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laze My Sorrow “If Emotions Still Burn”

이왕 들은 김에 Ablaze My Sorrow의 데뷔작도 간만에. 이 앨범에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No Fashion 초판에는 앨범 제목이 “If Emotions Still Burns”라고 돼 있었다는 점인데, 암만 영미권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문법 무시하고 앨범명 짓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했던 기억이 있다. 밴드나 레이블이나 앨범 내고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단순 실수였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다녔는지 이제는 넷상의 이런저런 사이트들에서는 모두 “If Emotions Still Burn”이라는 이름으로 이 앨범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미 이 밴드는 내게는 영어 못하는 밴드로 이미지가 박혀버렸으니 이런 걸 사후약방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앨범은 당연히 Dark Tranquillity/In Flames 풍의 리프가 돋보이는 멜로딕데스다. 1996년에 나온 이런 스타일의 멜로딕데스에서 개성을 논하는 건 곤란하겠지만 굳이 밴드의 색깔을 말한다면 전형적인 예테보리 스타일보다는 좀 더 달달하면서서도 은근히 블랙메탈의 기운이 묻어 있는 편이고, 그런 면에서 조금만 덜 달달했다면 A Canorous Quintet이나 Eucharist 같은 밴드와도 비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스메탈 팬들에게 이 밴드의 리프는 너무 달달한 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나름 새로운 시도였을 ‘No More Lies’ 같은 곡도 삐딱한 이에게는 그저 둠-데스를 따라하다 너무 달달해져 버린 곡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어 보인다. 돋보일 건 없지만, 그런 면에서는 아예 운이 좀 따라줘서 메이저의 손길을 받았다면 셀아웃 밴드로 거듭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의미없는 예상일 뿐이다.

[No Fashion, 1996]

Ablaze My Sorrow “The Plague”

스웨디시 멜로딕 데스의 전성기에 등장한 많은 밴드들 중 하나였으나 별로 빛 못 보고 사라진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보기 드문 사례들 중 하나인 Ablaze My Sorrow의 2집. 이 시절 No Fashion에서 나온 수많은 멜로딕데스 밴드들이 그랬듯이 Dark Tranquillity/In Flames 스타일의 리프가 중심이 되는 류의 밴드인데, 일반적인 경우들보다는 리프가 좀 더 달달하고 보컬의 기량이 그래도 받쳐주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보컬마저 Tomas Lindberg 스타일에 가깝고 실험적인 시도는 정말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 좋게 얘기하자면 ‘간결한’ – 전개는 이 밴드를 굳이 되돌아볼 이유를 찾기 힘들게 한다.

그래도 언제는 내가 새로운 것만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좀 강한 음악 오래 좋아했다고 자처하는 이라면 이런 멜로딕 데스를 나름 심취했던 시절이 짧게라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저 장르의 넘쳐나는 클론이라기엔 이제 밴드는 이 2집에서 영민한 블래스트비트의 활용이나 간혹 등장하는 클린 보컬 등으로 조금이나마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미 1998년이니 그 정도가 신선한 시도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시절이긴 했지만 밴드는 2류 멜로딕데스 밴드 소리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I Will be Your God’ 같은 곡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한 곡이 밴드의 팔자를 바꾸기는 많이 부족했고,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 No Fashion 카탈로그의 상당부분을 소화하던 Necrolord의 명품 커버는 온데간데없고 웬 브루스 윌리스 닮은 아재가 불타고 있는 멋대가리 없는 커버는 밴드의 2류 입지를 더욱 확고해 보이게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걸 보면 이런 게 바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No Fashion, 1998]

Kaeck “Gruwelijk onthaal”

역사를 타고 올라가면 1991년부터 시작됐다니 장르의 길지만은 않은 역사를 생각하면 꽤 유서깊은 곳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Folter Records를 블랙메탈의 신뢰할 수 있는 명가마냥 기억하는 이는 아마 별로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Castrum이나 Svartsyn, Skyforger처럼 지금도 기억하는 이름들을 내놓기는 했지만 달리 얘기하면 레이블이 보여준 고점조차 A급으로 쳐주기는 끝내 모자랐던 곳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했듯이 딱히 빛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껏 꾸준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남았으니, 누구나 Season of Mist나 Spinefarm이 될 수는 없음을 고려하면 사실은 이런 곳이 블랙메탈 레이블들이 본받아야 할 ‘현실적인’ 모범일 수도 있어 보인다. 각설하고.

Kaeck도 그렇게 Folter에서 데뷔해서 지금까지 이 앨범을 포함하면 세 장의 앨범을 내놓은 네덜란드 밴드인데, Svartsyn이 그랬던 것처럼 “Pure Holocaust” 시절 Immortal풍의 리프에 건반을 동반하여 차가운 분위기를 구현하는 류의 블랙메탈을 연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시절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전형에 가까운데(그러고보니 저 썸네일 사진에서 하고 있는 자세도 뭔가 Mayhem스럽긴 하다), 공격적인 리프에 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앞으로 나서지도 않는 건반이 사운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Bolt Thrower를 연상케 할 정도로 묵직한 리프(특히 ‘Door gespleten Tongen’)를 앞세운 공격성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그 시절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중간 정도에 있는 스타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Folter가 이런 류의 스타일을 많이 내놓기는 했었다.

익숙하지만 이런 스타일을 이제 이만큼 잘 소화하는 밴드도 확실히 드물어 보인다. ‘De ijzeren hand van het benedenwaartse’를 들었을 때는 이게 올해 최고의 블랙메탈 신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보컬이 좀 깨는 감이 없지 않지만 멋진 앨범이다.

[Folter, 2025]

Vobiscum “Christenblut”

오스트리아 블랙메탈 밴드 Vobiscum의 2집. 밴드는 유명하지 않지만 이 앨범만큼은 2004년을 강타한 희대의 개그작이 되어 많지는 않았지만 블랙메탈 듣는다는 이들에게 꽤 회자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저 엄청난 커버가 어떻게 CCP의 QC를 통과해서 앨범에 실제로 실려 나올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밴드의 중핵인 Count Grimthorn는 역시 CCP에서 나온 다크 앰비언트 프로젝트 Mittwinter를 굴리는 인물이기도 한데, 거기서는 멋질 것까진 없어도 평범하게 봐줄만한 커버를 내놓았는데 여기서는 왜 이러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정 사진을 찍어서 커버로 쓰고 싶다면 미소라도 짓지 말아야 했는데…. 이미 저렇게 나와버린 거 어쩌겠는가.

음악은 저 커버의 위력에 비해서는 무척 평범하다. 좋게 얘기하면 Burzum을 좀 더 스웨디시풍으로 변주한 리프에 밴드가 데뷔작에서 보여준 Dimmu Borgir를 의식했을 법한(하지만 화려하다기엔 좀 많이 애매한) 키보드를 얹어낸 듯한 스타일인데, 저 키보드도 꽤나 가난한 스타일인데다 리프도 썼던 거 계속 바꿔가며 쓰는 수준으로 반복적인지라 장르에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한 이라면 금방 지루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특히나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14분이 넘어가는 ‘Vobiscum’인데, 연주가 연주이다보니 가끔은 곡을 좀 많이 못 쓰는 Graveland 같기도 하다. 물론 송라이팅을 빼놓고 보더라도 이쪽이 훨씬 가난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이 어떻게 CCP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좀 궁금하다. CCP는 명작은 드물어도(이거야 뭐 어느 레이블이라도 대개 마찬가지겠지만)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결과물을 거의 항상 보여주는 레이블이라고 생각하는데 카탈로그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앨범이 유독 많이 튄다. Count Grimthorn이 사장 몸캠 비디오라도 손에 넣었던 것일까.

[CCP, 2004]

Pensées Nocturnes “Nom D’une Pipe!”

Pensées Nocturnes의 4집. 생각해 보면 꽤 독특한 밴드인 것이 Way to End에서 적당히 괴팍한(보통 아방가르드라 불리곤 하는) 블랙메탈을 들려줬던 Vaerohn이 본진과는 달리 클래시컬 무드를 머금은 DSBM으로 나타났다가 그래도 원래 하던 음악이 있는지라 슬슬 괴팍해지다가 이 앨범에서는 괴팍하면서도 카바레 뮤직이다 재즈다 클래식이다 다양한 스타일을 끌어들여 독특한 스타일을 구현하고 있다. 애초에 저 앨범명부터가 영어로 옮기면 ‘Holy shit’ 정도라니 기존의 이미지와는 영 맞지 않는다. 말이 4집이지 3집인 “Ceci Est De La Musique”는 Vaerohn이 주변의 지인들에게만 60장 한정으로 뿌린(그러므로 실물은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앨범이므로 이 앨범을 실질적인 3집으로 친다면 앨범마다 스타일이 아주 널을 뛰고 있다.

그러니까 밴드의 여정이나 이전/이후의 활동과 상관없이 앨범을 살펴보면 커버에 그려진 적당히 spooky하게 묘사된 빅 밴드가 펼치는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옮겨놓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공연이 그리 멀쩡한 모양새가 아니라는 점은 첫 곡인 ‘Il a Mange le Soleli’부터 드러난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각하를 위해 우리나라 국가를 부르겠다는 멘트와 라 마르세예즈가 잠시 등장했다가 과장된 심포닉을 뒤로 하고 뒤틀린 코드가 중심이 된 연주가 시작되고, ‘La Marionnetiste’ 부터는 본격적으로 재즈와 카바레, 클래시컬 무드가 블랙메탈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덕분에 다른 블랙메탈 밴드보다는 Devil Doll이 먼저 생각날 수밖에 없다. 굳이 블랙메탈 쪽으로 찾는다면 Diablo Swing Orchestra 정도랄까.

덕분에 구성은 무척 괴팍하면서도 드라마틱하고, 때로는 과장된 심포닉을 이용해 낭만성을 과시하면서도 어쨌든 이 앨범은 블랙메탈이라는 듯 카바레 특유의 유머는 비껴가고 굵직한 리프로 서사를 풀어나간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스타일이 부딪히면서 사이사이에서 유발되는 촌극들이 때로는 성급하게 봉합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나로서는 즐겁게 들었다. 하지만 블랙메탈 팬보다는 Devil Doll이나 Estradasphere 같은 밴드들을 좋아하는 이에게 더 적합해 보인다…. 만, 하지만 그 분들은 이 블랙메탈 리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Les Acteurs de l’Ombr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