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빡센 음악 듣는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듣곤 하는 장르들 가운데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즐겨 듣는다고 하기는 좀 애매한 한 가지를 꼽는다면 결국 슬럿지인데, 또 얘기하다 보면 나 같은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이게 나름 그 좁은 풀에서는 보편적인 지지를 얻어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된 연유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면 결국은 슬럿지와 포스트록과의 유사성, 그리고 포스트록 특유의 지글거림과 Darkthrone류의 블랙메탈이 보여주는 ‘드론 사운드'(물론 이걸 드론이라고 하는 이들은 별로 없긴 하겠다만)의 유사성에서 맥락을 찾을 수밖에 없잖을까 싶다.

그렇게 본다면 Venus Principle은 슬럿지와 포스트록의 흐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Crippled Black Phoenix가 Justin Greaves의 길티 플레저를 토로하듯 내놓고 포스트록이었다면, Crippled Black Phoenix의 멤버들이 주류가 된 이 밴드는 오히려 본진보다 클래식 록(특히나 Wishbone Ash)에 가까워진 사운드를 보여주고, 거기에 은근히 얹히는 둠과 슬럿지의 기운이 나름의 분위기를 가져간다. 멜로트론이나 해먼드가 등장하기도 하고, 사실 여기저기 Pink Floyd의 손길도 느껴지는 덕에 이걸 사이키델릭이라 하는 이들도 많아 보이지만 결국 앨범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미니멀한 비트와 묵직한 리프이니 그건 좀 과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Kindle the Fire’ 같은 곡이 그런 방향성을 대변할 것인데, 그렇더라도 슬럿지라고 약 먹은 느낌과 동떨어진 건 절대 아니니, 그냥 ‘약 냄새 꽤 나는 분위기’ 정도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그 약 냄새에 꽤 이런저런 다양한 향기들이 섞여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메탈 팬들보다는 좀 헤비한 스타일을 즐기는 프로그 팬들이 즐겨 듣기 더 좋아 보이는 앨범이다. 하긴 레이블이 레이블이니만큼 그게 이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꽤 흥미로웠다.

[Prophec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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