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앤 라이스가 지난 11일에 사망했다기에 간만에. 사실 유명한 시리즈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는 책이 인기가 있다기보다는 결국은 영화 덕에 제대로 소개된 소설이었고, 브램 스토커(보다는 벨라 루고시)류의 그로테스크함을 싹 걷어낸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책에 대한 추억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영화에 대한 인상만은 좀 더 분명한 편이었다. 작가는 뭔가 불멸성에 환멸을 느끼는 연약한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며 ‘예술’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화려한 뮤직비디오처럼 나오는 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아르만드와 그 일당들이 굳이 (영화에서 외모로는 가장 눈에 띄었던)묘령의 여인네 한 명에 매달려 홀딱 벗기고 피를 빠는 모습은 차라리 지알로물에 나오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장면이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끝내줬지만 시종일관 우울증 환자같은 모습의 주인공 루이스와 톰 크루즈의 얼굴을 타고난 덕에 화려한 난봉꾼으로 영생을 살아가는 레스타도 작가가 의도했을지 모를 ‘예술’에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긴 마찬가지다.

곧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앤 라이스의 원작이 번역되어 선보였고, 책을 읽고 나서야 영화의 그 뮤직비디오마냥 과장된 장면들은 감독보다는 원작의 탓이 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 느꼈던 예술이고 싶어하는 모습은 책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장광설을 통한 무게잡는 모습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는데,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의 얼굴 덕으로 기나긴 대사 없이도 충분히 무게잡는 데 성공하는 주인공에 비한다면 책의 주인공은 우울증 환자이지만 말은 참 많으면서 스스로의 고통을 주변에 가감 없이 쏟아내는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오래 살다 보니 성격부터 찌질해진 것일까, 아니면 원래 찌질했던 사람들이 뱀파이어가 돼버린 것일까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도 영화에서도 가장 돋보였듯이 책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등장인물은 클라우디아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늙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인이 될 수 없어 영겁의 시간을 미성년자 취급을 받으며 살게 된 이 캐릭터는 육체가 자라지 않아서 정신도 자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영원한 미성년자로 못박은 것인지 그야말로 영겁의 땡깡을 부리면서 일행과 함께하게 되는데, 그래도 뭔가 모든 행동에 다 이유가 있는 유일한 캐릭터였으므로 저 땡깡을 보면서도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는 생각이 들 법할 것이다. 영화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기를 잘 할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행동이 뭔가 이해가 되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딸을 잃고 단편으로 시작했다 ‘철학적 영감’을 얻어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멋들어진 이야기보다는, 소설의 외피를 빌어 작가의 뭔가 정답은 짝히 없어뵈는 개똥철학을 (비교적)화려한 수사와 오랜 시간의 역사를 모두 배경으로 써먹을 수 있는 소재의 힘을 빌어 그럴듯하게 풀어낸 에세이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도 분량에 비해서는 별다른 사건 없이 갸냘프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만큼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게 아마도 작가의 필력이렷다. 그러니까 역시 자기개발서를 쓸 게 아니면서 글로 밥을 먹으려먼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던가, 아니면 이만큼 포장을 할 필력이 있던가, 둘 중의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왜 글쟁이도 아니면서 뱀파이어 소설 읽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앤 라이스 저, 김혜림 역, 황매]

공무원 생리학

그 시절 프랑스를 살았던 사람들이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싶을 만큼 때로는 지독한 독설로 자신의 시대를 써내려간 발자크의 이름이 붙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이 책은 그 시절 공무원들의 ‘생리’, 말하자면 공무원들은 이러이러한 중생들이다, 라는 문장을 발자크 식으로 광대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공무원이 왕정과 공화정이 기묘한 콜라보를 이루었던 입헌군주제 프랑스에서 새롭게 등장한 직위는 아닐 것이다. 카페 왕조에서도 부르봉 왕조에서도 누군가는 징세를 위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장부를 작성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이후의 문서와 생김새는 많이 달랐을지언정 문구 하나하나에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공문을 작성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근처에서 눈치를 보면서 자질구레한 수발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발자크의 시대에 공무원들이 이런 책이 나올 정도로 뭐가 예전보다 확실히 눈에 띄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절 왕의 수족이었던, 왕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 어쨌든 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공화정이 기묘한 형태로나마 자리잡은 시절의 공무원들은 똑같을 수 없었고, 발자크는 이 부분을 초장부터 코르므냉 씨와 세비의 은총을 운운하며 지적한다. “살기 위해 봉급이 필요한 자, 자신의 자리를 떠날 자유가 없는 자, 쓸데없이 서류를 뒤적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 이제 공무원은 왕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한 봉급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었다. 책에는 다양한 공무원들(내지는 사무직들의 유형들)과 기묘하게 묘사되는 사무실, 관공서들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봉급을 위해 이어지는 복지부동한 생활을 위한 하나의 체제를 이룬다.

그러니까 제목은 저렇지만 사실 이 책은 굳이 공무원 생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굳이 관공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생활 속에서, 많은 이들의 직장들에서 어느 꽉 막힌 관료(내지는 꼰대)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어렵지 않은 시절인만큼, 책명을 직장인 생리학이라고 바꿔도 대개는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공무원이든 일반 직장인이든 출근하기 싫은 건 매한가지인 세상이니 말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저, 류재화 역, 페이퍼로드]

로마 검투사의 일생

당연히 이 책은 검투사에 대한 책이고, 저자는 치열한 연구를 통해 누가 검투사가 되고, 어떻게 검투사가 되는지, 콜로세움에서의 결투가 있기까지 어떻게 홍보가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콜로세움으로 결투를 보러 오는지, 검투사 경기에는 어떤 볼거리가 있고, 로마의 시민들은 경기를 볼거리로서 즐기는 외에 검투사들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밝혀 두었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검투사 경기가 권력 획득의 수단이자 지배의 도구가 되었고, 특히 속주의 검투사 경기가 로마화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에서 검투사는 로마를 상징하는, 로마의 고유한 구경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라는 스펙터클을 이용하여 로마를 상징하는 볼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검투사와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라는 제도는 그 시절 (일부 자원한 자유민들을 제외한다면) 전쟁포로와 범죄자 들에 대한 일종의 공개처형에 가까울 것이다. 공개처형이 어떻게 대중에게 스펙터클을 제공하는지는 푸코도 “감시와 처벌”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었고, 한 편도 보지 못했지만 넷상의 파편들만으로도 무슨 이야기인지 대부분 알고 있을 “오징어 게임”도 결국은 이런 류의 유희를 소재로 하고 있다(후자의 경우는 대중 유희라고 하기야 어렵겠지만). 그러므로 로마의 고유한 구경거리일지언정 검투사라는 제도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로마에 특유한 건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검투사들을 보는 태도이다. 저자는 검투사들의 열등한 신분을 경멸하면서도 그 강인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대중들의 모습과 지식인층으로부터 대중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검투사의 용맹함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음을 한 챕터를 할애해서 설명한다. 당시 로마에서도 이런 걸 도대체 뭐하러 하고 있느냐라는 목소리가 없진 않았던 셈인데, 결국 대중의 공포와 공격성이 이를 유지한 토대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 공포는 정말 검투사의 신체적 강인함에 대한 것인가? 저자의 설명은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콜로세움에서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대중이 광장에 선 검투사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건 와닿는 바는 아니다. 사실 그보다는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 강인함이 없이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공포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사실 이 책이 그려내는 로마의 뒷골목 풍경은 (과장 좀 섞는다면)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도 통하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검투사의 역사를 연구한 것일까?

[배은숙 저, 글항아리]

리하르트 바그너 – 미래의 음악

보들레르와 베를리오즈, 테오필 고티에의 바그너론을 엮은 책이지만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정교한 평가라기보다는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을 동종업계 종사자 및 펜끝 날카로운 데카당스 딜레탕트들의 충격을 그대로 담아낸 글들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특히나 로엔그린 2막이나 트리스탄과의 이졸데 관현악 도입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베를리오즈에 비해서는 아예 바그너에 대한 해석과 자신의 작품들의 문구들을 혼연일체시키는 게 목표인지 열광을 아끼지 않는 보들레르의 글에서 그런 충격들이 제대로 드러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실성이라는 틀에 꼼짝없이 갇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바그너가 제시한 혁명적인 입장”을 대리설명하는 과격파 딜레탕트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과격파 딜레탕트에 의하면 바그너의 엄청난 능력과 비판적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천재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굳이 바그너의 이성과 천재를 분리하려는 이들의 ‘시기심’의 발로이고, 바그너의 음악은 시가 없지만 여전히 시적이며, 정말 잘 지은 시가 갖는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긴 바그너의 시도가 신화와 전설에 토대를 둔 이상적인 드라마를 구현하려는 것이었고, 이는 오페라라는 장르가 가졌던 결함에 오래전부터 진력을 내던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보들레르에게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을 것이다.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스스로도 음악 작품의 분석은 어려운 수준임을 인정하면서도 파리 비평계의 공격을 받아내며 바그너의 변호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들레르의 입장이 오늘날 바그너의 일반적인 해석과도 상당히 맞닿아 있으니, 바그너의 음악은 이런 문외한까지도 확실히 설득시킬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입증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음악으로 밥을 먹지는 않지만 분명한 관심을 보였던 어느 딜레탕트가 역사에 남을 수준의 글발을 휘날리면서 지면을 통해 남긴 인상비평의 기록인 셈인데, 저자에 의하면 철없고 유치한 말들을 한없이 늘어놓는 것이 저널리즘이라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음악을 두고 서로가 이름을 걸고 인상이든 이론이든 나름의 근거들을 기고했던 기록들은 비평의 위기가 이미 자명한 이야기가 된 시절에 참 신기하게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전투력 배틀의 19세기 버전이라면 망자들에 대한 모독이겠지만, 저자가 저자인지라 전투력도 출중하니만큼 탄호이저 서곡 한 번 듣고 읽어내려가면 스트레스 해소에도 나름 유용하다.

[샤를 보들레르 저, 이충훈 역, PHONO]

운율? 그리고 의미? / 헝클어진 이야기

루이스 캐럴에 대하여 찾아보면 나오는 이야기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관련 내용을 제외하면 대충 ‘루이스 캐럴은 언어유희의 대명사’ 라는 취지의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flea’와’ ‘flee’의 발음이 똑같음을 이용한 말장난 같은 사례들의 설명이 달린 각주를 읽으면서 얻는 감흥 같은 걸 말할 일은 없겠다. 사실 그런 각주가 아니더라도 ‘판타즈마고리아’나 ‘사진사 히아와타’ 같은 작품에서 루이스 캐럴이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레 드러나니 나처럼 영어가 짧은 독자라도 언어유희라는 부분에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까진 없겠다. 출판사의 “그림과 대화가 있는 책”에 실린 작품만을 대상으로 선정하였다는 원칙도 사실 그런 고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로지 텍스트만 가지고 이 문장의 원문은 어떤 단어를 썼을 것이고 그게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어떤 손장난을 부렸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그림과 대화가 있는들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그럼 나 같은 영문학 문외한은 이런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문외한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손쉬운 정답은 ‘독법에 정답이 어디 있나? 그냥 각자 알아서’일 것이고, 이 성의없는 정답은 루이스 캐럴의 경우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어유희의 대명사’라면 독자로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언어유희를 즐겨 주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결과일 것이고, 캐럴은 ‘나는 사람들이 단순한 난센스 외에 다른 의미들을 찾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낸 설득력 있는 의미들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이라 말했다고 하니, 이 선집의 글들을 읽고 혼자서 뻘생각을 키워 가는 모습이야말로 독법의 왕도일른지도.

그러고 보면 이 책이 결국은 문학 카테고리의 ‘선집’으로 엮어져 나온 사실도 캐럴의 의도에는 더없이 부합하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헝클어진 이야기”로 실린, 요새 같으면 “요즘 수학문제 해설.jpg” 식으로 짤이 생산되어 돌아다닐 법한 루이스 캐럴식 수학 퀴즈 강평은 아마 정답 응모자라면 조금은 상처받을지도 모를 수준의 지독한 유머가 섞여 있긴 하지만 19세기 영국인이라면 이런 글들을 문학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가 저자인지라 나온 결과이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굳이 수학 퀴즈 강평에서까지 어떻게든 난센스와 추가적인 의미(‘이 수학 퀴즈 강평의 영문학적 가치’?) 등을 찾아내서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이는 이 책으로 엮어내 서점 매대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 저, 유나영 역, 워크룸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