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비평철학이라는 야심찬 제목을 달고 있지만 원제부터가 “On Criticism”이니 결국은 그래서 비평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시각을 담아낸 책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비평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립국어원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고명한 저자가 이런 정의를 보고 논의를 이끌었을 리 없어 보이므로 책의 논의는 이 지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일단 비평은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고 서론에서 밝히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결국은 평가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이걸 많은 동호회의 혹자들은 ‘음악은 지극히 주관적이다’이라 바꿔 말하면서 상대방의 의견을 무가치한 것으로 논박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한다)라는 문제제기를 비껴나가야 할 것인데, 저자는 비평의 관심은 ‘아름다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의 감각적 성취는 물론 지적인 성취에 대해서 모두 다루는 것이므로 상호주관적 견지에서는 객관적 비평이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를 헤쳐나간다. 즉, 평가를 위한 객관적 원칙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예술 작품을 사회와 괴리되지 않은 일종의 문화적 산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시각이 무리한 결론까지는 아닐 것이고, 저자 또한 결국 훌륭한 비평가는 예술 비평에 매몰되지 않고 문화비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이 지점에서 결국 예술가와 함께 예술의 전위가 되고, 비평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많은 이들의 예술 작품에 대한 시각은 천차만별일까? 저자의 결론은 결국은 비평가가 나름의 객관성을 바탕으로 작품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기준들은 서로 상이할 수 있고, 심지어 작품이 반드시 단일한 범주에만 속할 필요도 없으므로 탁월함에 대한 논의들은 방대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작품에 대한 칭찬은 ‘그 작품이 자신이 속한 예술 유형의 요점이나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만큼만 그 동류 내에서 좋다고 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은 객관적인 비평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철저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적이지만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그렇게 보면 비평의 위기는 애초에 비평의 본질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평이 스스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애초에 비평이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 자체가 스스로 명확한 맥락을 던져주고 그 맥락 하에서 작품이 자리매김하는 여러 범주들을 고려하여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비평의 목적 달성 여부는 이미 그 대상이 되는 예술 작품의 내용에서 벌써 결정되어 있는 셈이니 우리의 불쌍한 비평가가 본래의 작품 외에 생산해 낸 의미있는 얘기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 비평가는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문화평론가라는 당혹스러운 직함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유는 사실은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새로운 시대의 비평은 비평가에게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지어다.

[노엘 캐럴 저, 이해완 역, 북코리아]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