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lser “Afgrundsprofeti”

작년에 결성됐다는 덴마크 블랙메탈 밴드의 데뷔작. 덴마크 블랙메탈이라면 Afsky나 Angantyr, Blodarv, Holmgang 정도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힙한 귀를 자임하는 이라면 Myrkur 정도를 덧붙일 수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이 장르에서 덴마크가 딱히 퀄리티를 보장하는 나라는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시선일 것이므로 이런 설명만으로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래도 Vendetta Records의 발매작들을 보면 QC는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므로 이 쯤 되면 레이블의 안목만을 믿을 뿐이다.

그렇게 나온 앨범은 2025년 발매작으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전형에 다가간 편이다. 근래 접했던 덴마크 블랙메탈 밴드들이 펑크풍이 강했던 걸 생각하면(그것도 따지면 Darkthrone 때문이랄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이나 Mayhem의 초창기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밴드는 흔치 않은데, 특히나 ‘Knivene hvisker’ 같은 곡은 – 음질을 제외하면 – 보컬 스타일도 그렇고 Mayhem 1집에 실리더라도 그리 이질적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Afgrundsprofeti’과 ‘Elsker du stadig din næste?’에 등장하는 첼로 연주는 좀 이색적으로 들리지만, 완급조절을 넘어서 아예 중간중간 둠 메탈 패시지를 박아넣는 밴드의 작풍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긴 저 ‘Elsker du stadig din næste?’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에 좀 더 했어도 됐겠다 싶긴 하지만.

[Vendetta, 2025]

Hammers Rule “Spontaneous Human Combustion”

간만에 Metal Enterprises 발매작. 어쩌다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개똥같은 레이블 발매작들 전작 컬렉션이 나름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개똥같은 레이블에서 나온 개똥같은 밴드의 개똥만도 못해보이는 앨범이 150유로를 호가하는 덕분에 포기한 지 꽤 오래되었다. 훗날 어느 미친자가 재발매한다면 구해볼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재발매하기엔 너무도 대단한 물건이 많은지라 이 레이블의 발매작들이 다시 빛볼 일은 정말 웬만해서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말하다 보니 내 얼굴에 침뱉기 같은 느낌이므로 일단 넘어가고.

그래도 이 레이블의 카탈로그가 그런 사례들로만 꽉 차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메탈이 아닌 펑크 발매작들만 보면 놀랍도록 멀쩡한 레이블이고(Böhse Onkelz가 뭐 약점잡힌 게 있나 싶은 수준) 메탈만 보더라도 Black Virgin이나 Expect No Mercy 같은 멀쩡한 밴드들이 있었으며 레이블이 레이블인만큼 기대치를 좀 많이 낮춰놓고 본다면 이 Hammers Rule의 2집도 비교적 모범사례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스타일을 말하자면 템포 좀 낮춘 Iron Maiden의 기운이 살짝 엿보이는 류의 헤비메탈인데, 데뷔작과 동일인물인지 모르겠으나 훨씬 앵앵대는 목소리의 보컬이 무척 거슬리지만 기대 이상으로 서사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Buried Alive’나 그래도 미국 밴드라고 듣다 보면 헤어메탈 류의 친숙함이 엿보이는 ‘Spontaneous Human Combustion’ 같은 곡은 이 레이블이 남긴 최고의 메탈 트랙…의 후보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미쌍관이라고 앨범의 처음과 마지막을 레이블 색깔에 맞게 빅재미를 노리는 듯한 곡들로 채워넣는 모습을 마주하면 청자는 다시금 정신을 다잡게 된다. 아 멀쩡한 줄 알았는데 그래 돈 주고 살 만한 물건은 역시 아니구나. 그러니까 오늘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Metal Enterprises, 1987]

Chortoryi “Мисливці(The Hunters)”

현존하는 블랙메탈 레이블들 중 No Colours만큼 장르의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곳도 드물겠지만 최근에 No Colours의 신작 얘기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이 장르의 현재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쇠락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예전의 ‘클래식한’ 스타일이 장르의 중심에서는 비껴난 것처럼 보이는 현재(어쩌면 그 시발점은 Deathspell Omega의 성공일지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에 와서 No Colours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NS 혐의 짙은 레이블이 여태까지 독일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조금은 놀라울 일이다. 각설하고.

대충 ‘초루흐’ 정도로 읽는다는 이름(드네프르강 지류의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 밴드의 데뷔작은 No Colours가 2025년 9월 현재를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냈던 신작이면서(그러니까 꽤 오래 쉬고 있는 셈이다) 포크 바이브 강한 멜로딕 블랙메탈을 담고 있다. 하긴 애초에 저런 이름을 달고 나온 블랙메탈 밴드라면 포크적인 면모는 당연할 것이고, 출신이 출신인지라 Nokturnal Mortum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직선적이면서 덜 서사적이다. ‘Крик в чорноті (Scream in the Black)’ 같은 곡의 인트로에서는 살짝 Judas Priest 생각도 났다고 하면 과장일까? 사실 앨범을 관통하는 kobza라는 전통 악기(이게 커버에 그려진 저 만돌린처럼 생긴 악기라 한다)를 제외하면 포크적인 면모가 그리 짙지는 않다. Kroda 같은 밴드의 음악에서 이런저런 악기들을 걷어내고 메탈 밴드의 본연의 편성으로 연주한 부분만을 남겨놓는다면 비슷하겠거니 싶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포크’를 내세운 블랙메탈 밴드들 중에서는 가장 정통적인 사운드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곡을 끌어가는 모습이 꽤 매끄러운지라 앞으로의 앨범을 기대해 봄직 하다… 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다 보니 밴드의 핵심인 Ievhen Olefirenko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했다 하더라. 전쟁의 화마는 이렇게 생각지 않은 지점에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No Colours, 2023]

Gathering, The “Almost a Dance”

The Gathering 얘기 나온 김에 간만에 들어본다만 “Mandylion”으로 이 밴드를 처음 접한지라 Anneke가 없던 시절의 The Gathering이 엔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밴드의 1, 2집이 나왔던 Foundation 2000은 90년대 초중반에 여성보컬을 앞세운 밴드의 앨범이 나올 만한 곳은 아무래도 아니었고, 빛나는 면을 보여주는 둠-데스를 연주했다지만 앨범을 낼 때마다 보컬이 바뀌는 행보는 훗날의 성공이야 어쨌든 밴드 초창기의 배고프고 불안정한 입지를 짐작케 한다. 말하고 보니 이 밴드가 어떤 고정적인 스타일을 유지한 적이 있긴 있었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밴드의 제일 배고픈 시절은 이 “Almost a Dance” 까지일 것이다.

그래도 이후의 스타일의 변화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앨범이기는 분명하다. Foundation 2000의 발매작이라고 믿기 어려운 커버도 그렇고, 데뷔작을 주도했던 Bart Smits의 그로울링이 사라지고 Niels Duffhuës의 클린 보컬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 장뿐이었지만 Orphanage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보여준 Martine van Loon을 여성 보컬리스트로 영입했다. 전작이 둠-데스 연주에 심포닉 프로그의 기운을 살짝 입힌 스타일이었다면 이젠 데스메탈의 기운은 더욱 옅어졌다. 가가멜 느낌까지 나는 Niels의 보컬만 아니었다면 분위기 퍽 잘 살린 둠-데스라고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잘 들어오는 곡이 어쿠스틱 발라드인 ‘Nobody Dares’라는 걸 보면 Niels의 영입은 밴드에게 그리 좋은 선택은 확실히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Niels 대신 새로운 보컬을 내세우고 연주를 좀 더 풍성하게 해서 다시 녹음하면 어떨까 되게 궁금한 앨범이기도 하다. 물론 메탈 졸업한 지 20년도 넘은 이 밴드가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궁금한 걸 어쩌겠나.

[Foundation 2000, 1993]

Antichrist Siege Machine “Vengeance of Eternal Fire”

Antichrist Siege Machine의 2024년작. 사실 이름이나 음악이나 특이할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상보다 많은 주목을 받은 밴드라고 생각하는데, Profound Lore에서 앨범이 나온 war-metal 밴드라는 점만으로도 일단 좀 튀는데다, (아무래도 하는 얘기가 얘기이다보니)정치적 불온함의 혐의를 어느 정도는 항상 받아 온 장르가 war-metal이라면 멤버들이 Black Lives Matter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기도 했던 war-metal 밴드는 이래저래 특이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힘있게 밀어붙이는 데는 분명한 솜씨를 보여주고, 원래 다른 war-metal 밴드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모던한 편이기는 했지만 Profound Lore로 옮기면서 확실히 예전보다 돈맛 나는 음질을 과시한다. 그러니까 적당히 먹먹한 음질에서 배가되는 장르 특유의 ‘chaotic’한 분위기를 즐기는 경우라면 역시 장르를 이해 못 하는 레이블에서 밴드 하나 버렸다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한데, 종전보다 데스메탈의 기운이 더 강해진 리프와 그루브가 밴드가 선택한 해결책인가 싶다. ‘Prey Upon Them’ 같은 곡의 그루브는 종전만 해도 Revenge의 스타일에 더 근접했던 이들의 앨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고, D-Beat의 기운이 강한 ‘Vanquish Spirit’도 어쨌든 Conqueror와 Revenge에서 시작됐을 이들의 음악이 어떻게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준다. 장르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하나 제시한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Profound Lor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