운데 인더스트리얼을 강조하는 곡 정도를 제외하면 앨범 전반에 그라인드코어의 기운은 짙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헤비함보다는 노이즈와 리버브로 적당히 먹먹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면모가 강한 편이고(그런 점은 Godflesh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끼워넣은 펑크풍 강한 ‘Calcified Youth’는 웬일로 이 인더스트리얼 ‘밴드’가 라이브용 트랙을 만들었다는 재밌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런 면에서 Blood from the Soul이란 이름을 몰랐던 이에게 추천하기에는 데뷔작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나아 보인다. 무난하다.

[Deathwish,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