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Woods… “Otra”

In the Woods…가 노르웨이 블랙메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꽤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1세대처럼 여겨지지는 않지만 밴드는 1991년에 벌써 그 시작을 딛었으니 시기적으로도 앞서갔던 이들임은 분명하고, 앨범마다 변화의 폭도 무척 크다 못해 이들의 커리어에는 블랙메탈은 물론 둠/데스메탈에 프로그레시브 록까지 고루 섞여 있으니 이 밴드에 비견할 만한 사례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 재결성한 이후의 밴드는 분명 수준 이상의 음악을 하고 있지만 그 ‘독특한’ 기운은 확실히 잦아들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멤버 변경이 있어서인지 일개 청자가 쉬이 점칠 수는 없겠다만 좀 더 평이한 스타일로 나아갔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도 “Pure”와 “Cease the Day”가 Green Carnation풍 둠-데스의 바탕에서 좀 더 묵직한 리프에 비중을 둔 편이었다면 “Diversum”부터는 무려 파워메탈(이거 라이센스도 됐었다. 관심 있으시면 Guardians of Time의 데뷔작을 참고하시길) 부르던 분을 새로운 보컬로 맞아들이면서 좀 더 보컬에 기운 스타일로 나아갔다. 솔직히 이렇게 더 멜로우한 스타일로 갈 거면 굳이 파워메탈 하던 분을 불러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인데, 듣다 보면 Ulver와 2010년 이후 Amorphis의 보컬을 잘 섞어놓은 듯한 목소리인지라 어울리기는 잘 어울리고, 꽤 다양한 스타일들을 소화하는만큼 앨범을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드는 부분도 있다.

덕분에 앨범은 새로울 건 하나 없지만 2000년대 노르웨이 블랙/데스메탈을 기억한다면 여전히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 Amorphis를 좀 더 어둡게 만든 듯한 ‘A Misinterpretation of I’, Green Carnation 특유의 멜랑콜리를 옮겨온 듯한 ‘The Crimson Crown’, 그 시절 둠-데스 밴드들이 앨범에 한두 곡씩은 넣곤 하던 로큰롤풍 전개를 보여주는 ‘Come Ye Sinners’ 등 이 앨범에서 기대 이상으로 많은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다. 밴드는 이제 초창기의 아방가르드함은 더 이상 보여줄 수 없겠지만 대신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찾아 앨범에 채워놓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In the Woods… 초기의 팬보다는 Green Carnation의 팬에게 더 알맞을 법한 앨범이다. 하긴 “Pure” 부터는 밴드의 모든 앨범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rophecy, 2025]

High Parasite “Forever We Burn”

My Dying Bride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럼 이 30년만의 아시아투어에 불참했던 Aaron Stainthorpe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가? 대충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니 Darkher나 Unto Ashes 같은 후배들 공연에 목소리를 빌려주기도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현역인지라 High Parasite라는 밴드로 공연들을 다닌 모양이더라. My Dying Bride 투어 중에 이러고 있었으니 사이가 엔간히 틀어지기는 했나보다 짐작이 든다. 지금이라도 화해했으면 좋겠다는 게 팬심이지만 이 에고 강하실 분들이 그게 쉬울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언제 샀는지도 사실 기억 잘 안 나는 High Parasite의 앨범도 간만에 들어본다. 사실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Aaron이 씬의 아직은 배고픈 후배들 모아다 본인의 크루너 보컬을 내세울 수 있는 가벼운 고딕 록/메탈 앨범을 만들었다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Greg Mackintosh를 프로듀서로 끌어들인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소시적의 과오처럼 돼버렸고 “Host” 같은 앨범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One Second”는 그래도 꽤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이에게는 Aaron과 Greg이라는 이름만으로 이 앨범을 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인지 곡은 Aaron의 보컬이 얹힌 Paradise Lost풍 고쓰 메탈(이라기엔 많이 가볍지만)처럼 들리고, Aaron의 보컬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앨범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여성보컬과 앨범 전반에 깔려 있는 고쓰 파티의 분위기는 My Dying Bride의 진지함을 생각하면 많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Wasn’t Human’의 사냥을 앞둔 뱀파이어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고 잠깐이지만 Buffy the Vampire Slayer 생각이 났다. 게다가 ‘We Break We Die’의 일렉트로닉 비트를 듣자면 아… Greg이 아직 “Host” 시절의 스타일을 포기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밴드 본인들도 자신들의 음악을 ‘데스 팝’이라 부르고 있으니 그 정도의 기대로 듣기에는 흥겹고 좋아 보이지만, My Dying Bride 공연 갔다 와서 듣기에는 역시 당혹스럽다. 그러니까 Aaron도 아쉬운 게 있더라도 그냥 적당히 하고 화해해서 My Dying Bride나 계속하고 후배들의 복지는 다른 방법으로 챙겨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오늘 생각은 그렇다.

[Candlelight, 2024]

My Dying Bride “The Angel and the Dark River”

My Dying Bride의 어떤 의미에선 역사적이라고 해도 좋을(아시아투어 자체가 30년만이라니) 내한공연이 있었다. 사실 이 밴드를 다른 둠-데스 밴드들과 구별짓게 해 준 면모는 바이올린과 Aaron Stainthorpe의 연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보컬이 만들어내는 어두우면서도 퇴폐와는 사실 거리가 있는 류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피셜 발표만 나지 않았지 Aaron와의 결별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못내 아쉽다. 각설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앨범은 “Turn Loose the Swans”이지만, 그 시절의 묵직한 둠-데스와 밴드의 현재는 어쨌든 거리가 있고, 그런 경향의 시작점은 아마도 이 앨범일 거라고 생각한다. Aaron Stainthrope가 크루너로만 승부하기 시작한 앨범이기도 하고, Martin Powell의 바이올린과 건반이 감초 역할을 넘어서 곡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앨범이기도 하다. ‘The Cry of Mankind’는 그런 밴드의 새로운 모습을 대변하는 곡으로서 장르의 클래식이 되었다. 말하자면 둠-데스인데 그로울링은 어디다 팔아먹고 클린 보컬로만 승부하는 많은 밴드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이 앨범을 듣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Two Winters Only’ 같은 곡이 보여주는 빛나는 낭만은 이런 방향을 아무나 따라할 수는 없음을 재차 보여준다. 후대의 화끈한 맛도 없고 그저 징징거리기만 하는 아류 밴드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지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의 내한공연은 ‘The Cry of Mankind’와 ‘From Darkest Skies’를 라이브로 들은 것만으로도 어쨌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관객 수를 보니 다신 안 올거 같긴 하지만 또 왔으면 좋겠다.

[Peaceville, 1995]

Ründgard “Stronghold of Majestic Ruins”

칠레 블랙메탈계의 근면성실의 대명사 Lord Valtgryftåke의 또 다른 밴드. 이 분의 분주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음악 여정을 좀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90년대풍 클래식 스타일 블랙메탈에 적당히 신서사이저를 곁들인 류의 음악을 밴드 이름만 바꿔가면서 계속 내고 있는지라 이 쯤 되면 굳이 밴드 새로 파가지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만드는 분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퀄리티를 떠나서 일단 저 근면함만큼은 생활인으로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그래도 어쨌든 무슨 이름으로 만들더라도 명반까진 아닐지언정 준작이라 부르기엔 부족함 없는 결과물을 항상 보여주는 분인지라 이 앨범도 나쁘지 않다. 굳이 다른 프로젝트들과 비교하자면 Darkthrone풍 리프에 던전 신스를 얹어놓은 듯한 다른 프로젝트들에 비해서 이 Ründgard가 좀 더 극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다른 프로젝트들(특히 Lord Valtgryftåke나 Winterstorm)에 비해서는 좀 덜 노르웨이스럽고, pagan한 면모는 찾아볼 수 없지만 “Grom”까지의 Behemoth의 모습을 닮아 있는 데가 있다. ‘Descending from the Southern Skies’ 같은 곡이 이런 면모가 두드러지는 편인데, 정말 바이킹스러움만 조금 더해졌다면 소시적의 Satyricon 생각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좋다는 얘기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영광의 이름들에 비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즐겁게 들었다. 그렇지만 되게도 안 팔리는지 2021년에 100장 한정으로 찍었다는 앨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으니 좀 안타깝다. 이 글을 보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잘 팔렸으면 좋겠다.

[Signal Rex, 2021]

Unreqvited “A Pathway to the Moon”

Blackgaze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적어도 Blackgaze의 가장 잘 나가는 밴드들 중 하나인 Unreqvited의 2025년 신작. Prophecy라는 레이블이 원래 이런 음악을 다루는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최근에 Blackgaze 스타일에 있어 최고의 레이블을 꼽는다면 단연 Prophecy가 가장 유력한 후보에 있을 것이다. Blackgaze 밴드로 가장 유명한 밴드들 가운데 Prophecy에서 앨범 한 장 안 내 본 밴드가 얼마나 될 것이나 하면 Deafheaven을 위시한 미국의 힙하다 못해 더 이상은 blackgaze라고 분류하기도 뭣해진 이들을 제외하면 별로 떠오르는 사례가 없기도 하고.

“A Pathway to the Moon”은 이 장르의 떠오르는(아니 돈만 못 벌었지 이미 떠오를 대로 떠오른) 락스타의 현재까지의 앨범들 중 가장 대중적이고 블랙메탈의 기운이 약한 앨범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진폭이 크지는 않아도 Unreqvited의 여태까지의 앨범들은 조금씩은 스타일을 달리해 왔지만 어쨌든 블랙메탈의 색깔이 포스트록보다는 좀 더 짙은 편이었다면, 이제는 이 밴드를 포스트록 성향이 있는 블랙메탈 밴드인지, 아니면 포스트록 밴드가 블랙메탈의 요소를 받아들인 것인지 모호해졌다. blackgaze 밴드가 블랙메탈과 포스트록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전의 앨범들이 두 가지가 혼재된 양상의 음악을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그 두 가지는 슬슬 분리되어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한다. ‘Antimatter’처럼 Ihsahn과 Alcest가 섞이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곡이 밴드의 색채를 대변한다면 과장인 부분이 있겠지만 이전의 Unreqvited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이 앨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블랙메탈이 아닌 부분에 있다. ‘Starforger’나 ‘Departure: Everlasting Dream’의 파르라니 빛나는 듯한 신서사이저 앰비언트는 다른 블랙메탈 밴드가 보여주기 어려운 무엇일 것이다. 솔직히 ‘Departure: Everlasting Dream’의 어느 부분에서는 Enya 생각이 났다. 지금 한국인이 좋아하는 블랙메탈을 꼽는다면 이 앨범을 추천할 것이다. 아 그런데 그런 걸 꼽지도 않겠지만 꼽아도 나한테 물어보질 않겠구나….

[Prophecy,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