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개인적으로 밥벌이를 직접 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점 중 하나라면 서평집을 돈 주고 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남이 읽고 쓴 서평을 읽느니 차라리 그 책을 직접 보는 게 나으므로 서평집을 피했다는 이유는 매월 계좌에 찍히는 숫자에 목줄이 매인 이로서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가 됐건 간에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 이들이 나름대로 써놓은 서평을 보고 일종의 독서 대리체험을 하거나, 또는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상 얘기하는 실용서적과는 거리가 있되 철저히 실용적인 목적에서 소비되는 부류의 상품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집(이라기보다는 독서일기 모음집)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실패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민음사의 두 편집자가 2018년 상반기 동안 매일매일 한 권씩의 책에 대한 글을 쓰고 이를 모아놓은 책인데, 몇몇 책들을 제외하면 이 서평집을 보고 얻을 수 있는 책들의 정보는 Metallica 5집을 두고 “Metallica가 1991년에 낸 야심작”이라 말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친다. 4월 1일의 “모닝캄”(대한항공 기내잡지 그거 맞음)이나, 4월 22일의 “모두투어 2018년 봄 상품 안내”를 보면 책에 대한 감상보다는 어쩌다가 (아마도 박봉으로)이 고된 장기 프로젝트에 휘말리게 됐을 두 직장인의 피로감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서평집은 어떻게 나왔을까? 출판의도야 어딘가에 있겠지만 거의 모든 회사들이 매년 골몰하는 주제들에 속해 있을 신상품 발굴과 원가절감, 출판사 입장에서 이 두 가지 토끼를 잡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면서 안이한 방법 중 하나라면 나름의 테마를 기획하고 이미 월급 따박따박 내보내고 있는 직원을 통해 책을 집필해서 시장에 내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든다. 우리의 직원들은 직원이되 프로 글쟁이들이니 최소한의 수준을 확보할 것이고, 프로 글쟁이이되 직원이니 주는 돈은 월급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출판사 직원들인만큼 알아서들 책은 많이 읽을지니 소재만큼은 충분할 것이고, 만일 그게 우리 출판사 책이라면 나름의 홍보효과도 덤으로 굴러올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그 집필작업이 너무 많은 부담을 줘서는 곤란할 테니 책은 그리 무겁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느 컴퓨터 하드디스크 구석에서 잠자고 있을 기획안 문서에는 이런 내용들이 이 서평집보다도 더 단정한 편집으로 작성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집을 출판사의 기획의도와 어느 소비자의 구매의도가 절묘하게 모두 실패한 사례라고 한다면 지나치려나? 애초에 민음사에서 나온 책도 아니고 단순 독서일기로 쓰여진 글을 너무 삐딱하게 본다 할지도 모르지만, 밥벌이의 피로감 덕분에 사게 된 서평집에서 정작 저자들이 호소하는 밥벌이의 피로감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꿈틀대는 본전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쉽게 해결하려 할 게 아니라 읽을 것들은 쌓아 뒀어야 했을 것이다.

[서효인, 박혜진 저, 난다]

루됭의 마귀들림 : 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언젠가 끌려갔던 교회 수요예배 맨 뒷줄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방언’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종교의 어느 한 단면인가? 라고 묻는 질문에 딱히 답을 해 준 사람은 아직 없었다(일단 주변에 종교인이 거의 없기도 하고). 혹자에 의하면 대충 1993년 즈음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조금씩 저물어 가기 시작하면서 이런 ‘방언’이 늘어났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고 친다면 이런 방언 등의 모습은 교회의 몰락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집토끼들을 확실히 붙잡기 위해 고안된 ‘유사 의식’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인들도 한 표가 아쉬울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쉬이 극단에 기대는 것처럼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방언’이 행해진다는 얘기는 꽤 꾸준히 들을 수 있었으니 거기에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꽤 성공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의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 의식의 의미에 대해서 의심하는지는 딱히 모르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배울 거 다 배운 ‘이성적인’ 사람들이 대체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은 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마귀들림’, 좀 거칠게 말한다면 마녀사냥 순한맛 버전은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방언과도 꽤 닮아 있어 보인다. 책의 묘사에 의하면 멀쩡하던 우르술라회 수녀들이 환각을 보고 몸을 배배 꼬면서 신성모독적 언사를 늘어놓았는데, 표현의 방향성이 좀 다를지는 모르지만 기묘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둘은 꽤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기묘한 스펙터클에는 그만큼 요란한 엑소시즘이 이어지고, 구마사들의 이 ‘종교적 방식’으로 해결되지 못한 마귀들림 현상은 국왕이 보낸 판사들로 이루어진 재판정으로 넘어가며, 세속적인 권력이 마귀들림을 단죄하면 의사들도 다소 미심쩍긴 하지만 마귀들림을 인정한다. 결국 이 기묘한 스펙터클은 그만큼이나 기묘한 방식으로 ‘과학적 방식’에 의해 마귀들림이라는 결론을 인정받는 셈이다. 저자는 이 괴이한 사건의 원인을 결국 권력의 문제에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외부에, 예기치 않게 부상하고 있는 역학관계에 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합리라는 이름이 결국은 뒤에서 움직이는 권력에 의해 붙여지는 셈이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자신의 결론이 합리적이라도 다투는 이들이 많은 만큼 이런 결론은 나름 의미심장해 보인다. 뭐 그러니까 지금까지 방언이고 엑소시즘이고 남아 있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꼭 교회를 억지로 끌려갔다 와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미셸 드 세르토 저, 이충민 역, 문학동네]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특성 없는 남자”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책이지만 나처럼 “특성 없는 남자”를 이름만 아는 문외한에게 저런 소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대놓고 모순적인 책 제목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유고를 생전에 쓸 필요가 있나? 작가나 역자나 그 점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작가는 서문에, 역자는 옮긴이의 글에 왜 작가가 생전 유고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 시절, 작가를 둘러싸고 있던 엄혹한 현실 속에 ‘이야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싶었던 작가가 살아남기 위해 일단 준비하고 있던 야심작 말고 그간 썼던 글들의 모음집을 내놓으면서 모음집 컨셉트 반 현실반영 반 정도로 붙인 제목이 저렇게 나온 셈이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측면을 고려하여 읽는 게 더 나을 것이고, 생전 유고라는 컨셉트에 걸맞도록 작가는 ‘시대적 구속을 덜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모음집을 만들었다. ‘지빠귀’를 포함하면 총 4개 장 30개의 소품들인데,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발표된 작품들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작가의 스타일은(다양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느껴지는 바가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나오는 작가가 글들을 선별 구성하면서 의도한 ‘하나의 구조’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뒤로 가면서 좀 더 사유를 발전시키는 형태로 글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확실히 “지빠귀”는 제3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생전 유고”로는 분량이 부족했는지 함께 붙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책의 적당히 두툼한 두께를 만들어 줌은 물론, “생전 유고”에 실린 소품들이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파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반영하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 이를테면 끈끈이에 걸린 파리의 생존에의 투쟁을 집요해 보일 정도로 정밀묘사하고 있는 “파리잡이 끈끈이”는 사실은 곤란한 시대상에 걸려든 그 시절의 사람들에 대한 우화라거나, “그림쟁이”의 주머니 사정 고약했던 화가와 작가들에 대한 냉소적인 정의는 사실상 스스로에 대한 독한 유머라거나 하는 것이다. 결국 어리석은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에 농락당하면서 텍스트 너머의 내용을 내다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며, 이는 꼭 텍스트의 경우에 한정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괴이한 유고집과 연설문의 결합은 독자로 하여금 너 자신을 알라고 ‘예술적으로’ 깨우치는 의도로 짜여진 모음집이 아닐까? 물론 작가가 보면 웃기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어리석은 독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른다고 앞에 써 놓지 않았나.

[로베르트 무질 저, 신지영 역, 워크룸프레스]

Memoir of a Roadie

록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그리 실용적이지는 않을)질문을 한다면 대개는 으레 스테이지에서 화끈한 연주를 선보이던 밴드들이나 나름의 개성으로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싱어송라이터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직접 음악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나 같은 이들의 존재가 결국은 뮤지션들의 창작에도 나비효과마냥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고, 결국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대중음악이라면 때로는 그런 시각이 소비자의 권리처럼 제시된다. 그 쯤 되면 뮤지션들, 그리고 음악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을 제외한 그 주변인들을 주인공의 자리에 세운 글쓰기가 시도될 만하다. 말하자면 록 음악 버전의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역사책 쓰기는 뮤지션들 본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경우보다 훨씬 어려워 보인다. 창작자의 ‘내심의 의도’ 같은 얘기가 나올 자리는 없을 것이고, 그 주변인들도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으로 생계를 잇더라도 주변으로 비껴난 만큼 그들의 인생에는 음악 외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책까지 읽어 볼 열정의 소유자라도 굳이 공연장에서 청중이던 스태프건 나름의 역할을 다했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서 육아를 하는지 못다한 취미생활을 하는지에까지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식으로 역사책을 쓴다는 생각은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닌 셈이다.

그러니 한 때 Guns N’ Roses, Stone Temple Pilots 같은 거물 밴드들의 로디로 일했던 저자가 야심차게 쓴 책이 음악 얘기보다는 투어버스에서 보내는 로드무비풍 광경이 섞여 들어간 에세이가 된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결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백스테이지나 투어버스에서 일어나는 트리비아들이나 로디들의 고단한 인생을 확인하는 이상의 효용은 없겠다. 그보다는 음악을 좋아하다가 어쩌다 보니 한 때 로디로 인생이 흘러갔었던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가장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공감하면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무슨 효용을 따지면서 시작했던 건 아니지 않나.

[Joel Miller 저, Albion Entertainment]

당신이 읽는 동안 : 글꼴,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워크룸프레스 출판사에 대한 인상이 꽤 좋은 편이다. 대체 뭔 기준으로 나오는 건지 볼 때마다 헷갈리는 ‘제안들’ 총서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라니 다른 ‘문학 전문’ 출판사와는 보는 방향이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인지라 저 힙하기 그지없는 목록의 총서를 제외하면 딱히 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이 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력한 견해는 저자인 ‘헤라르트 윙어르’의 이름에서 에른스트 윙어의 향기를 느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력하나 마나 쓸데없기 그지없다.

부제가 정직하게 얘기해 주듯 이 책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해 (오로지 남들을 보여주기 위한)문서를 만들 때 고심하곤 하는 문제를 혹자들은 얼마나 심화해서 고민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와 내용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일상에서 무심결에 지나가듯 보는 글자들, 글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째서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하는 유저들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수많은 글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조들을 논하듯이 일정 테마들을 목차로 던져두고 그에 걸맞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출판사는 이 책이 ‘읽기의 과정’을 그려낸 보기 드문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독자로부터 어떠한 반응을 이끌어내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글꼴의 모양 자체에 대한 ‘이상적 형태’를 탐구하는 글꼴 디자이너들(과 관련 업계)의 고민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야멸찬 고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떠한 타이포그래피가 주로 사용되는지에 대하여 책은 신경학/뇌과학 등의 연구 결과에 의존한다. 쓰기와 알파벳의 발전에 있어 이뤄진 각종 실험들인 뇌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역할을 하고, 이러한 신경 특성들은 알파벳 뿐 아니라 다른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긴 어떤 디자이너라도 개별 독자 그룹들이 원하는 바를 인지하고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고, 글꼴 디자이너의 ‘창작에의 의지와 취향’을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막연한 기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이 성실한 리서치와 연구의 결과물일 책을 보고서도 ‘이런 문서를 만들 때는 이런 글꼴을!’ 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결론을 얻어낼 수는 없고, 결국 타이포그래피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로서는 글꼴을 둘러싼 수많은 고민의 산물들을 겉핥기한 후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글꼴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이 그런 고민들을 계속한 결과 나온 것이 지금의 수많은 글꼴들이라니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사람이 할 법한 고민을 그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은 먼저 생각하고 고민했다가 결국은 글꼴을 통해 유저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치열한 지적 향연이 벌어지는 영역이었던 셈이고, 나 같은 단순한 독자는 에라 모르겠다 오늘도 헬베티카나 쓰자고 하면서 고민을 벗어난다. 디자이너와 전문가들에게 사과를 전한다.

[헤라르트 윙어르 저, 최문경 역, 워크룸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