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됭의 마귀들림 : 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언젠가 끌려갔던 교회 수요예배 맨 뒷줄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방언’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종교의 어느 한 단면인가? 라고 묻는 질문에 딱히 답을 해 준 사람은 아직 없었다(일단 주변에 종교인이 거의 없기도 하고). 혹자에 의하면 대충 1993년 즈음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조금씩 저물어 가기 시작하면서 이런 ‘방언’이 늘어났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고 친다면 이런 방언 등의 모습은 교회의 몰락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집토끼들을 확실히 붙잡기 위해 고안된 ‘유사 의식’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인들도 한 표가 아쉬울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쉬이 극단에 기대는 것처럼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방언’이 행해진다는 얘기는 꽤 꾸준히 들을 수 있었으니 거기에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꽤 성공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의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 의식의 의미에 대해서 의심하는지는 딱히 모르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배울 거 다 배운 ‘이성적인’ 사람들이 대체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은 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마귀들림’, 좀 거칠게 말한다면 마녀사냥 순한맛 버전은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방언과도 꽤 닮아 있어 보인다. 책의 묘사에 의하면 멀쩡하던 우르술라회 수녀들이 환각을 보고 몸을 배배 꼬면서 신성모독적 언사를 늘어놓았는데, 표현의 방향성이 좀 다를지는 모르지만 기묘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둘은 꽤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기묘한 스펙터클에는 그만큼 요란한 엑소시즘이 이어지고, 구마사들의 이 ‘종교적 방식’으로 해결되지 못한 마귀들림 현상은 국왕이 보낸 판사들로 이루어진 재판정으로 넘어가며, 세속적인 권력이 마귀들림을 단죄하면 의사들도 다소 미심쩍긴 하지만 마귀들림을 인정한다. 결국 이 기묘한 스펙터클은 그만큼이나 기묘한 방식으로 ‘과학적 방식’에 의해 마귀들림이라는 결론을 인정받는 셈이다. 저자는 이 괴이한 사건의 원인을 결국 권력의 문제에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외부에, 예기치 않게 부상하고 있는 역학관계에 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합리라는 이름이 결국은 뒤에서 움직이는 권력에 의해 붙여지는 셈이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자신의 결론이 합리적이라도 다투는 이들이 많은 만큼 이런 결론은 나름 의미심장해 보인다. 뭐 그러니까 지금까지 방언이고 엑소시즘이고 남아 있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꼭 교회를 억지로 끌려갔다 와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미셸 드 세르토 저, 이충민 역, 문학동네]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특성 없는 남자”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책이지만 나처럼 “특성 없는 남자”를 이름만 아는 문외한에게 저런 소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대놓고 모순적인 책 제목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유고를 생전에 쓸 필요가 있나? 작가나 역자나 그 점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작가는 서문에, 역자는 옮긴이의 글에 왜 작가가 생전 유고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 시절, 작가를 둘러싸고 있던 엄혹한 현실 속에 ‘이야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싶었던 작가가 살아남기 위해 일단 준비하고 있던 야심작 말고 그간 썼던 글들의 모음집을 내놓으면서 모음집 컨셉트 반 현실반영 반 정도로 붙인 제목이 저렇게 나온 셈이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측면을 고려하여 읽는 게 더 나을 것이고, 생전 유고라는 컨셉트에 걸맞도록 작가는 ‘시대적 구속을 덜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모음집을 만들었다. ‘지빠귀’를 포함하면 총 4개 장 30개의 소품들인데,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발표된 작품들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작가의 스타일은(다양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느껴지는 바가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나오는 작가가 글들을 선별 구성하면서 의도한 ‘하나의 구조’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뒤로 가면서 좀 더 사유를 발전시키는 형태로 글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확실히 “지빠귀”는 제3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생전 유고”로는 분량이 부족했는지 함께 붙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책의 적당히 두툼한 두께를 만들어 줌은 물론, “생전 유고”에 실린 소품들이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파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반영하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 이를테면 끈끈이에 걸린 파리의 생존에의 투쟁을 집요해 보일 정도로 정밀묘사하고 있는 “파리잡이 끈끈이”는 사실은 곤란한 시대상에 걸려든 그 시절의 사람들에 대한 우화라거나, “그림쟁이”의 주머니 사정 고약했던 화가와 작가들에 대한 냉소적인 정의는 사실상 스스로에 대한 독한 유머라거나 하는 것이다. 결국 어리석은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에 농락당하면서 텍스트 너머의 내용을 내다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며, 이는 꼭 텍스트의 경우에 한정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괴이한 유고집과 연설문의 결합은 독자로 하여금 너 자신을 알라고 ‘예술적으로’ 깨우치는 의도로 짜여진 모음집이 아닐까? 물론 작가가 보면 웃기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어리석은 독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른다고 앞에 써 놓지 않았나.

[로베르트 무질 저, 신지영 역, 워크룸프레스]

Memoir of a Roadie

록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그리 실용적이지는 않을)질문을 한다면 대개는 으레 스테이지에서 화끈한 연주를 선보이던 밴드들이나 나름의 개성으로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싱어송라이터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직접 음악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나 같은 이들의 존재가 결국은 뮤지션들의 창작에도 나비효과마냥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고, 결국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대중음악이라면 때로는 그런 시각이 소비자의 권리처럼 제시된다. 그 쯤 되면 뮤지션들, 그리고 음악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을 제외한 그 주변인들을 주인공의 자리에 세운 글쓰기가 시도될 만하다. 말하자면 록 음악 버전의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역사책 쓰기는 뮤지션들 본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경우보다 훨씬 어려워 보인다. 창작자의 ‘내심의 의도’ 같은 얘기가 나올 자리는 없을 것이고, 그 주변인들도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으로 생계를 잇더라도 주변으로 비껴난 만큼 그들의 인생에는 음악 외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책까지 읽어 볼 열정의 소유자라도 굳이 공연장에서 청중이던 스태프건 나름의 역할을 다했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서 육아를 하는지 못다한 취미생활을 하는지에까지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식으로 역사책을 쓴다는 생각은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닌 셈이다.

그러니 한 때 Guns N’ Roses, Stone Temple Pilots 같은 거물 밴드들의 로디로 일했던 저자가 야심차게 쓴 책이 음악 얘기보다는 투어버스에서 보내는 로드무비풍 광경이 섞여 들어간 에세이가 된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결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백스테이지나 투어버스에서 일어나는 트리비아들이나 로디들의 고단한 인생을 확인하는 이상의 효용은 없겠다. 그보다는 음악을 좋아하다가 어쩌다 보니 한 때 로디로 인생이 흘러갔었던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가장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공감하면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무슨 효용을 따지면서 시작했던 건 아니지 않나.

[Joel Miller 저, Albion Entertainment]

당신이 읽는 동안 : 글꼴,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워크룸프레스 출판사에 대한 인상이 꽤 좋은 편이다. 대체 뭔 기준으로 나오는 건지 볼 때마다 헷갈리는 ‘제안들’ 총서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라니 다른 ‘문학 전문’ 출판사와는 보는 방향이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인지라 저 힙하기 그지없는 목록의 총서를 제외하면 딱히 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이 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력한 견해는 저자인 ‘헤라르트 윙어르’의 이름에서 에른스트 윙어의 향기를 느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력하나 마나 쓸데없기 그지없다.

부제가 정직하게 얘기해 주듯 이 책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해 (오로지 남들을 보여주기 위한)문서를 만들 때 고심하곤 하는 문제를 혹자들은 얼마나 심화해서 고민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와 내용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일상에서 무심결에 지나가듯 보는 글자들, 글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째서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하는 유저들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수많은 글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조들을 논하듯이 일정 테마들을 목차로 던져두고 그에 걸맞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출판사는 이 책이 ‘읽기의 과정’을 그려낸 보기 드문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독자로부터 어떠한 반응을 이끌어내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글꼴의 모양 자체에 대한 ‘이상적 형태’를 탐구하는 글꼴 디자이너들(과 관련 업계)의 고민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야멸찬 고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떠한 타이포그래피가 주로 사용되는지에 대하여 책은 신경학/뇌과학 등의 연구 결과에 의존한다. 쓰기와 알파벳의 발전에 있어 이뤄진 각종 실험들인 뇌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역할을 하고, 이러한 신경 특성들은 알파벳 뿐 아니라 다른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긴 어떤 디자이너라도 개별 독자 그룹들이 원하는 바를 인지하고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고, 글꼴 디자이너의 ‘창작에의 의지와 취향’을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막연한 기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이 성실한 리서치와 연구의 결과물일 책을 보고서도 ‘이런 문서를 만들 때는 이런 글꼴을!’ 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결론을 얻어낼 수는 없고, 결국 타이포그래피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로서는 글꼴을 둘러싼 수많은 고민의 산물들을 겉핥기한 후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글꼴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이 그런 고민들을 계속한 결과 나온 것이 지금의 수많은 글꼴들이라니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사람이 할 법한 고민을 그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은 먼저 생각하고 고민했다가 결국은 글꼴을 통해 유저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치열한 지적 향연이 벌어지는 영역이었던 셈이고, 나 같은 단순한 독자는 에라 모르겠다 오늘도 헬베티카나 쓰자고 하면서 고민을 벗어난다. 디자이너와 전문가들에게 사과를 전한다.

[헤라르트 윙어르 저, 최문경 역, 워크룸프레스]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많이 읽어봤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나 둘 다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싫어)하는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래도 둘 중의 하나라면 그래도 꾸준하게 야설을 집필하고 있고 때로는 이거 문제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막 나가는 면이 있는 후자를 꼽는 편이다. 사실 꽤 건조한 문체가 아니었다면 평단이 좋아하는 중2병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어보이는 모습들도 있었지만, 건조한 문체 때문이든 어쨌든 이 잘 나가는 작가를 좋아하는 이는 꽤나 많아 보인다. 뭐 그러니까 이 잘 나가는 작가와 나의 공통점은 사는 물건이야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쇼핑을 좋아한다는 점 말고는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그리는 쇼핑에 대한 얘기는 나의 경우와는 (당연히)많이 다르다. 그래도 기자가 여기저기 출장 다니면서 겪었던 일들을 그린 에세이라면 좋은 직장일지언정 어쨌든 샐러리맨의 애환이 묻어나오겠지만, 저명 소설가로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멋들어진 셔츠를 사 입으며 있었던 일들을 그리는 이 에세이에서 그런 샐러리맨의 땀내 같은 건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제목만 보면 나름의 덕후 이력을 과시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예상을 불러오는 이 에세이집은 ‘멋낼 줄 아는 멋진 남성들을 위한’ 류의 남성용 패션지를 단순 화보집과 구별할 수 있도록 굳이 이름 알려진 이를 섭외해서 꼭 싣곤 하는 토막글식 에세이를 모아 놓은 책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 책에서 작가가 지갑을 열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설파하는 물건들을 내가 현실에서 구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아마 작가 본인도 자신의 쇼핑 생활이 일반인의 입장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은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인세로 나온 1,000만 엔으로 오디오를 사면서 작가는 이와 같이 쓴다 :

…그런 작품이 상품화되어 시장에 나가 이익을 낳고 저작권 인세로 은행 계좌로 돈이 들어오고, 그 일부를 찾아 엄청나게 큰 스피커를 산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강하게 자각한 것이 있다. ‘큰돈이 들어왔으니 이제 자유로워졌구나.’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면 쇼핑을 통해 자신의 생활도 그에 따라 어느덧 많이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는 작가의 이 쇼핑 목록은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적인 자유를 성취한 어느 아재가 자유를 만끽했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발목에 자본주의적 족쇄를 달고 있는 월급쟁이가 보기에 마냥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는 이유는… 독자의 삐딱함이 가장 첫번째이겠지만 그것만 이유라고 하기엔 억울할 것이다. 오늘 이베이에서 판 하나 날려먹어서 짜증났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무라카미 류 저, 권남희 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