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r Factory “Demanufacture”

흘러간 음악 듣는 김에 간만에 들어보는 앨범. 사실 헬스장에서 Fear Factory를 틀어놓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나 적어도 이 앨범 전반부의 절도있는 리듬감과 그루브는 헬스장에서 들으면서 운동하는 데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이제 헬스장만 가면 되는데 원래 실천은 생각보다 어려운 법이라는 핑계를 붙여본다. 각설하고.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기획이 매력적이었는지 ‘인더스트리얼’이란 레떼르를 붙이고 등장한 서브장르는 꽤 많은 편인데, 이런 류의 분화가 오랜 시간 반복되면 결국 오리지널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가 되듯이 사실 Fear Factory쯤 되면 인더스트리얼이란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뭐 원래 “Demanufacture” 이전에는 좀 더 데스메탈 물을 먹은 음악을 연주했던 밴드이기도 하고… Ministry이야 “Twitch”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Cabaret Voltaire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Fear Factory의 음악은 디스토션 먹은 리프 뒤에 깔리는 이펙트 정도를 제외하면 인더스트리얼과의 연관점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거의 확립된 용례에 따라 이 앨범을 인더스트리얼 메탈이라고 부른다면 앨범은 장르의 가장 대표적인 앨범임이 분명할 것이다. 인더스트리얼풍 이펙트는 애먼 그루브에 집착하던 그 시절 다른 여타 밴드들과 이들을 차별화시켰고, Head of David를 커버한 ‘Dog Day Sunrise’ 같은 곡은 밴드가 마냥 헤비함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장르의 ‘근본’을 잘 알고 있다(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호오는 무척 갈릴 곡이기는 함)는 점을 보여주었다. ‘H-K’나 ‘Replica’ 같은 히트곡이 보여주는 심플하지만 힘있는 리프는 전개의 양상은 무척 다르지만 Meshuggah의 리프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발라낸 원형은 이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돌아보면 Meshuggah도 “Contradiction Collapse” 시절에는 좀 더 사람다운 음악을 했었다.

그러니 Burton C. Bell의 라이브가 조금만 덜 형편없었고 Nine Inch Nails의 행보가 조금만 더 지지부진했다면 밴드의 앞날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지도 몰랐겠다는 생각도 든다. 1995년에는 내가 이런 것도 들었었구나 싶어서 괜히 이런저런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다.

[Roadrunner, 1995]

Incarnator “The Anthology – In Nocturnal Glory / Nordic Holocaust”

Incarnator는 Zyphrianus라는 양반이 혼자서 하던 1992년에 두 장의 데모만을 남기고 사라진 노르웨이 블랙메탈 밴드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밴드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꽤 많을 것이고 이쪽 음악의 인재풀이 그리 넓지 않은고로 실력자라면 여기저기 다양한 밴드에서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90년대 초중반의 노르웨이는 더했음을 생각하면 이 원맨 밴드의 데모 모음집(그래봐야 3곡밖에 되지 않는다)에 많은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 이름도 처음 보는 레이블도 검색해 보니 이 모음집을 포함하여 3장의 발매작이 전부 부틀렉이니 이 지점에서 앨범에 대한 기대는 또 한번 깎여나간다. 암만 노르웨이 블랙메탈 팬을 자처한다지만 이래서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귀를 잡아끄는 편이다. 1992년이니 Bathory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 당연한데 기대 이상으로 차가운 분위기와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전개를 보여주지만 중간중간 타이트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는 드럼(좀 느려서 그렇지 D-beat 스타일이긴 하다)은 생전 Euronymous가 이 밴드를 Deathlike Silence에서 발표하는 걸 검토했다는 트리비아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한다. 거칠긴 하지만 1992년의 블랙메탈 데모치고는 음질도 꽤 준수한 편이다. 이미 “A Blaze in the Northern Sky”가 나온 시점에서 이걸 대단한 음악이라 하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겠지만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팬이라면 관심을 가져봄직한 수준은 충분해 보인다.

그렇지만 13분도 안 되는 이 앨범도 부틀렉이라고 해 봐야 싸지도 않고, 오히려 오리지널 데모는 비싸서 그렇지(대충 60유로 수준) 꽤 자주 보이는 편인지라, 어느 쪽을 사던 본전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컬렉션의 측면에선 차라리 오리지널 데모를 찾는 게 더 나을지도.

[Banger, 2015]

Behemoth “The Shit ov God”

개인적으로 심포닉을 강조하다 못해 오케스트라까지 나아가는 류의 블랙메탈 밴드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케스트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시도가 보여주는 ‘거대한’ ‘장엄한’ 부류의 사운드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는 게 싫은 게 아닐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는 “I Loved You at Your Darkest”부터의 Behemoth도 이제는 이쪽으로 분류해도 되지 않을까? 이미 “Evangelion”부터는 Nuclear Blast에서 앨범이 나오는 업계 슈퍼스타의 넘치는 자긍심이 더욱 거대하고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하도록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Behemoth의 앨범들 중 “Grom”을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곤란할 노릇이다)

그리고 어쨌든 Behemoth는 “I Loved You at Your Darkest”에 이르기까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계속해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여주었던 밴드였는데, 지난 “Opvs Contra Natvram”은 “I Loved You at Your Darkest”보다 좀 더 웅장하긴 했지만 어쨌든 동일한 스타일에 정착해 가는 밴드의 양상을 보여주었고, 그런 면에서 “The Shit ov God”은 나로서는 색안경을 끼고 볼 만한 많은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있는 앨범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Behemoth는 그렇게 삐딱하게 보더라도 충분히 괜찮게 들리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밴드인지라 이 앨범도 나쁘지 않다. ‘Nomen Barbarvm’이나 ‘O, Venvs Come!’은 풍요로운 심포닉 가운데 차가운 분위기를 솜씨 좋게 녹여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늘 그랬듯 밴드의 연주는 무지막지하고, 특히 앨범의 후반부로 갈수록 멜로디를 줄이면서 파괴적인 면모에 집중하는 모습에 감흥을 얻을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Behemoth의 자기복제가 시작됐다는 느낌도 지울 순 없어 보인다. 복제한 원본의 퀄리티가 훌륭하다지만 그런 면에서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는 재미없는 축에 속할 사례일 것이다. 이렇게 잘 하는데 재미가 없다니 그냥 내 귀가 문제인가?

[Nuclear Blast, 2025]

Norse “The Divine Light of a New Sun”

이 호주 밴드를 데스메탈과 블랙메탈 중 어느 한쪽으로 얘기하긴 꽤 난감하다. 그렇다고 blackened-death 정도로 얘기하기엔 저 용어에서 떠올릴 법한 일반적인 스타일과 꽤 판이한 편이다. 이런 류의 음악이 통상 공격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밴드는 그보다는 방향성이 좀 다르다. 테크니컬 데스로 시작한 밴드가 Ved Buens Ende류의 블랙메탈에 관심을 가지면서 방향성을 튼다면 나올 법한 음악이라고 할까? 그런가하면 꽤 분위기에 의존하는 전개도 심심찮게 보여주는지라 잘라 얘기하기 어렵다.

그래도 전작인 “Pest”가 좀 더 정통적인 구석이 있었다면 이 앨범에서는 Altar of Plagues 같은 밴드들을 열심히 들었는지 좀 더 뒤틀린 전개(과 때로는 Xibalba풍 하드코어 생각도 나는 사운드)를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앨범의 구성도 좀 더 다양한 편인데, 괴팍한 재즈풍의 연주를 보여주는 ‘The Divine Light of a New Sun’과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Synapses Spun as Silk’ 같은 곡이 한 앨범에 들어 있기는 그리 쉬운 건 아닐 것이다. 그런지라 일반적인 데스메탈 팬이라면 때때로 등장하는 먹먹한 질감의 연주에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앨범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난 꽤 재미있게 들었다. 다음 앨범인 “Ascetic”은 이것과는 또 양상이 다르다고 하던데 구해 봐야겠다.

[Transcending Obscurity, 2017]

Ohtar “Euthanasia of Existence”

Ohtar를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장 타자를 못 치는 블랙메탈 밴드는? Ohtar’ 같은 천인공로할 개그를 던지던 양반인지라 이 밴드에 대한 인상은 마냥 좋지만은 않다. 사실 한국말로 옮기면 오타가 아니라 이실두르의 종자였던 오흐타르가 맞겠으나 생각해 보면 이실두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판에 그 종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리븐델에 나르실의 파편을 가져다 준 공로가 있다지만 영화에도 안 나오더라.

그래도 한창 쏟아져 나오던 폴란드 NSBM 밴드들 가운데에서는 좀 덜 노골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멤버 전원이 Dark Fury나 Thor’s Hammer 출신이니 NSBM의 혐의를 벗을 순 없겠지만 커리어 내내 기복 없이 증오를 쏟아대던 저 밴드들에 비해 Ohtar는 초기의 빼도박도 못할 NSBM의 기운을 언제부턴가(아마도 “Petrified Breath of Hope”부터가 아닐까 싶다) 감추고 있고, 덕분에 NSBM의 거래 자체를 막는 사이트들에서도 Ohtar의 앨범들은 웬만하면 풀어주고 있는만큼 그래도 사정이 좀 낫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럼 이 밴드의 음악을 뭐라고 해야 하나? Selbstmord나 Dark Fury 같은 동향 밴드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느슨한 템포의 블랙메탈이고 앨범이 다루는 이야기도 확실히 DSBM에 가깝지만 이런 스타일의 음악은 지금에 와서 통상 ‘depressive’라고 부르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차가우면서도 최면적인 분위기에 중점을 둔 블랙메탈이라 하는 게 더 나을 것이고, 어찌 생각하면 징징거리는 모습을 걷어낸 황량한 분위기에 집중한 류의 DSBM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The End Is Not Coming, Not Yet…’ 같은 곡의 세상 다 끝났다는 분위기는 분명히 인상적이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다음 앨범인 “Emptiness”에서 더 노골적이겠지만 이 앨범이 좀 덜 징징대는 편이므로 밴드의 예전 모습이 좋았던 이라면 이쪽이 더 나을 것이다.

[Deathrun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