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igor “Time Is the Sulphur in the Veins of the Saint – An Excursion on Satan’s Fragmenting Principle”

“Fractal Possession” 은 좋은 앨범이었다. 다만 ‘좋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이 밴드에게 불안했던 점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Dodheimsgard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복잡해진 사운드는 밴드의 커리어를 통틀어 드물 정도의 급격한 변화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Dodheimsgard까지 간 마당에 Abigor는 이 다음에는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시도할 것인가? 적어도 “Shockwave 666” 에서의 그 납득할 수 없는 사운드는 밴드가 전자음악 쪽에는 별로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앨범은 일단 그런 걱정은 비껴간다. 이따금 테크노 사운드까지 등장할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은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명확히 공존하고 있다. 앨범의 리듬 파트는 밴드의 어느 앨범보다도 격렬하게 진행된다. 거의 Dillinger Escape Plan이나 Mr. Bungle 같은 이들을 생각나게 할 정도인데, 끊임없이 변화하긴 하지만 기타 리프는 블랙메탈의 그것이다. 비중은 적지만 신서사이저 또한 특이하다. 해먼드 오르간까지 등장하는 이런 식의 용례는 사실 블랙메탈보다는 70년대의 호러 컨셉트의 밴드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쯤 되면 앨범의 성패는 이 다양한 질료들을 어떻게 섞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밴드는 전작과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전작이 테크니컬 데스의 방법론에 기댄 부분이 있었다면 이 앨범은 날카로운 트레몰로 리프가 주도하되 어느 정도 뒤틀려 있는 블랙메탈 스타일에 의존한다. 기본적으로 전작과 유사한 류의 ‘twist’ 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정교한 리듬과 무척이나 격렬한 베이스가 곡의 중심에서(이건 블랙메탈에서 꽤 드문 모습이다) 극적인 전개를 이끈다. Deathspell Omega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chaotic’한 분위기임에도 전개는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소위 ‘아방가르드 블랙메탈’의 어느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되게 맘에 들었다는 뜻이다.

[End All Life, 2010]

Black Harvest “Abject”

Black Harvest는 꽤 생소한 이름이다. Kishor Haulenbeek이라는 이름만 봐선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미국 뮤지션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프로젝트인데, 이 분의 커리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Autumn Tears의 “The Origin of Sleep” EP의 커버아트를 맡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넘쳐나는 듣보잡 밴드들 중 하나라고 소개하는 게 사실 더 맞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골방 프로젝트들과는 궤를 달리하고 어쨌든 어엿한 레이블에서 앨범을 발매했지만, Oak Knoll이 사실 발매작의 퀄리티를 담보하는 이름은 아니긴 하므로 그 점을 신경쓴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Abject”는 밴드가 Oak Knoll을 떠나 내놓은 첫 앨범인데,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하는 모양이지만 피지컬로 앨범을 내놓은 건 이게 마지막이므로 이 앨범 이후에는 활동이 변변찮다고 해도 좋을지도? 그런데 이 1인 프로젝트의 음악이 꽤 수준이 높은 테크니컬 blackend-death라는 건 꽤 의외다. 굳이 비교하자면 Extol이 블랙메탈의 기운을 좀 더 머금으면 될 법한 스타일인데, 그런가 하면 ‘The Beggar’s Song’ 같은 곡은 소시적 Opeth마냥 어쿠스틱한 연주로 분위기를 가져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한 10년만 일찍 나왔으면 대단한 명작… 까지는 아니더라도 노작이란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레이블이 있는 게 낫다고 전작보다 확실히 밋밋해진 녹음이 좀 아쉽지만 좋은 앨범이다.

[Self-financed, 2014]

Nifelheim “Unholy Death”

학창시절 스쿨 밴드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밴드들의 시작은 음악적 야심이고 뭐고 나도 밴드로 좀 멋지구리한 모습 보여주고 이성친구 한번 만들어보자! 식의 동기였음을 알고 있다(물론 모두가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님). 일단 그렇게 밴드를 시작한 다음에야 내가 노래를 멋들어지게 하는 보컬이 아닌 다음에야 어설픈 연주만으로는 이성의 눈길을 끌기 어렵고, 설령 부단한 연습으로 실력을 끌어올렸더라도 그 시간에 댄스 연습을 했더라면 훨씬 목적달성에 가까이 갔을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고, 곧 큰 맘 먹고 구했던 악기는 어느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까 1990년 메탈 빠돌이로 소문난 어느 형제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이 밴드가 저런 마음가짐으로 가입할 만한 곳은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이고, 겨우 약관의 나이에 내놓은 이제는 장르의 클래식이 된 셀프타이틀 데뷔작부터 이어지는 행보는 이 밴드의 음악적 야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러니까 이 메탈 빠돌이 형제와 엉겁결에 밴드를 같이 하게 됐던 기타리스트가 여자친구 생겼다고 밴드에서 쫓겨난 사실은 –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 밴드의 방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떠나간 멤버를 이후 메탈 씬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니 애초에 갈 길이 달랐구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게 ‘여자친구 생기기 전’ 녹음된 데모 “Unholy Death”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2024년의 이 컴필레이션 덕분에 이제는 쉽게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흥미로운 건 여자친구 때문에 떠나간 기타리스트 Morbid Slaughter의 연주가 꽤 괜찮다는 점인데, 기본적으로 D-beat에 기반한 전개에 블랙스래쉬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역시 기타다. ‘Satanic Sacrifice’는 Destroyer 666같은 장르의 모범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는데, 리마스터 덕분인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음질 덕에 Nifelheim을 알고 있는 이라면 듣기 어렵지 않다. ‘Dawn of the Dark Millenium’을 빼면 이미 1집에서 들어봤던 곡이지만 데모답게 그보다는 더 거칠게 녹음되어 있으므로 취향 지저분한 귀라면 이 쪽이 더 맘에 드는 구석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사실 “Unholy Death” 데모의 수록곡보다는 컴필레이션에 같이 실려 있는 1993년 데모와 커버곡들이 더 좋기 때문에 가끔은 굳이 “Unholy Death”라는 이름으로 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뭐 어쨌든 밴드의 팬이라면 만족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Darkness Shall Rise, 2024]

Sepultura “Under a Pale Grey Sky”

Max Cavalera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Sepultura의 마지막 앨범? 사실 “Roots” 이후에 나온 라이브 실황을 2002년에 내놓은 앨범이므로 이미 Max와 갈라선 이후에 끄집어낸 ‘좋았던 옛날’의 재탕같은 앨범일 것이니 이렇게 말하는 건 그리 적절하지 않다. 물론 Sepultura가 세평만큼 Max Cavalera가 떠난 이후에 마냥 망작만을 내놓았던 건 아니었고, 새로 들어온 Derrick Greene은 기량만큼은 Max에 뒤처질 인물이 아니었던 것도 맞지만 Sepultura가 그루브메탈을 연주한다는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 이라면 그런 게 사실 크게 의미있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Nation”이 “Against” 이상으로 실망스러웠던 것도 그렇고. 우리의 지구레코드도 “Nation”을 마지막으로 Sepultura의 앨범을 라이센스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니 이런 변신이 대부분의 이에게 반갑지 않았던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Roadrunner에서 나온 Sepultura의 마지막 앨범인 이 라이브앨범은 밴드의 좋았던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아마도 극에 달했을 밴드의 고용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Chaos A.D”와 “Roots”의 수록곡이 주류인 만큼 밴드가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의 모습을 담은 라이브이기도 하고, Sepultura가 Roadrunner에 계속 몸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재계약 할까?를 한번은 고민해볼 법도 할 건실한 라이브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Under Siege”는 비디오였으니 앨범이라기엔 좀 그렇다고 한다면 밴드의 처음으로 나온 오피셜 라이브 앨범이기도 하다. 게다가 ‘Beneath the Remains’나 ‘Troops of Doom’, ‘Inner Self’를 전성기 Max Cavalera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Chaos A.D”를 이제 와서는 즐겨듣지 않지만 원곡보다 더 스피드업해서 들려주는 이 라이브를 접하매 이 앨범이 내 기억(이라기보단 추억)보다 더 좋은 앨범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치는 충분한 셈이다.

그러니까 농담삼아 얘기하면 어찌 보면 삐딱선을 좀 많이 타기 시작한(그리고 다시는 제 궤도로 돌아오지 못한) 밴드에게 찾아온 커리어에 일찌기 없었을 고용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Sepultura도 그렇고, 2025년에도 잊지 않고 삽질을 하다가 감독의 대타 인터뷰 이후 갑자기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 김현수를 보자니 역시 고용안정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얘기가 왜 이리로 흐르지…

[Roadrunner, 2002]

666(NOR) “666”

“Svidd Neger”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점들 중 하나는 대체 이 영화는 뭐고 감독은 누구길래 암만 그래도 잔뼈 굵은 뮤지션이라지만 Ulver에게 OST를 맡길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딘가서 듣게 된 얘기는 그 감독 또한 소시적에 메탈을 연주했고 사실 따지고 보면 노르웨이 블랙메탈 역사의 한 장면을 차지했더라는 얘기다. 딱히 술 마시면서 음악 얘기하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그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 누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도통 흐릿하지만 저 얘기를 듣고 어지간히 신기했던 모양인지 꽤 머릿속에 단단히 박힌 트리비아였다.

암만 좀 맛이 갔다지만 어쨌든 저력이 남아 있던 2020년의 NWN!은 이 트리비아가 괜한 얘기는 아니었으며 이 밴드에서 한 때 베이스를 맡았던 Erik Smith-Meyer가 곧 메탈 때려치우고 영화계로 투신해서 만든 영화가 “Svidd Neger”였음을 만방에 알렸고, 레이블은 곧 사실은 Mayhem 이전에 666이 있었으니 666이 사실상 첫 번째 노르웨이 블랙메탈 밴드라는 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니 이 쯤 되면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팬이라면 이걸 구하지 않을 요량이 없다.

그렇게 구한 앨범은… 뭐 이런 류의 앨범들이 대개 그렇듯이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는 한참 부족하다. 1982년의 라이브 레코딩들을 모은 부틀렉에 가까운 이 컴필레이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런 쪽으로 영향력을 찾는다면 사운드가 좀 Venom마냥 칙칙해진 Motörhead에 가깝다는 정도인데(특히 ‘Alkohol’), Onslaught의 “Power from Hell” 같은 음악에 비한다면 훨씬 70년대식 하드록에 가깝다. 웃기는 것은 저 Erik Smith-Meyer도 이 밴드에서 활동한 것은 1983년이었으니 어찌 생각하면 이 앨범에 대한 홍보문구는 사실인 내용이 별로 없다. 그냥 블랙메탈의 기운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예전의 어느 시작점에는 이런 음악이 있었다는 공부…용 자료로는 충분하겠다.

[Nuclear War Now!,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