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음악평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는 나 음악 깨나 들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모여서 딱히 생산적일 것까지는 없을 모임(이라기보다는 술자리)을 가지면서 자신의 음악편력을 과시할 때 흔히 나오던 주제였다. 때로는 편력을 넘어 특정 뮤지션(이라기보다는 골방예술가인 경우도 다수이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모습이 역력한 이들도 만나볼 수 있다. 그럴 때 흔히 나오는 얘기는 간단하다. 음악 만들 줄도 모르는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대체 뭘 알고 그리 글을 쓰는가? 이건 적당히 판단력이 흐려진 술자리에서 맞닥뜨리기엔 생각보다 다투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일단 그 주제를 던져놓는 이는 뮤지션 본인 또는 그 옆에서 호가호위하려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개 평론가들은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드뷔시는 평론가였지만 평론보다는 작곡가로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으니 더욱 자신있게 이 주제를 던져놓을 수 있겠다. 텍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살아온 생애로서 특유의 냉소를 입증하는 이 작곡가이자 평론가는 아예 안티 딜레탕트 역할의 오너캐를 만들어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고 자기네들의 심미안을 들이미는’ 전문가들에 대해 날을 바짝 세우면서 동시대의 작곡가들과 이를 둘러싼 현상들, 그리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중심으로 한 본인의 창작 활동에 대한 창작자로서의 입장(내지는 취향)을 꽤 직설적으로 내놓는다. 바그너의 악극들을 김 빠진 라이트모티프 정도로 요약해 버리거나, 어쨌거나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던 로마 대상의 심사위원들을 음악은 X뿔도 모르는 아카데믹한 작자들로 비난하는 패기는 숱한 인성파탄자들의 기록을 남긴 음악의 역사에서도 나름 일석을 차지할 만해 보인다.
그래도 젊은날의 과오를 고백하는 듯 바그너가 스스로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던 인물이며, 이제 우리는 진부한 생각, 취향이나 개성은 따질 수 없다는 생각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견해는 ‘스스로의 취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취향이 결국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곤 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이 심지 굳기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을 작곡가의 가장 직설적인 글에서도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까? 하긴 과오를 인식하고 이를 딛고 넘어감으로써 발전하는 게 인간이라면 이 괴팍한 작곡가도 그런 기질을 통해 인상주의의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클로드 드뷔시 저, 이세진 역, PHO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