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ana “Desolation’s Flower”

이런 밴드를 접할 때면 블랙메탈이란 장르가 내가 처음에 블랙메탈을 듣기 시작할 때와는 꽤 다른 장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유럽에서 시작하고 좀 더 융성한 편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북미가 힘을 쓰지 못한 음악이 90년대까지의 블랙메탈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이 슬슬 인종의 용광로다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종래에는 이 장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이제는 그 90년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게 무슨 블랙메탈이냐란 소리가 나올 정도의 음악(아무래도 Sacred Bones나 The Flenser 같은 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도 등장한다.

페미니즘과 LGBTQ를 다루는(게다가 멤버 중 한 명은 논바이너리라는) 알고 보면 2011년부터 시작했다는 의외로 오랜 역사의 이 듀오가 블랙메탈 카테고리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이 음악을 둠적인 데가 있는 블랙메탈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음악에서 90년대 북유럽 블랙메탈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사실 듣다 보면 이걸 블랙메탈이라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블랙메탈이라기보다는 Isis 류의 슬럿지의 모습을 Mogwai풍 포스트록에 입혀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게 cascadian 블랙메탈이라 하면 할 말은 없음)? 하지만 때로는 Chelsea Wolfe 같은 이를 연상케 하는 적당히 어둡고 자욱한 분위기가 슈게이징의 물을 먹으면서 꽤 노이지한 기타 리프와 대조를 이루는 모습은 블랙메탈이 멜랑콜리를 표현하는 모습과 많이 닮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블랙게이즈나 Wolves in the Throne Room 류의 음악을 즐기는 이라면 만족할 수 있어 보인다. 솔직히 커버만 보고 뭔가 잘못됐다 싶었는데 정작 음악을 들어보니 가끔은 좀 많이 거슬리는 보컬을 제외하면 가끔은 달려주는 맛까지 보여주는지라 꽤 재미있게 들었다. 다만 많은 곳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혁명적이기까지 한 음악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니 취향 때문이라 하시면 당신 말씀이 맞겠지요 네.

[The Flenser, 2023]

Old Nick “Witch Lymph/Flying Ointment”

Old Nick은 이름답게 미국 블랙메탈 밴드이고, 기본적으로 거칠고 심플한 전개의 raw-black에 던전 신스풍의 건반을 얹어낸 류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밴드명부터 이렇게 삐딱한 밴드가 평범한 스타일을 연주하길 기대하긴 어렵겠다. 키보드는 조금만 더 뿅뿅댄다면 칩튠에 들어가도 어울릴 정도의 연주를 보여주고, 거칠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밝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아마도 예전에 했던 콘솔 비디오게임이나 미국 민요 같은 게 아닐까?)를 연주하는 리프를 듣다 보면 뭐야 이건 소리가 나오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좀 더 멀쩡해 보이고 불온하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음악을 연주하는 Impaled Northernmoon Forest 같은 밴드라고 할까? 내놓고 블랙메탈의 다양한 소재들을 조롱했던 Impaled Northernmoon Forest보다는 그래도 더 ‘온건한’ 류의 유머를 다루는 Old Nick 쪽이 소위 골수 메탈헤드들에게는 더 나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야 이 앨범으로 Old Nick을 처음 접하지만 이런 식으로 음악 만드는 밴드이다 보니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곡이 나오는 데까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metal-archives에 의하면 2020년 한 해에만 EP 7장과 정규반 2장, 스플릿 2장, 컴필레이션 3장, 박스세트 3개를 내놓는 미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뭐하는 인간들이냐 진짜), 어찌 생각하면 퀄리티와 상관없이 정말 취미로(만) 음악 만드는 골방 블랙메탈러의 전형이랄 수 있겠으나 앨범을 돈주고 산 입장에서 할 말인지 애매하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Witch Lymph”와 “Flying Ointment”는 그 중에서도 밴드가 맨 처음 내놓은 두 장의 EP인데, “Witch Lymph”가 2020.4.9에, “Flying Ointment”가 2020.4.14에 나왔으므로 뭐 그냥 같이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싶었는지 두 장을 묶어서 CD화하여 팔고 있다. 그래도 5일 먼저 나와서 그런 건지 “Witch Lymph”가 좀 더 건조하고 거친 스타일인데, ‘Infallibld Order of Profane Wizardry’ 도입부의 좀 멀쩡한 리프를 듣고 ‘어?’ 하다가도 곧 등장하는 싼티의 극에 달한 키보드(라 하기도 뭣한 효과음)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Flying Ointment”가 좀 더 멀쩡하단 의미는 아니다. 밴드의 대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Vampyric Candle’의 뭔가 유치하지만 그럴듯하던 도입부가 곧 칩튠으로 변신하는 모습이나 ‘Broomstick Shrouded’의 칩튠을 넘어선 엄청난 도입부를 듣고 있자면(그 와중에 리프는 또 되게 멀쩡함) 세상은 참 넓기도 하다는 진리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Cacophonous Mandrake Horde’ 같은 곡을 들으면 이 분들이 정말 음악 못해서 개그로만 승부하는 건 아니라는 게 엿보인다. 이런 밴드가 중간에 정말 멀쩡하게 한 장 만들어서 내놓는다면 그게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앞으로 계속 찾아보게 될 이름 같다.

[Grime Stone, 2020]

Cryptopsy “An Insatiable Violence”

다작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겠다만 그래도 2-3년마다 정규반이던 EP던 하나씩은 꼬박꼬박 내던 Cryptopsy가 웬일로 EP 이후 5년만에 발표했던(그리고 정규반으로는 11년만이었던) “As Gomorrah Burns”는 밴드 초기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반가운 앨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히 모던해진 사운드가 “The Unspoken King”이 괜히 나온 앨범은 아니었음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는 점에서 청자에게 밴드의 미래에 대한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긴 Flo Mounier 말고는 오리지널 멤버도 없는 2023년의 밴드에게 1994-6년의 사운드를 요구하는 건 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굉장한 초창기를 선보였던 밴드였으니 이쯤되면 밴드의 업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The Unspoken King” 정도면 업보라기에 충분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다시 근면하게 2년만에 내놓은 신작은 여전히 밴드의 기존 노선을 담아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모던함은 오히려 전작보다 덜하면서도 원래 Cryptopsy식 데스메탈이 보여주는 ‘chaotic’한 맛은 좀 덜하다는 점인데, 좋게 얘기하면 좀 더 스트레이트하고 앨범 전반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보여준다랄 수도 있겠다. 아마도 밴드에게 데스코어 소리를 듣게 했을 Matt MaGachy의 하이톤 보컬도 여전하지만 덕분에 이 앨범이 코어 소리를 들을 일은 없어 보인다. 좀 더 묵직한 분위기를 가져가는(덕분에 조금은 “Once Was Not” 생각도 나는) ‘Malicious Needs’를 듣는다면 보컬의 넓은 음역대를 강점이라 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제일 귀에 남는 것은 Flo의 드럼이다. 일단 더 스트레이트한 앨범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2집에 수록됐더라도 어울렸을 듯한 ‘The Art of Emptiness’는 밴드의 유일한 원년 멤버가 Flo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기대보다 훨씬 좋게 들었다.

[Season of Mist, 2025]

Abraxas(GER) “Shattered by a Terrible Prediction / Signs”

아브락사스라는 이름도 밴드명으로는 – 흔치는 않더라도 – 간혹 보이는 편인데, 내가 아는 한도에서 그래도 멀쩡한 음악을 했던 사례는 이 밴드와 폴란드 네오프로그 밴드 정도였던 것 같다. 저 네오프로그 밴드도 은근히 메탈릭한 면모를 자주 보여줬던 걸 보면 메탈 밴드 이름으로 나쁘지 않을 듯도 한데 저 영지주의스러운 용어가 메탈 밴드의 이미지에는 그닥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각설하고.

이 밴드도 나보다는 훨씬 좋게 들은 사람이 많았는지 활동 접은 지 20년도 넘은 밴드의 데모 2장(1988년의 “Shattered by a Terrible Prediction”과 1991년의 “Signs”)을 묶어서 이렇게 재발매됐는데, 첫 정규작인 “The Liaison”은 1993년에 나왔지만 이미 1988년부터 데모를 냈던 밴드인지라 음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Abraxas의 음악보다 좀 더 파워메탈의 전형에 가깝다. 정규작이 파워메탈이긴 하지만 사실 Fates Warning의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레시브함이 있는 음악이었다면 데모는 그보다는 좀 더 Helloween(특히 “Walls of Jericho”)나 Heaven’s Gate 같은 밴드들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Iron Maiden 스피드업 버전이랄 데도 있겠다.

그래도 듣기에는 확실히 좀 더 원숙해 보이는 “Signs” 데모가 더 나아 보인다. 첫 데모보다 확실히 USPM의 그림자가 느껴지면서 좀 더 극적인 구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몇몇 곡에서는 소시적 Crimson Glory의 모습도 보여주는 데가 있다(특히 ‘Stolen Memories’). 이 앨범 두 장 내고 망해버린 밴드를 굳이 왜 끄집어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즐겁게 들었다.

[Golden Core, 2025]

Shining(SWE) “Lots of Girls Gonna Get Hurt”

우울하기 그지없던 초창기를 뒤로하고 이제는 블랙메탈계의 락스타에 많이 가까워진 Shining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레이블을 정말 꽤나 자주 바꾼 사례이고, 이 밴드가 드라마틱할 정도로 방향성을 튼 적은 없지만 레이블의 변화와 함께 스타일도 조금씩은 레이블에 맞췄는지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Depressive라는 수식어에 가장 어울릴 정도로 어두웠던 1, 2집은 Selbstmord Services에서, 이후 좀 더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전개의 3, 4집은 Avantgarde Music에서, 이후 좀 더 정통적이면서도 시원하게 후려치던 5, 6집은 Osmose에서, 그보다도 좀 더 흥겨웠던 7, 8집은 Spinefarm에서 나왔다. 일부러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평론가라면 아마 꽤 많은 쓸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다른 이들의 과제일 테니 이쯤에서 접어두고.

그래도 어쨌든 Depressive한 분위기만큼은 꾸준하게 가져간 Shining의 발매작 중에서 가장 특이한 한 장을 고른다면 Spinefarm에서 나온 이 EP가 아닐까? “VII: Född Förlorare”부터는 확실히 메인스트림에 가까워진 음악을 연주하긴 했지만 예전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Katatonia의 커버(‘For my Demons’)는 물론이고, 나머지는 아예 Kent나 Imperiet처럼 메탈과 상관없는 넘버들을 음울한 무드의 ‘발라드’로 커버하고 있으니 Shining이라는 밴드는 물론이고 Niklas Kvarforth라는 보컬리스트의 커리어에서도 가장 독특한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Peter Bjärgö의 코칭 덕분인지 Niklas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었나 싶을 정도로 수려한 보컬을 들려주고, 원곡들이 괜찮은 멜로디의 팝이었던지라 밴드의 발매작들 중에서는 가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한 장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보컬이 다르고 묵직하게 편곡되었다는 정도를 빼면 원곡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력한 듯한 음악인지라 Shining의 이름을 지우고 듣는다면 그리 재미있는 앨범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Shining이라는 이름이 이런 음악에 어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Niklas 같은 얼굴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오면 안 된다고도 하던데… 뭐 노래 잘 하는 게 죄는 아니니 이만 넘어간다.

[Spinefarm,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