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ir of a Roadie

록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그리 실용적이지는 않을)질문을 한다면 대개는 으레 스테이지에서 화끈한 연주를 선보이던 밴드들이나 나름의 개성으로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싱어송라이터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직접 음악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나 같은 이들의 존재가 결국은 뮤지션들의 창작에도 나비효과마냥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고, 결국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대중음악이라면 때로는 그런 시각이 소비자의 권리처럼 제시된다. 그 쯤 되면 뮤지션들, 그리고 음악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을 제외한 그 주변인들을 주인공의 자리에 세운 글쓰기가 시도될 만하다. 말하자면 록 음악 버전의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역사책 쓰기는 뮤지션들 본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경우보다 훨씬 어려워 보인다. 창작자의 ‘내심의 의도’ 같은 얘기가 나올 자리는 없을 것이고, 그 주변인들도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으로 생계를 잇더라도 주변으로 비껴난 만큼 그들의 인생에는 음악 외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책까지 읽어 볼 열정의 소유자라도 굳이 공연장에서 청중이던 스태프건 나름의 역할을 다했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서 육아를 하는지 못다한 취미생활을 하는지에까지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식으로 역사책을 쓴다는 생각은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닌 셈이다.

그러니 한 때 Guns N’ Roses, Stone Temple Pilots 같은 거물 밴드들의 로디로 일했던 저자가 야심차게 쓴 책이 음악 얘기보다는 투어버스에서 보내는 로드무비풍 광경이 섞여 들어간 에세이가 된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결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백스테이지나 투어버스에서 일어나는 트리비아들이나 로디들의 고단한 인생을 확인하는 이상의 효용은 없겠다. 그보다는 음악을 좋아하다가 어쩌다 보니 한 때 로디로 인생이 흘러갔었던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가장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공감하면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무슨 효용을 따지면서 시작했던 건 아니지 않나.

[Joel Miller 저, Albion Entertainment]

당신이 읽는 동안 : 글꼴,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워크룸프레스 출판사에 대한 인상이 꽤 좋은 편이다. 대체 뭔 기준으로 나오는 건지 볼 때마다 헷갈리는 ‘제안들’ 총서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라니 다른 ‘문학 전문’ 출판사와는 보는 방향이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인지라 저 힙하기 그지없는 목록의 총서를 제외하면 딱히 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이 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력한 견해는 저자인 ‘헤라르트 윙어르’의 이름에서 에른스트 윙어의 향기를 느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력하나 마나 쓸데없기 그지없다.

부제가 정직하게 얘기해 주듯 이 책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해 (오로지 남들을 보여주기 위한)문서를 만들 때 고심하곤 하는 문제를 혹자들은 얼마나 심화해서 고민해 왔는지에 대한 역사와 내용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일상에서 무심결에 지나가듯 보는 글자들, 글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째서 한글이나 워드를 이용하는 유저들에게 고민을 던져주는 수많은 글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조들을 논하듯이 일정 테마들을 목차로 던져두고 그에 걸맞는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출판사는 이 책이 ‘읽기의 과정’을 그려낸 보기 드문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독자로부터 어떠한 반응을 이끌어내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글꼴의 모양 자체에 대한 ‘이상적 형태’를 탐구하는 글꼴 디자이너들(과 관련 업계)의 고민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야멸찬 고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떠한 타이포그래피가 주로 사용되는지에 대하여 책은 신경학/뇌과학 등의 연구 결과에 의존한다. 쓰기와 알파벳의 발전에 있어 이뤄진 각종 실험들인 뇌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역할을 하고, 이러한 신경 특성들은 알파벳 뿐 아니라 다른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긴 어떤 디자이너라도 개별 독자 그룹들이 원하는 바를 인지하고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고, 글꼴 디자이너의 ‘창작에의 의지와 취향’을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막연한 기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이 성실한 리서치와 연구의 결과물일 책을 보고서도 ‘이런 문서를 만들 때는 이런 글꼴을!’ 식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결론을 얻어낼 수는 없고, 결국 타이포그래피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로서는 글꼴을 둘러싼 수많은 고민의 산물들을 겉핥기한 후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글꼴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이 그런 고민들을 계속한 결과 나온 것이 지금의 수많은 글꼴들이라니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사람이 할 법한 고민을 그 디자이너나 전문가들은 먼저 생각하고 고민했다가 결국은 글꼴을 통해 유저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치열한 지적 향연이 벌어지는 영역이었던 셈이고, 나 같은 단순한 독자는 에라 모르겠다 오늘도 헬베티카나 쓰자고 하면서 고민을 벗어난다. 디자이너와 전문가들에게 사과를 전한다.

[헤라르트 윙어르 저, 최문경 역, 워크룸프레스]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많이 읽어봤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나 둘 다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싫어)하는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래도 둘 중의 하나라면 그래도 꾸준하게 야설을 집필하고 있고 때로는 이거 문제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막 나가는 면이 있는 후자를 꼽는 편이다. 사실 꽤 건조한 문체가 아니었다면 평단이 좋아하는 중2병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어보이는 모습들도 있었지만, 건조한 문체 때문이든 어쨌든 이 잘 나가는 작가를 좋아하는 이는 꽤나 많아 보인다. 뭐 그러니까 이 잘 나가는 작가와 나의 공통점은 사는 물건이야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쇼핑을 좋아한다는 점 말고는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그리는 쇼핑에 대한 얘기는 나의 경우와는 (당연히)많이 다르다. 그래도 기자가 여기저기 출장 다니면서 겪었던 일들을 그린 에세이라면 좋은 직장일지언정 어쨌든 샐러리맨의 애환이 묻어나오겠지만, 저명 소설가로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멋들어진 셔츠를 사 입으며 있었던 일들을 그리는 이 에세이에서 그런 샐러리맨의 땀내 같은 건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제목만 보면 나름의 덕후 이력을 과시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예상을 불러오는 이 에세이집은 ‘멋낼 줄 아는 멋진 남성들을 위한’ 류의 남성용 패션지를 단순 화보집과 구별할 수 있도록 굳이 이름 알려진 이를 섭외해서 꼭 싣곤 하는 토막글식 에세이를 모아 놓은 책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 책에서 작가가 지갑을 열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설파하는 물건들을 내가 현실에서 구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아마 작가 본인도 자신의 쇼핑 생활이 일반인의 입장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은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인세로 나온 1,000만 엔으로 오디오를 사면서 작가는 이와 같이 쓴다 :

…그런 작품이 상품화되어 시장에 나가 이익을 낳고 저작권 인세로 은행 계좌로 돈이 들어오고, 그 일부를 찾아 엄청나게 큰 스피커를 산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강하게 자각한 것이 있다. ‘큰돈이 들어왔으니 이제 자유로워졌구나.’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면 쇼핑을 통해 자신의 생활도 그에 따라 어느덧 많이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는 작가의 이 쇼핑 목록은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적인 자유를 성취한 어느 아재가 자유를 만끽했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발목에 자본주의적 족쇄를 달고 있는 월급쟁이가 보기에 마냥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는 이유는… 독자의 삐딱함이 가장 첫번째이겠지만 그것만 이유라고 하기엔 억울할 것이다. 오늘 이베이에서 판 하나 날려먹어서 짜증났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무라카미 류 저, 권남희 역, 민음사]

악 : 우리 시대의 악과 악한 존재들

꼬박꼬박 찾아 읽는 건 물론 아니지만 테리 이글턴은 책이 나오고 서점에 진열되는 걸 우연히 발견하면 이번에는 또 뭐로 책을 썼나? 정도의 기대는 충분히 주는 저자다. 하지만 이 유물론자가 문학이론 외의 저작으로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을 주제로 책을 내놓은 적은 내 식견에선 없었던 것 같다. “유머란 무엇인가” 정도가 비슷하려나? 하지만 유머라는 단어에서 바로 떠오르는 사례는 있지만(여기서 어떤 사례가 떠오르는지에 따라 상당수의 세대가 구분될 것이다), 악이란 단어에서 떠오르는 사례는 모호하다. 그제서야 책 표지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나쁜 놈들’에 대한 책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나쁜 놈들’은 결국은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무슬림 테러범을 지칭하는 것임이 확실히 드러나고(물론 머리말부터 흘깃흘깃 흘려주긴 한다), 책의 거의 대부분은 ‘나쁜 놈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나쁜 놈들’을 다루거나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특정 행동의 원인을 ‘악’으로 돌리는 방식이 얼마나 곤란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옥스포드 영문학 연구교수는 사학자가 아니라 영문학자인만큼 다양한 고전들에서 논거들을 풍부하게 가져온다. 하긴 역사서에 기록된 악인들은 대개 악인이기보다는 역사에서 악역을 맡은 이들 – 내지는 패배자들 – 일 뿐이라는 게 이제 와서는 흔해져버린 시각이다.

이글턴은 이런 논거들을 통해 그 ‘악 결정론’이 절대적 자기책임의 신조, 말 그대로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율법인” 신조에서 비롯하였으며, 환경의 영향을 운운하는 것은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을 최악의 존재, 즉 “소련 국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맞먹는 행위가 되었음을 설명하고, 이 부도덕하고 무지몽매한 서구의 이데올로기는 어째서 ‘나쁜 놈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이, 과감하게 이들을 단죄하기 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였다고 끝을 맺는다. 이런 무조건적인 폭력에 대하여 이글턴은 이미 “성스러운 테러”에서 방대하게 – 그리고 무척 난삽하게 – 다룬 바 있지만, 그래도 우리 시대의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이 책이 훨씬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럼 ‘나쁜 놈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유물론자답게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답은 물적 제도의 결과이고, 행위란 행위자가 사악하지 않더라도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애초에 저자의 관심사 자체가 아니었을 것이고, 굳이 이 유물론자에게 다른 정답을 기대하는 것도 넌센스일 것이다. 하긴 어차피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차고 넘치게 설명해 두었으니 궁금하면 그쪽을 들춰보는 게 더욱 유익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제목이 ‘악’일 필요가 있는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제부터가 “On Evil”인데 다른 제목을 붙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테러 얘기가 나왔다면 그냥 “성스러운 테러” 후속편처럼 보였을 테니 그것도 곤란하다. (그러니 저 부제는 출판사의 엄청난 고뇌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출판업계 종사자도 아니면서 괜히 내 머리까지 아파온다.

[테리 이글턴 저, 오수원 역, 이매진]

Men Among the Ruins : Postwar Reflections of a Radical Traditionalist

Julius Evola는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이 책은 꽤 유명한 편이다. 그리고 사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닐진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 에 신비주의자로서 소개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신비주의자라 하는 것은 많이 부족한 설명이긴 하다) 베를루스코니의 집권 때문인지 현대 이탈리아 우파를 논함에 있어서 에코가 Evola를 중요한 인물로 지적한 것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나의 Evola에 대한 인상도 ‘신비주의와 정치철학을 기묘하게 믹스한 사상가’ 정도였으니, 그게 신비주의자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사실 별로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비주의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책은 막상 읽어보면 생각보다는 친절한 편이다. 인덱스가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독일판에 실렸던 글인 H.T.Hansen의 Evola의 정치 철학에 대한 소개글이 추가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Evola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동시에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그의 ‘이데올로그’ 로서의 역할을 논한다. 매우 우익적이며, 반동적이었지만 파시즘의 대중적 측면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는 독일 1차대전 후 보수주의자들(이를테면 Ernst Junger)과 일견 비슷한 부분이 느껴진다. Evola는 무솔리니를 지지했지만, 당 내의 반대로 인해 파시스트당에 입당하지도 못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의 행보가 약간은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 Evola가 제시하는 것은 재미있게도 범유럽적 정치체계였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일련의 정치 체계들을 보나파르티즘이나 마키아벨리즘이라 비판하면서, 어떠한 사회 체계도 물질주의 등의 그 자체의 요인으로 인해 붕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엘리트주의적 전사의 사유만으로 기존 정치 체계를 붕괴시키는 꼴인 것이다(이 쯤에서 한번쯤 실소). 좀 더 급진적 형태의 ‘보수 혁명’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 책이 유명할 수 있었겠구나 정도의 수긍은 되지만, 이런 류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어느 정도는 허무하게 느껴진다. Evola가 어떤 정당에 대해서도, 어떤 기존 정치체계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허무함의 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Evola조차 스스로를 ‘facist nor anti-facist’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의 정치에 대한 접근이 지나치게 ‘미학적’ 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는 소셜 다위니즘과 국민국가이론적 측면을 파시즘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따르면, 그 빈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유럽적 전통’ 이 된다. 물론 이는 전형적인 ‘전통주의’ 와 차이는 있다 – 유럽적 가치가 모두 중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역설하는 부분은 통속화된 근대 기독교와 부르주아지 세계 질서로부터의 탈출이다 – 와 특히 강조되는 것은 ‘삶의 영적 방식(spiritual way of living)’ 일 것이다. 좋게 얘기하면 유토피아적이겠지만, 이런 식의 시각에는 글쎄, 나로서는 독특하게도 보는군, 이상의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대중의 활력이나, 물질의 측면에 대해서 그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하다. (유럽적 전통이라는 것은, 진정 물질과 무관한 것인가?) 3백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위에 적은 H.T.Hansen의 설명글을 제외한다면 Evola의 글은 거의 소책자 분량의 수준이니 사실 읽기는 편하나, 내 생각에는, 그 인상과는 다르게, 참 ‘순진한’ (물론 이 표현은 어느 정도의 가치 평가를 포함한다) 수준으로 느껴지는 탓에 큰 감흥은 없다.

[Julius Evola 저, Inner Traditions Internatio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