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아방가르드 블랙메탈 밴드… 정도로 알려져 있고 사실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 밴드를 접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이 밴드의 보컬이 Esoteric의 핵심인 그 Greg Chandler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반평생 이상을 둠메탈 전사로 살아온 이 분이 숨겨왔던 블랙메탈의 기운을 분출했던 사례라고 할까? 하지만 원래 연주하던 둠메탈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르의 전형과는 거리가 없지 않았던 이 분이 펼쳐내는 블랙메탈이 평이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긴 하겠다. 사실 Esoteric의 음악 자체가 블랙메탈과 데스메탈 중 어느 쪽에 더 비슷하느냐 하면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도 이 앨범이 흥미로운 점은 Lunar Aurora의 절반이었던 Aran이 베이스로 참여하고 있고, 앨범이 나올 시절에는 쟁쟁한 거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정체모를 인물 #1이었지만 이제는 Macabre Omen과 Omega Centauri로 무시못할 커리어를 갖춘 Tom Valley가 드럼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올스타라고 얘기해 주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부를만도 한 밴드였던 건데,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밴드이지만 아무도 거물이라고 안해주는 거 보면 멤버들의 면면이 어쨌든 이 밴드는 망할 팔자였음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든다. 각설하고.

멤버들의 면면을 보여주듯 앨범은 은근히 블랙메탈과 퓨너럴 둠을 신기하게 뒤섞은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적당히 빠른 템포(블래스트비트는 별로 없기는 하다만)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관통하는 잿빛 분위기를 좀 답답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어 보이지만, Esoteric풍의 최면적인 오르간 연주와 이런 류의 장르에서 드물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베이스는 이 음악의 흐름을 기대 이상으로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역설적인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은 아마도 ‘Against the Paradoxical Guild’이겠지만, 보컬이 Greg Chandler인 만큼 밴드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은 가장 둠적인 ‘When Scorn Can Scourge No More’일 것이고, 그래도 이 장르를 좋아한다 자처하는 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무척 흥미롭다.

[Mordgrim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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