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장두석 얘기가 나온 김에 간만에 들어보는 앨범. 이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했고 활발하진 않더라도 Mortal Sin의 라이브 세션이나 Nazxul(그 호주 블랙메탈 밴드)의 멤버로서 커리어를 이어갔던 Steve Hughes는 음악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품은 끼를 더는 감춰둘 수 없었는지 대충 Nazxul 활동을 접을 90년대 말 즈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물론 음악을 아예 접은 건 아니지만 이제는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꽤나 명망 있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물론 음악 쪽 토끼를 잡았다고 하기엔 좀 아리송하지만) 경우라고 할 수 있을진대, 생전 음악에 애착을 보였지만 부채도사의 성공과는 달리 가수로서는 성공하진 못했던 장두석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Steve Hughes의 사례는 장두석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되지 못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나. 잡설이 길었으니 각설하고.
Steve Hughes라는 특이사례 뮤지션의 얘기를 떠나더라도 Slaughter Lord는 호주 스래쉬메탈의 파이오니어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1985년에 Onslaught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자체가 안 그래도 (영미가 아니라)호주 출신이라는 핸디캡이 있는데 성공하기에는 운도 그리 따라주지는 않았겠다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 영국 밴드의 “Power from Hell”이 1985년에 나왔으니 Onslaught라는 이름으로는 밴드가 알려질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고, 뒤늦게나마 Slaughter Lord로 이름을 바꿨지만 밴드에게 허용된 시간은 아쉽게도 그리 길지 않았다…라는 게 알려진 역사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음악은 사실 의외일 정도로 훌륭하다. 사실 이런 류의 ‘hidden gem’들은 정말 좋다기보다는 수집가들을 위한 추천작일 경우가 많은 편인데 의외일 정도로 후대의 블랙스래쉬를 예기하게 하는 음악은 때로 다소 조악한 연주에도 불구하고 화끈한 매력을 보여준다. 이 앨범이 데모 모음집입을 고려하면 음질도 사실 그리 나쁜 편도 아닌데, 간간히 끼어 있는 잡음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면 그 시절 밴드 리허설 룸의 현장감… 정도로 용서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Dark Angel을 Kreator 식으로 연주한 듯한 ‘Destructor’나, At the Gates의 커버로 더 유명할 ‘Legion’ 같은 곡을 들어 보면 Slayer가 훌륭하지만 때로는 이거보다 좀 더 막 나갔으면 좋겠다 싶었을 이들이 만족했을 만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즐겁게 들었다.
[Invictus,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