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wkwind : Days of the Underground

어떤 밴드 하나를 잡아서 일련의 앨범들을 모두 다루는 책이란 그 앨범들을 모두 듣고 앨범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정리해야 할 저자로서는 상당한 수고를 요하는 과업임에 분명할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Hawkwind 같은 밴드를 소재로 이런 류의 책을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규모의 과업이면서 사실 어느 정도는 불필요해 보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앨범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은커녕 밴드의 수많은 앨범들과 무슨 고속도로 휴게소마냥 이 밴드를 거쳐 갔던 수많은 멤버들 기타 패밀리 밴드들의 앨범들을 생각하면 앨범마다 그리 길지만은 않은 단평을 달아 놓는 것만으로도 무시할 만한 분량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사실 21세기에까지 Hawkwind의 앨범을 찾아 듣는 이라면 아마도 음악을 들으매 개론서가 필요할 단계는 벌써 예전에 지나갔을 것이다. 사실 요새 같은 시절이라면 그냥 AI에 Hawkwind 디스코그라피 소개해 달라고 물어보면 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의 Joe Banks는 물론 AI가 등장하기 전에 책을 쓰기는 했지만 이러이러한 사정들을 잘 알았는지 책은 일반적인 개론서 형태와는 꽤 거리가 있다. 물론 Hawkwind의 연대기를 꽤나 소상하게 담고 있고 특히 1969년부터 1980년까지의 음악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연대기는 Hawkwind라는 단일 밴드의 연대기가 아니라 1960년대 중후반부터 이어지는 하이드 파크를 위시한 런던 각지에서 마리화나다 LSD다 하며 다양한 약물 냄새를 풍기며 각자의 자유로운 음악을 과시하던 영국 사이키델릭 씬(과 이를 둘러싼 영국 대중음악 씬)의 내용에 가깝고, 그 가운데에서 전통적인 작풍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보여주던 Hawkwind의 입지를 다양하게 서술한다. 그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트리비아들은 덤이다. 이를테면 Lemmy는 맨날 가죽옷을 입고 다녔지만 오토바이는 탈 줄도 몰랐다던가, New Order나 Sham 69마저 사실은 Hawkwind의 팬이었다던가, Michael Nyman(영화음악으로도 유명하신 그 분 맞음)이 멤버로 합류할 뻔 했었다는가 등.

그리고 저자가 역설하는 내용들 중 좀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적어도 “In Search of Space”부터는 확실히 가시화된 밴드의 SF적 모습이 흔히 이 시절 록 음악에 언급되곤 하는 ‘혁명적 경향’과는 구별되는 자발적인 반권위/반문화성의 표현이었고, 이후에도 옅어졌을지언정 그 급진성은 Robert Calvert의 가사를 중심으로 하여 살아 있었으며, 우리가 프로그레시브 록이다 펑크다 포스트펑크다 장르를 짚어 가며 시대의 변화를 얘기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었으며 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Hawkwind의 반문화적 활동은 70년대 후반까지 그 낙관성을 유지하고 이어져 왔으며, 대처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예전같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Hawkwind를 중심으로 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록 음악의 역사는 상당히 많이 바뀔 것이고, 저자는 이 Hawkwind에 대한 개론 아닌 개론을 통해 그 시대에 대한 색다른 시각의 기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입장에 수긍하는지를 떠나서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록 음악의 팬이라면 Hawkwind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일독을 권해본… 다만, Hawkwind를 한 장도 안 들어봤다면 책이 좀 재미없을지도 모르니 적어도 “Space Ritual” 라이브만큼은 듣고 읽어본다면 좋겠다. Joe Banks가 80년대에 대해서도 다시 책을 냈으면 좋겠다.

[Joe Banks 저, Strange Attractor Press]

비평철학

이 책은 비평철학이라는 야심찬 제목을 달고 있지만 원제부터가 “On Criticism”이니 결국은 그래서 비평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시각을 담아낸 책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비평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립국어원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고명한 저자가 이런 정의를 보고 논의를 이끌었을 리 없어 보이므로 책의 논의는 이 지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일단 비평은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고 서론에서 밝히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결국은 평가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이걸 많은 동호회의 혹자들은 ‘음악은 지극히 주관적이다’이라 바꿔 말하면서 상대방의 의견을 무가치한 것으로 논박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한다)라는 문제제기를 비껴나가야 할 것인데, 저자는 비평의 관심은 ‘아름다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의 감각적 성취는 물론 지적인 성취에 대해서 모두 다루는 것이므로 상호주관적 견지에서는 객관적 비평이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를 헤쳐나간다. 즉, 평가를 위한 객관적 원칙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예술 작품을 사회와 괴리되지 않은 일종의 문화적 산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시각이 무리한 결론까지는 아닐 것이고, 저자 또한 결국 훌륭한 비평가는 예술 비평에 매몰되지 않고 문화비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이 지점에서 결국 예술가와 함께 예술의 전위가 되고, 비평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많은 이들의 예술 작품에 대한 시각은 천차만별일까? 저자의 결론은 결국은 비평가가 나름의 객관성을 바탕으로 작품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기준들은 서로 상이할 수 있고, 심지어 작품이 반드시 단일한 범주에만 속할 필요도 없으므로 탁월함에 대한 논의들은 방대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작품에 대한 칭찬은 ‘그 작품이 자신이 속한 예술 유형의 요점이나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만큼만 그 동류 내에서 좋다고 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은 객관적인 비평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철저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적이지만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그렇게 보면 비평의 위기는 애초에 비평의 본질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평이 스스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애초에 비평이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 자체가 스스로 명확한 맥락을 던져주고 그 맥락 하에서 작품이 자리매김하는 여러 범주들을 고려하여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비평의 목적 달성 여부는 이미 그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의 내용에서 벌써 결정되어 있는 셈이니 우리의 불쌍한 비평가가 본래의 작품 외에 생산해 낸 의미있는 얘기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 비평가는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문화평론가라는 당혹스러운 직함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유는 사실은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새로운 시대의 비평은 비평가에게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지어다.

[노엘 캐럴 저, 이해완 역, 북코리아]

비개념원리

비평가와는 거리가 먼 무지성 딜레탕트의 눈으로 보더라도 비평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비평의 위기 담론과 함께 매우 흔해빠진 얘기가 돼버린 것도 오래 된만큼 이제는 이런 현상을 두어 들뢰즈다 가타리다 하는 이름들을 빌려 시대착오적 주체성이니 이론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평의 과잉이니 하는 얘기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어질 얘기는 아마도, 그렇게 비평이 위기라면 이 시대에 비평가들이 해야 할 ‘비평’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음악에 대한 비평/평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어느 음악가의 창작물에 대한 소개나 평가가 일반적인 답일 것이라 예상되고, 비평/평론이 음악가의 작품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나름의 의미를 담지하기를 원하는 입장이라면 비평/평론의 역할이 창작물에 대한 소개나 평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다. 대개 넷상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국내의 ‘음악평론가/비평가의 역할’에 대한 얘기들도 비슷한 선상에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분석철학을 준거로 사용하면서 음악비평은 음악적 경험, 즉 하나의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서 포착한 비개념적인 것들을 개념화하는 과정을 정교하고 엄밀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답을 머릿말에서 제시하면서, 그러한 입장에서 직접 정리한 개념화의 흔적들을 책으로 묶어서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생각한 음악에 대한 비평/평론의 의미에 대한 입장들에 비추어 본다면 아마도 저자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어느 창작물로부터 포착한 흔적들을 분석철학을 준거로 개념화한다면 그 결과물은 저자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일 테니 최초에 개념화의 대상이 된 ‘음악적 창작’의 결과물과는 이미 개념적으로 동일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 책은 결국 저자 나름의 음악비평/평론의 독자적 의미 찾기의 성과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 딜레탕트는 어쨌든 의문이 남는다. 어느 창작물에 대한 비평이 나름의 사유를 거쳐 독자적인 의미를 확보하였고, 음악을 사유를 통해 개념화하였더라도 독자가 개념을 통해 당초 비평의 대상이 된 음악을 재현할 수는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걸 ‘음악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음악을 둘러싼 이런저런 배경이나 애초에 개념화의 대상조차 되기 어려울 저자의 의도 같은 불확실한 그림자들을 걷어내고 오직 ‘음악’ 그 자체만을 논고의 대상으로 하면 그게 ‘음악 비평’인 것인가? 이를 ‘음악 비평’이라 부른다면 그런 글들을 철학적 논고이되 그저 소재가 음악인 경우가 아니라 구별되는 ‘음악 비평’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 책에서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고, 머릿말을 보자면 애초에 무학의 딜레탕트를 깨우치는 데 저자의 의도가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 굳이 여기서 답을 탐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여기서 정리하기엔 의문이 아직 끝나지 않는다. ‘음악’ 자체만을 대상으로 해서 진행한 개념화가 ‘음악’과 분리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면서 오히려 당초의 ‘음악’의 모습을 왜곡하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까? 이를테면 노이즈 음악을 종래 음악이론에서 음악보다는 음향의 영역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던 요소들을 음악의 영역에 편입시키는(또는 음악과 음향의 불명확한 경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기획의 결과물로 생각한다면,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로 구성된 음악이다”라는 명제에서, 노이즈를 구성하는 소리를 ‘비음악적 소리’로 전제하는 위 정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고정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 노이즈를 다시 파악하여야 한다는 논증은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전제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개념화는 어찌 생각하면 소위 전문가의 영역에 대한 대중의 도전이 심화되는 시절에 비평가 스스로의 전문가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해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그래서 책 뒤편에 적혀 있는 ‘저의 음악비평은 결국 또 미끄러지고 실패할 것입니다’라는 멘트는 마지막까지 기표와 기의를 놓지 못하는 집요함을 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자의 진솔한 한 마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직은 이 비평 작업이(재미와는 별개로) 무학의 딜레탕트에게는 그리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저자의 앞으로의 미끄러짐에 소리없는 응원을 보내본다. 재미있었다는 뜻이다.

[전대한 저, 워크룸프레스]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카이 라슬로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고 하기에 책장에 꽂힌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책을 덕분에 간만에 꺼내보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는 힙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강 작가가 상을 탔을 때도 그랬지만 이 지독한 작가의 책이 노벨상 좀 탔다고 해서 나 같은 장삼이사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몇 권 못 읽어봤지만 하나같이 느슨한 템포로 잿빛 분위기를 그려내면서도 난해함을 보여주는지라 몽매한 독자로서는 쉬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이 책도 저런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배경부터가 공산 헝가리의 어느 농촌이라지만 ‘false prophet’ 역할을 하는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돌아오는 그 공간이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공산 체제의 붕괴를 예견한 듯 해설을 쏟아내고 있지만 1985년에 다른 곳도 아니고 어쨌든 나름의 개혁개방을 추진해 나가던 헝가리를 두고 거의 묵시록에 가까운 풍경마냥 묘사하는 건 쉽지도 않아 보이거니와 나 같은 우매한 독자는 이 풍경이 ‘헝가리’라는 것조차 알기 쉽지가 않다. 호흐마이스 지대의 외진 소성당이 남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집단 농장스러운 마을이 배경이라지만 딱히 공산주의 체제의 부조리함이 원인이 되어 세상이 이렇게 돼버렸는지도 책에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어 보인다.

그런지라 작가가 체제비판을 목적으로 이 묵직한 이야기를 써내려갔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철저할 정도로 망해버렸고 거의 피카레스크에 가까울 정도로 긍정적이거나 선량한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의 사람들은 황폐해진 공간에서 지독하게 소외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를 마주하고 그들을 구세주라고 여기며(또는 여기고 싶어하며) 전혀 유쾌하지 않은 사건으로 나름의 ‘기적’도 일어난다. 우리의 ‘false prophet’ 이리미아시는 어쨌든 그들을 어딘가로 인도하고, 무기 구매가 암시되는 부분도 있지만 예언자이면서도 허무주의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역력한 이 인물이 혁명가일지 사기꾼일지도 모호하다. 그렇게 구세주의 등장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절묘할 정도의 수미쌍관으로 결말은 소설의 처음과 이어지면서 이 서사의 지독함을 완성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인상적이었다고 하면 모를까 감명깊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나처럼 시네필이 아닌 문외한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보다는 현실에 현현한 묵시록이 무엇일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는 이야기라 하는 게 나아 보인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망해버렸는가?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자신들의 사유지에 갇히고 돈줄도 말랐으며 국가의 지원도 끊겨버렸다는 현실은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독자는 우화라기엔 너무도 길고 지독하지만 현실적인 이 이야기를 통해서 대체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런데 우리의 지금은 뭐가 다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거 읽고 힙해지기는 글렀다. 오늘도 힙한 남자는커녕 이 잿빛 분위기에 어울리는 블랙메탈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책을 덮는다.

[크러스너호르카이 라슬로 저, 조원규 역, 알마]

도둑의 도시 가이드

도시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에 (나름대로는)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걸어다니는 거리가 어떠한 이유와 판단에서,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조차 잘 모르겠으나 짐작건대 아무래도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월급통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열렸던 바야흐로 소개팅의 시대, 남녀가 평등하다지만 현실적인 성공 쟁취를 위해서 나름의 데이트 플랜을 만들자면 일단 어느 동네가 괜찮은가? 그렇다면 그 동네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하는 게 중요한 준비사항이었고, 그러자면 일단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부터 알아봐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개팅은 그런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분야가 아니었으므로 보통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했다고 준비하면서 뭔가 재미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국내에는 “파리, 모더니티”로 번역되었다)는 이런 류의 지적 욕구에 뭔가 있어보이는 외피를 부여해 주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소개팅에 가서 할 수는 없었으니 실용성은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실패를 거듭하던 그 남자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있었다… 라고 이제 와서 덧붙인다.

저자가 도둑과 은행털이범 등을 직접 취재해 지었다는 이 책도, 아마도 이 책을 읽어볼 독자들이 도둑과 은행털이범(또는 해당 분야를 준비하는 일종의 ‘취준생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 같은 뜨내기 방문객이라면 절대 돌아보거나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숨겨진 모습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들춰내고 있으니 구성의 난삽함은 둘째치고 독자에게 확실히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다. 사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던 얘기를 새로이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그러기엔 이미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너무 깊게 노출되어 있다) 덕분에 그런 부분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각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임을 실감하기에는 더욱 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도시의 구조, 공간의 구조의 중심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제시하는 ‘도둑을 위한 가이드’는 결국 외부에서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한 ‘감시와 통제’ 목적으로 구성된 도시의 구조를 극복하는 소정의 목표를 달성한 성공담들일 것이고, 덕분에 책의 상당부분은 이제 건축과 공간을 벗어나 도둑과 당국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말하자면 헐리우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안티히어로격 도둑마냥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통제적’ 측면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조지 레오니다스 레슬리가 수많은 헐리우드 케이퍼 무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렇다고 도둑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려서는 곤란하다. 막판에 굳이 처가가 도둑질을 당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은 아마도 그런 사소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 얘기를 했으면 더 효과적이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아마 좀 더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됐을 테니 어쩔 수 없으려나.

[제프 마노 저, 김주양 역, 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