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치솟은 환율을 고려하여 한동안은 좀 흘러간 앨범들을 찾아 듣는 습관을 들이고자 간만에 길티 플레져 한 장. 그런데 골라도 차트에서는 폭망한 앨범을 골랐으니 역시 판장사 할 팔자는 아님을 실감한다.

뭐 그렇다고 이 앨범에 실려 있는 음악은, 1995년에 Bangles류의 음악을 들고 나왔으니 잘 되긴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분명 망할 만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Manic Monday’ 등의 히트에도 불구하고 Bangles는 내가 팝을 듣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좋은 시절을 날려보낸 밴드였고, Susanna Hoffs가 수려한 외모로 인기가 많았지만 제2차 성징을 심심하게 보내던 못생긴 남학생이 연모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으니 내가 좋아할 이유는 생각해 보면 그리 많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Bangles류의 스타일을 Bangles의 앨범이 아닌, Debbi Peterson이 Bangles 이후 만든 Kindred Spirit를 통해 입문했던 셈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Bangles 자체가 원래 묵직한 깊이를 지닌 음악으로 이름을 알린 것도 아니었던만큼 이 앨범에도 그런 과중한 무게감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앨범은 결국 나름 보컬에 자신감이 있는 두 멤버들의 하모니에 방점을 둔 팝 록이고, 사실 ‘Here in My Eyes’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록적인 곡도 별로 없다. 훗날 Bangles가 커버하는 ‘Ask Me No Questions’가 사실은 커버곡보다 훨씬 어쿠스틱한 모습을 띠고 있음을 보면 그저 듣기 편한 러브송 많은 80년대풍 팝 앨범이라 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드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멜로디와 화음(그리고 군데군데 적당한 비틀레스크)을 주무기로 내세운 팝이 사실은 AOR이나 멜로딕 하드록 듣는 분들이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들을 두루 갖춘 음악이려니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앨범들이 여름철 길바닥 지렁이 만나듯 드물게라도 차트에 나타나지 않게 시작하면서 나의 빌보드차트에 대한 짧았던 관심도 대충 끝을 맺었다. 그러다가 본격 모던로크척결 메탈헤드의 길로 접어들면서 인생이 뭔가 꼬여가지 않았을까.

[I.R.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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