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ndur “No Compromise!”

Draugveil이나 Këkht Aräkh, Sacred Son 같은 블랙메탈의 심각함을 비웃는 듯한 코메디 프로젝트들이 있지만 누가 뭐래도 블랙메탈 역사의 넘버원 개그밴드를 뽑는다면 단연 Vondur가 아닐까? 90년대 중반 블랙메탈의 세계를 호령…했다고 하기는 좀 그럴지 몰라도 어쨌든 의미 충만한 행보들을 보여준 멤버들이 보여주는 엘비스 프레슬리 블랙메탈 커버는 그 시절 It과 Necropolis Records의 이름을 믿고 지갑을 열었던 이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겼음은 분명해 보인다. Abruptum에서 지옥이 별거 있냐 이런 게 지옥이지 하는 듯한 음악을 들려주던 멤버들이 이렇게 개그감 충만했는지는 다들 예상하기 어려웠다.

진지하다 못해 근엄함이 미덕처럼 보였던 그 시절 블랙메탈 씬에서 이런 분위기의 밴드가 오래가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Vondur 또한 저 엘비스 프레슬리 커버를 담은 “The Galactic Rock’n’Roll Empire”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지라 전작 컬렉션을 하자면 구할 거 몇 개 안 되는 밴드이긴 한데, 유일하게 안 보이는 게 있다면 1994년의 “Uppruni vonsku” 데모이다. 그러니까 밴드의 데모부터 정규작까지 전부를 담은 이 앨범은 커버에서도 엿보이듯 밴드의 저 악명 높은 개그를 그리 잘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Uppruni vonsku”를 담고 있는 유일한 공식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제는 셀링 포인트는 딱 저거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나처럼 “Striðsyfirlýsing”“The Galactic Rock’n’Roll Empire”를 이미 가지고 있는 이라면 앨범 수록곡 중 90% 이상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고, 대체 개그감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수록곡 소개만을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는 부클렛도 꽤나 실망스럽다. 물론 “Uppruni vonsku”가 있긴 하지만… 사실 빠르게 휘몰아치는 것도 아니고 Bathory풍이 역력한 미드템포의 블랙메탈은 이미 1994년에도 그렇게까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Isengard의 “Vinterskugge”가 나온 게 1994년이었다.

그런지라 어떻게든 이 밴드를 되살려 보려던 레이블의 노고가 무색하게 아쉬움만 남는 컴필레이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한 장이면 밴드의 모든 음원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Striðsyfirlýsing”의 다스 베이더를 보지 못한다면 밴드의 개그감을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은 유머감각이 중요하다… 라는 교훈을 오늘도 얻는다. 결론이 이게 맞나 싶지만 인생이 뭐 그런거다.

[Osmose, 2011]

Draugveil “Cruel World of Dreams and Fears”

금년도 슬슬 2025년 올해의 앨범 같은 걸 많이들 뽑을 시절이 되었는데, 생각하니 금년에는 신보보다는 흘러간 앨범들을 더 찾아들었던 듯하여 2025년에는 뭐가 좋았더라? 하는 질문에 바로 떠오르는 게 생각보다 별로 없다. 그래도 확실하다 할 수 있는 건 이 정확한 정체 모를 밴드의 앨범을 올해의 앨범으로 뽑기는 어려울 거라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블랙메탈 업계의 최고 화제를 꼽는다면 이 앨범을 빼놓고 넘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 커버의 저 쓸데없을 정도로 화사한 자태가 밈이 된 거는 물론이고 AI로 커버를 만들었네 어쨌네 하는 이슈몰이까지 성공했으니 이 앨범을 굳이 돈주고 사지 않았더라도 대체 이 웃기는 물건은 뭐냐 했을 이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기믹은 이미 Këkht Aräkh가 “Pale Swordsman”으로 로맨틱 블랙메탈이라는 웃기는 화두를 던지면서 써먹은 모습이긴 하고, Këkht Aräkh나 이 밴드나 기본적으로는 ‘로맨틱’ 같은 레떼르가 붙어서 그렇지 꽤 로우파이한 블랙메탈(에 약간의 DSBM 테이스트가 묻은 스타일)의 전형을 따라가는 편이며, 얼척없는 커버를 보여주는 블랙메탈 밴드가 이전에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커버를 필두로 해서 잔뜩 어그로가 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건 블랙메탈이 아니라며 화낼 필요까진 없어 보인다. 잘 만들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수준미달이라 할 정도도 아니고, ‘Vortex’ 처럼 기대 이상의 극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곡도 있다. 그러니까 ‘filler’ 트랙이 좀 끼어 있지만 그래도 신경쓴 티는 분명한 블랙메탈 골방 프로젝트 중 중간 이상은 가는 사례…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CD를 돈주고 살 만하냐 하는 건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음악만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앨범이라 하기는 충분할 것이다. Phantom Lure에서 열심히 판매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알아봐도 좋을지도.

[Self-financed, 2025]

Joyless “Unlimited Hate”

Joyless는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꽤 묵직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사실 Forgotten Woods의 이름과 No Colours라는 레이블의 그림자 덕분인 데가 많을 것이고, 이 기묘한 밴드가 Joyless라는 이름으로 블랙메탈을 연주했던 것은 이 앨범이 유일하다. 말하자면 커리어 전체를 살펴본다면 Joyless를 블랙메탈 밴드라고 부르는 자체가 틀린 얘기일 수 있는 셈인데, 이 앨범을 좋게 들었다가 이후 “Wisdom & Arrogance”에서 뒤통수를 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던 나로서는 어쨌든 Joyless 최고의 앨범은 이 “Unlimited Hate”이며, 그러니까 Joyless은 어쨌든 블랙메탈 밴드라고 하는 게 합당하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아니라면 아마 당신 말이 맞을 테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래도 이 앨범만 듣는다면 굳이 Forgotten Woods가 아닌 Joyless의 이름으로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Forgotten Woods의 스타일에 가깝고, 하긴 ‘Dimension of the Blackest Dark’ 같은 곡은 원래 Forgotten Woods의 곡이니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이 앨범만큼이나 블랙메탈 중 ‘하드코어 펑크’가 아닌 포스트펑크의 그림자를 강하게 보여주는 앨범은 적어도 이전에는 없었고 내 생각에는 이후에도 드물었다. ‘Your Crystal Fragments’의 보컬 하모니를 듣다가 Velvet Underground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그러는 순간 들려오는 건 초기 Burzum풍의 리프라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앨범은 어디 가서 찾아보기 어렵고, 그게 1996년에 No Colours에서 나왔다는 게 더욱 놀라운 점이다.

말하자면 한참 이후의 Deafheaven이다 누구다 하는 이들이 아니라, 사실 소위 ‘hipster black metal’의 시작점은 이미 이 Joyless에서 보여줬고, 더 올라가면 Forgotten Woods의 음악이 희미할지언정 그 단초를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연사 강렬하게 외쳐 보는데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No Colours, 1996]

An Abstract Illusion “The Sleeping City”

An Absract Illusion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Willowtip에서 한 2-3년 전부터 열심히 밀어주고 있는 살풋 블랙메탈 분위기가 묻은 프로그레시브 데스를 연주하는 스웨덴 밴드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아무나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을 보는 일이 그렇게 드물지도 않은 스타일인데, 그래도 2022년의 “Woe”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간 접했던 프로그레시브 데스메탈 류에서는 손꼽힐 정도의 앨범이었다. 사실 이런 류의 밴드들은 극적인 구성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아니면 지나친 화려함의 추구 때문인지) 온갖 장르들을 편집증적으로 꿰매맞춘 듯한 정신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사례도 왕왕 발견되는 편인데,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갈팡질팡하지 않고 프로그레시브 데스의 ‘전형적인’ 형태에 집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2022년에 와서는 밴드의 매력이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잘 하는 거 확실하게 갈고 닦았다는 느낌이랄까.

“The Sleeping City”도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데스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전작들에 비해서 강화된 심포닉(일렉트로닉한 면모만 뺀다면 때로는 거의 In Vain 수준), 클린 보컬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흐느끼기까지 할 정도로 연극적인 면모도 보여주는 보컬, 소위 포스트메탈을 많이 들었는지 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모던해진’ 모습도 보여주는 ‘Like a Geyser Ever Erupting’ 같은 곡을 보자면 이 밴드가 스타일의 확장을 꾀하고 있음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니 밴드의 나름대로 우직함을 미덕처럼 여겼던 나로서는 우려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런 모습을 최근에 가장 완성도 높게 보여준 밴드는 아마도 Ne Obliviscaris일 것인데, “Citadel” 이후 점차 재미없어졌던 모습을 생각하면 An Abstract Illusion이 그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은 적어도 아직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앨범 자체만 보면 충분히 즐겁고 듣기 좋다. 앨범의 전면에 심포닉을 흩뿌리지만 막상 듣다 보면 (물론 전작들보다는 무딘 편이지만) 리프의 공격성을 갉아먹을 정도로 과한 부분은 찾기 어렵다. 이 줄타기가 언제까지 성공적일지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Willowtip, 2025]

Midnight Betrothed “Dreamless”

Midnight Betrothed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찾아보면 나오는 건 기껏해야 호주 출신의 원맨 프로젝트라는 얘기이고, 그 외에는 스스로의 음악을 ‘sombre romantic black metal’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정도? 그렇지만 일단 로맨틱이라는 수식어가 블랙메탈에 붙었다는 자체에서 이거 대체 뭐하는 음악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는 충분해 보인다. 예전에야 녹음을 하자면 어쨌든 악기와 앰프, 최소한 4트랙 레코더라도 갖고 있어야 지하실에라도 박혀서 뭔가 만들고, 그렇게 녹음한 크롬 테이프를 여기저기 공짜로 뿌려대며 이 음악을 누군가 알려주기를 기대해야 했지만 이제는 적어도 후자의 작업은 인터넷 업로드로 쉽게 대체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그 골방 프로젝트들 중 웰메이드를 찾기보다는 정신나갔다는 말보다 더 적절한 설명을 찾기 어려운 사례를 발견하기가 훨씬 쉬워 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는 진지함보다는 개그감의 발로에 가까운 무언가였다는 뜻이다.

그런 기대에 비해서는 음악은 생각보다 멀쩡한(달리 표현하면 평범한) 편이다. 골방 프로젝트답지 않게 생각보다 깔끔한 녹음도 눈에 띄는데, 사실 녹음을 잘 했다기보다는 피아노를 전면에 내세우고 지글거리는 기타 리프는 볼륨을 확 낮춰서 뒤로 밀어놓은 덕이므로, 이런 결과는 녹음이 잘 됐다기보다는 애초에 블랙메탈이라기엔 던전 신스에 많이 다가간 스타일 때문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블랙메탈다운 지글거림’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있는 저 리프와 DSBM풍의 보컬이 이건 블랙메탈 앨범이라고 계속 강변하고 있고, 가끔은 Dimmu Borgir의 “For All Tid”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는 저 피아노의 멜로디만큼은 확실히 솔깃한 편이다. ‘Bygone Fortunes’ 같은 곡은 골방 프로젝트치고는 극적인 면모도 보여주는 편인지라 좀 더 돈 들인 스타일로 편곡을 한다면 꽤 멋질 것 같다는 예상도 든다.

하지만 암만 좋게 얘기해도 B급이라 해주기도 좀 저어되는 이 음악을 쉽게 추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Osculum Infame 같은 음악에서 건반이 너무 화려한 게 걸렸던 이라면 한번쯤 들어볼만 할지도? 그렇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심포닉블랙이 취향이 아닐 거 같으므로 어쨌든 추천까지는 차마 안되겠다. 그저 호기심에 모든 것을 맡긴다.

[Northern Silenc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