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aret Voltaire의 이름을 책으로만 접했다면 아마도 Throbbing Gristle과 함께 인더스트리얼 사이코 양대산맥처럼 여겨지겠지만,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많은 분야에서 똘끼를 발산하며 뭘 만들어도 터부를 건드리는 데 본능적인 소질을 보여주었던 Genesis P’Orridge 덕에 인더스트리얼 선동가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Throbbing Gristle을 따라갈 수 없다. Cabaret Voltaire는 그보다는 작업실에서 전자음악만을 골몰하던 신서사이저(와 테이프 샘플링) 매니아가 트렌드를 거스르다가도 시대를 관통하는 댄스 비트를 지워낼 수 없었던 사례, 라고 생각하고, 밴드의 그 ‘매니악’한 면을 만들어낸 것은 Chris Watson이었다.

그러니까 Richard H. Kirk의 원맨 밴드가 된 Cabaret Voltaire가 팔팔한 현역도 아니고 26년만에 새 앨범을 냈다고 해서 무슨 실험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건 곤란하다. 앨범은 기묘하게 밴드의 오랜 여정을 한 장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초창기의 거친 인더스트리얼은 물론이고 Virgin 시절의 댄스 플로어도, EMI에서 쫓겨날 즈음의 기묘한 테크노도 죄다 들어 있긴 하지만 그 세 가지 스타일 중 어느 하나를 확실하게 대변하는 곡도 하나도 없다는 점이 어찌 보면 참 용하다. 그래도 2020년의 앨범인데도 최신 기술은 무시하고 빈티지 신서사이저와 드럼머신을 고수하는 게 팬들에 대한 배려일지는 모르겠다. ‘Papa Nine Zero Delta United’의 ‘Nag Nag Nag’스러운 비트도 그렇고. 하긴 Richard H. Kirk는 어딜 봐도 팬들에게 친절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Richard H. Kirk는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 앨범이 본인과 밴드의 마지막 정규반(EP를 제외하면)이 되어 버렸는데, 커리어를 정리하는 모습으로는 밴드의 앨범들 중 가장 적절해 보인다는 게 좀 기묘하다. 스스로 마지막을 예상했던 것일까.

[Mut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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