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드래곤볼 만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여러 장면들 중 하나는 베지터가 손오공의 뒤를 이어 초사이어인이 되는 장면이었다. 초사이어인이 된 베지터를 보고 우리의 주인공 패거리들이 모두 놀란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초사이어인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베지터는 거기다 대고 지금 같으면 중2병에 찌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멘트를 던져준다. ‘순수하긴 순수했지, 다만 순수한 ‘악’ 이었을 뿐…. ‘ 물론 그 ‘순수한 악인’은 곧 인조인간들과 셀에게 원없이 얻어맞고(물리치료라면 물리치료일지도) 많은 인고의 시간을 지났는지 마인 부우와 싸울 때쯤이 되서는 무려 가정을 이루고 자기희생까지 할 줄 아는 ‘사실은 내면은 따뜻한 사나이’의 표상이 되었다. 순수한 악이라는 건 그렇게 별 거 아니었던 셈이다.

2021년에 굳이 영화를 통해 사탄의 교의를 들춰내는 시대착오적 슬로건과 표지 디자인을 앞세운 이 책에서도 꽤 비슷한 결론에 이르를 수 있다.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교의를 파헤친다는 이 책은 지나친 친절함을 발휘하여 저자가 선별한 영화의 줄거리를 스포일러 잔뜩 담아 스틸 컷들과 함께 펼쳐 놓고, 그렇게 펼쳐 놓은 이야기와 장면들에 어떻게 사탄의 교의가 숨어 있는지를 나름대로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시작하는데, 그건 ‘사탄의 교의’가 어떻게 숨었는지를 설명하지만 정작 그 ‘사탄의 교의’가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12보다 1이 많은 숫자 13은 사탄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 12보다 1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게 설명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더 심각한 건 뭔지 모를 ‘사탄의 교의’가 영화 속에 숨어 있다는 방식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 사법제도의 선기능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사탄의 상징체계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밝혀 두고 숨어 있는 ‘사탄의 상징’들을 들춰주는데, 12인의 배심원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가리키는 것이고,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은 18세인데, ‘666’의 숫자를 더하면 18이니 이 소년은 사탄을 상징한다고 선언한다. 하긴 그 나이 때 나도 부모님 말 안 듣고 악마 같긴 했겠구나 싶지만 이 정도면 저게 사탄의 교의인지 나 같은 일반인이 대체 어찌 알겠나 싶다. 사탄이 굳이 자신의 교의를 뭐하러 영화에 담을 것인가? 의도가 있다면 결국 교의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텐데, 정작 나 같은 일반인이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다면 헛수고도 이런 헛수고가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탄, 내지는 ‘순수한 악’이 존재한다면 일단 이 분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괴벨스 평전(랄프 게오르크 로이드의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꽤 괜찮았다)이나 구스타프 르 봉의 “군중심리학” 한 번 읽고 프로파간다의 설파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보는 게 좋겠다. 방식이 틀려먹었으니 나 같은 범부에게 순수한 악도 별 거 아니구나 같은 소리나 듣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스틸 컷들 저작권 클리어는 한 건지 모르겠다. 아… 저자라면 악마라고 영화사에 연락 안 해 봤겠구나.

[공도성 저, 이야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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