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rannic “Tyrannic Desolation”

생긴 건 블랙스래쉬나 데스래쉬 밴드처럼 생겼으나 때로는 (Black Sabbath풍의)둠이래도 괜찮을 만한 분위기의 블랙메탈을 연주하는 이 호주 듀오(그런데 왜 썸네일 사진들은 다 3명으로 돼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도 드디어 나름의 성과를 거뒀는지 고국의 Seance Records를 벗어나 요새 이 장르에서는 잘 되는 집들 중 하나인 Iron Bonehead에 몸담고 앨범을 내놓기 시작했다. 300장 한정이라니 레이블에서는 그렇게 큰 기대는 없는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지만 찾아보니 이 레이블에서 CD를 300장 이상으로 찍은 경우도 꼭 많지만은 않으므로 이런 건 쓸데없는 걱정일 것이다. 각설하고.

특이한 점은 이런 류의 둠 스타일을 받아들인 밴드라면 헤비메탈 기운 강한 리프를 보여주는 게 당연해 보이고 이들도 그렇긴 하지만 좀 더 ‘chaotic’하게 뒤틀린 형태의 리프를 내세운다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Deathspell Omega 닮았다 할 정도는 아니고 한창 시절 Master’s Hammer 같은 밴드들이 그랬듯이 체코 블랙메탈이 보여줬던 적당히 에스닉하면서도 변칙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편이고, 오히려 이전작들에 비해서 헤비메탈의 기운이 옅어진 덕에 그런 뒤틀린 분위기는 더 짙어 보인다. ‘Only Death Can Speak My Name’처럼 Cathedral 풍 강한 곡이 있긴 하지만 여태까지의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는 가장 블랙메탈에 기울어진 음악이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류의 블랙메탈이 보여줄 수 있는 적당히 오컬트하고 ‘병적인’ 분위기는 확실히 보여주는 편이므로 즐겁게 들을 수 있다. 사실 그런 면에서는 통상적인 블랙메탈보다는 Mortuary Drape 같은 밴드의 팬에게 더 와닿을 수 있어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300장을 찍은 이유는 레이블이 큰 기대가 없었나보다 쪽으로 생각이 기울지만 그래도 잘 됐으면 좋겠다.

[Iron Bonehead, 2024]

Razor “Armed and Dangerous”

역사적인 Razor의 데뷔 EP. 1984년에 나온 스피드/스래쉬메탈 데뷔작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하면 할 말 없는데(Slayer는 이미 데뷔작에다 “Haunting the Chapel”까지 내놓은 시점이었다만, 그건 뭐 Slayer니까) 그래도 Razor만큼 일관되게 달리는 스타일을 유지한 스래쉬 밴드는 그리 많지만은 않다. 말하고 보니 바로 Whiplash나 Exciter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고 심지어 Exciter는 이미 1983년에 데뷔작을 냈으니 좀 더 이른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앨범명부터가 그렇듯이 헤비메탈의 기운이 강한 스피드메탈이었던 Exciter에 비해서 장르의 전형에 가까운 건 Razor가 아니었나 하는 게 사견.

그런 이름값에 비하면 이 데뷔 EP는 이상할 정도로 CD 재발매가 꽤 늦은 편이었는데, 그래도 80년대 캐나다 메탈의 굵직..한지는 좀 헷갈려도 어쨌든 의미있는 이름이었던 Viper Records에서 나온 이후의 앨범들과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이야 High Roller나 Relapse 같은 곳에서 재발매한 덕에 구하기 쉬운 앨범이 됐지만 덕분에 나 같은 얼치기 메탈헤드는 구해 듣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앨범명이 앨범명인지라 Anthrax의 그 EP를 검색순위에서 절대 이길 수 없었던 점도 있겠다. 하긴 이쪽이나 그쪽이나 찾는 이는 대개 비슷했겠지만.

그런 Razor의 이름값을 생각하고 이 EP를 듣는다면 생각보다 좀 더 헤비메탈에 가까운 음악에 잠깐 당황할 수도 있겠다. 바로 “Executioner’s Song”부터는 때로는 필받아서 너무 빠르게 간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스피드메탈이 등장함을 생각하면 밴드가 이런 스타일을 보여준 건 사실상 이 EP가 유일해 보이는데, 그래도 수록곡들은 대개 훌륭한 스피드를 보여주는데다(당장 수록곡의 절반이 “Executioner’s Song”과 겹침) ‘Killer Instinct’처럼 “Evil Invaders”의 스래쉬메탈의 단초를 보여주는 곡도 있으니 훗날의 Razor의 위명을 생각하더라도 부끄러워할 만한 앨범은 아닐 것이다. 혹자의 말마따나 Motörhead와 Judas Priest의 그림자가 만나 좀 더 어두워진 지점에서 튀어나온 음악이래도 무난할 것이다.

[Voice, 1984]

Ragana “Desolation’s Flower”

이런 밴드를 접할 때면 블랙메탈이란 장르가 내가 처음에 블랙메탈을 듣기 시작할 때와는 꽤 다른 장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유럽에서 시작하고 좀 더 융성한 편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북미가 힘을 쓰지 못한 음악이 90년대까지의 블랙메탈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이 슬슬 인종의 용광로다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종래에는 이 장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이제는 그 90년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게 무슨 블랙메탈이냐란 소리가 나올 정도의 음악(아무래도 Sacred Bones나 The Flenser 같은 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도 등장한다.

페미니즘과 LGBTQ를 다루는(게다가 멤버 중 한 명은 논바이너리라는) 알고 보면 2011년부터 시작했다는 의외로 오랜 역사의 이 듀오가 블랙메탈 카테고리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이 음악을 둠적인 데가 있는 블랙메탈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음악에서 90년대 북유럽 블랙메탈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사실 듣다 보면 이걸 블랙메탈이라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블랙메탈이라기보다는 Isis 류의 슬럿지의 모습을 Mogwai풍 포스트록에 입혀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게 cascadian 블랙메탈이라 하면 할 말은 없음)? 하지만 때로는 Chelsea Wolfe 같은 이를 연상케 하는 적당히 어둡고 자욱한 분위기가 슈게이징의 물을 먹으면서 꽤 노이지한 기타 리프와 대조를 이루는 모습은 블랙메탈이 멜랑콜리를 표현하는 모습과 많이 닮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블랙게이즈나 Wolves in the Throne Room 류의 음악을 즐기는 이라면 만족할 수 있어 보인다. 솔직히 커버만 보고 뭔가 잘못됐다 싶었는데 정작 음악을 들어보니 가끔은 좀 많이 거슬리는 보컬을 제외하면 가끔은 달려주는 맛까지 보여주는지라 꽤 재미있게 들었다. 다만 많은 곳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혁명적이기까지 한 음악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니 취향 때문이라 하시면 당신 말씀이 맞겠지요 네.

[The Flenser, 2023]

Old Nick “Witch Lymph/Flying Ointment”

Old Nick은 이름답게 미국 블랙메탈 밴드이고, 기본적으로 거칠고 심플한 전개의 raw-black에 던전 신스풍의 건반을 얹어낸 류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밴드명부터 이렇게 삐딱한 밴드가 평범한 스타일을 연주하길 기대하긴 어렵겠다. 키보드는 조금만 더 뿅뿅댄다면 칩튠에 들어가도 어울릴 정도의 연주를 보여주고, 거칠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밝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아마도 예전에 했던 콘솔 비디오게임이나 미국 민요 같은 게 아닐까?)를 연주하는 리프를 듣다 보면 뭐야 이건 소리가 나오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좀 더 멀쩡해 보이고 불온하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음악을 연주하는 Impaled Northernmoon Forest 같은 밴드라고 할까? 내놓고 블랙메탈의 다양한 소재들을 조롱했던 Impaled Northernmoon Forest보다는 그래도 더 ‘온건한’ 류의 유머를 다루는 Old Nick 쪽이 소위 골수 메탈헤드들에게는 더 나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야 이 앨범으로 Old Nick을 처음 접하지만 이런 식으로 음악 만드는 밴드이다 보니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곡이 나오는 데까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metal-archives에 의하면 2020년 한 해에만 EP 7장과 정규반 2장, 스플릿 2장, 컴필레이션 3장, 박스세트 3개를 내놓는 미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뭐하는 인간들이냐 진짜), 어찌 생각하면 퀄리티와 상관없이 정말 취미로(만) 음악 만드는 골방 블랙메탈러의 전형이랄 수 있겠으나 앨범을 돈주고 산 입장에서 할 말인지 애매하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Witch Lymph”와 “Flying Ointment”는 그 중에서도 밴드가 맨 처음 내놓은 두 장의 EP인데, “Witch Lymph”가 2020.4.9에, “Flying Ointment”가 2020.4.14에 나왔으므로 뭐 그냥 같이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싶었는지 두 장을 묶어서 CD화하여 팔고 있다. 그래도 5일 먼저 나와서 그런 건지 “Witch Lymph”가 좀 더 건조하고 거친 스타일인데, ‘Infallibld Order of Profane Wizardry’ 도입부의 좀 멀쩡한 리프를 듣고 ‘어?’ 하다가도 곧 등장하는 싼티의 극에 달한 키보드(라 하기도 뭣한 효과음)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Flying Ointment”가 좀 더 멀쩡하단 의미는 아니다. 밴드의 대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Vampyric Candle’의 뭔가 유치하지만 그럴듯하던 도입부가 곧 칩튠으로 변신하는 모습이나 ‘Broomstick Shrouded’의 칩튠을 넘어선 엄청난 도입부를 듣고 있자면(그 와중에 리프는 또 되게 멀쩡함) 세상은 참 넓기도 하다는 진리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Cacophonous Mandrake Horde’ 같은 곡을 들으면 이 분들이 정말 음악 못해서 개그로만 승부하는 건 아니라는 게 엿보인다. 이런 밴드가 중간에 정말 멀쩡하게 한 장 만들어서 내놓는다면 그게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앞으로 계속 찾아보게 될 이름 같다.

[Grime Stone, 2020]

Cryptopsy “An Insatiable Violence”

다작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겠다만 그래도 2-3년마다 정규반이던 EP던 하나씩은 꼬박꼬박 내던 Cryptopsy가 웬일로 EP 이후 5년만에 발표했던(그리고 정규반으로는 11년만이었던) “As Gomorrah Burns”는 밴드 초기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반가운 앨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히 모던해진 사운드가 “The Unspoken King”이 괜히 나온 앨범은 아니었음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는 점에서 청자에게 밴드의 미래에 대한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긴 Flo Mounier 말고는 오리지널 멤버도 없는 2023년의 밴드에게 1994-6년의 사운드를 요구하는 건 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굉장한 초창기를 선보였던 밴드였으니 이쯤되면 밴드의 업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The Unspoken King” 정도면 업보라기에 충분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다시 근면하게 2년만에 내놓은 신작은 여전히 밴드의 기존 노선을 담아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모던함은 오히려 전작보다 덜하면서도 원래 Cryptopsy식 데스메탈이 보여주는 ‘chaotic’한 맛은 좀 덜하다는 점인데, 좋게 얘기하면 좀 더 스트레이트하고 앨범 전반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보여준다랄 수도 있겠다. 아마도 밴드에게 데스코어 소리를 듣게 했을 Matt MaGachy의 하이톤 보컬도 여전하지만 덕분에 이 앨범이 코어 소리를 들을 일은 없어 보인다. 좀 더 묵직한 분위기를 가져가는(덕분에 조금은 “Once Was Not” 생각도 나는) ‘Malicious Needs’를 듣는다면 보컬의 넓은 음역대를 강점이라 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제일 귀에 남는 것은 Flo의 드럼이다. 일단 더 스트레이트한 앨범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2집에 수록됐더라도 어울렸을 듯한 ‘The Art of Emptiness’는 밴드의 유일한 원년 멤버가 Flo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기대보다 훨씬 좋게 들었다.

[Season of Mist,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