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랙메탈 밴드의 데뷔작. 보통 프로그레시브 블랙메탈 정도로 얘기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변화무쌍한 구성을 보여주는 밴드는 아니고 적당히 고딕 무드를 덧씌운 분위기 위주의 진행에 리프를 계속해서 변주해 가면서 나아가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특히 ‘Шорох тлеющей жизни(The Rustle of moldering Life)’에서의 생각보다 테크니컬한 면모를 보여주는 솔로잉은 이 밴드가 왜 프로그레시브 소리를 듣곤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Зеленый ужас(Green Horror)’의 건반에서는 포스트락의 모습 또한 진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요새는 이미 익숙해진 면모들이지만 결국 보통 프로그레시브 블랙메탈이라는 레떼르에서 기대하는 모습과는 비교적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그래도 앨범은 전반적으로 에너지와 분위기를 모두 잃지 않는 편이다. 레이블 발매작의 평균보다도 조금은 거칠게(그리고 싼티나게) 녹음된 기타 리프는 반면 두터운 연주의 신서사이저와 비교적 깔끔한 톤으로 뽑아내는 멜로디라인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다가도 ‘Пылал закат над сумасшедшим домом… (The Sunset Blazed over the Madhouse)’에서 화음을 조금씩 일그러뜨리면서 ‘카오틱’한 분위기에 이르는 모습에서 아마도 2020년대에 왜 아직도 이런 블랙메탈을 듣고 있는지에 대한 꽤 설득력 있(어 보이)는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음악을 듣고 블랙메탈을 입문하는 이가 있을까 하면 여전히 고개는 갸웃거려지긴 한다만.

그리고 앨범에서 가장 둠적인 ‘На забытых просторах(In Forgotten Wide Spaces)’은 (물론 여전히 블랙메탈이긴 하지만) 내가 최근 몇 개월간 들은 블랙메탈 중에서는 스타일을 불문하고 가장 극적인 곡이었다. 명곡의 반열에 올릴만하다.

[Casus Belli Musica,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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