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장르의 기린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1994년의 노르웨이에서도 좀 더 촌구석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이 밴드는 이 데모 한 장만을 내놓고 사라져 버렸고, 좁디좁은 인력 풀을 활용하느라 밴드 이름은 달라도 결국 그놈이 그놈이더라 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이 밴드의 멤버들이 이후 활동을 어떻게 이어갔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하긴 아무리 그 시절이라도 노르웨이에서 메탈 밴드 한다는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Bergen도 아닌 훨씬 촌구석에 박혀 있던 Dies Irae로서는 기회 잡기도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이 밴드가 망했다는 사실보다는 그런 밴드의 데모를 어쨌든 한참 지나서나마 동아시아의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해 보인다.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밴드의 유일작 치고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좋게 들린다. 이걸 거친 심포닉블랙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던전 신스에 가까울 정도로(그리고 확실히 싼티나는 음색으로) 깔아주는 심포닉에 디스토션 기타와 래스핑을 섞은 ‘나레이션’을 곁들였다고 하는 게 더 맞아 보인다. 블랙메탈보다는 클래식 피아노 연습곡 제목에 가까워 보이는 곡명들도 그렇고, 군데군데 등장하는 하프시코드나 스트링 등은 블랙메탈식 심포닉보다는 좀 더 클래시컬한 스타일이고, 리프도 메탈보다는 오히려 앰비언트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어찌 보면 1994년에 Summoning이 이후 들려주는 스타일을 먼저 제시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Lugbruz”가 나온 것도 1995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이 데모 하나 내고 사라진 밴드의 유일작을 어찌 알고 2006년에 Painiac Records에서 한 번 재발매했고(덕분에 나도 이 앨범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활동에 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흔적을 넷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초창기 블랙메탈의 또 하나의 ‘잊혀졌지만 대단했던’ 이름처럼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좀 더 많은 이들이 이 앨범을 들어봤으면 좋겠다.

[Self-financed,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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