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gelis “Antarctica”

추석 연휴도 됐는데 날씨가 이리 더운 거 보면 확실히 세상이 예전과는 여러 측면에서 달라졌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이없이 더운(못 견디게 덥다는 의미가 아님) 날이 어떤 면에서는 한여름보다는 더 힘들게 느껴지는지라 이럴 때 간혹 꺼내듣곤 하는 앨범. 애초에 일본영화를 위해 나온 사운드트랙이니만큼 일본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이는 앨범이고 한 20년 전 즈음까지는 동아시아권 말고 다른 대륙의 이들에게는 꽤 구하기 어려운 앨범으로 회자되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나처럼 중고 CD 만원 주고 사서 들었던 이들에게는 뭐 그랬던가 보다… 하는 얘기긴 하다.

아무래도 나온 타이밍도 그렇고 “Chariots of Fire” OST와 비교하지 않을 순 없겠고, 마침 둘 다 이 시절 Vangelis의 일렉트로닉한 ‘심포닉’이 돋보이는 앨범이기도 한데… 결국 영화라는 매체에서 음악이 영상이 구현하는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그런 측면에서 더 성공적이었던 사례는 이쪽이 아닌가 싶다. 일단 영화 자체가 이쪽이 더 단순한 스토리(랄 게 사실 별로 없지만)를 보여주기도 하고, 영상 없이 음악만 듣더라도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충분해 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뮤지션의 이름 탓인지 일렉트로닉 프로그를 운운하는 글들이 많지만, 사실 Vangelis의 솔로작 중에서는 가장 뉴에이지에 가까운 앨범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못 들어본 게 무척 많으므로 장담할 순 없을 얘기다.

어쨌든 이 앨범 이후에 이 앨범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간 음악을 담아낸 많은 영상물들이 소위 시네필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게 주변의 어느 못생긴 자칭 영화광의 평가였는데, 정작 저 일본영화를 보다가 음악이고 뭐고 어느 순간 딥슬립에 빠져든 나로서는 그런 평가가 합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서도 오리지널 영화보다는 이 음악을 남극과는 아무 상관없이 보이는 어느 비키니 입은 여인네의 영상에 덧씌운 쪽이 조회수가 훨씬 높더라. 하긴 그런 게 세상이렷다.

[Polydor, 1983]

Caravan “In the Land of Grey and Pink”

요새 프로그한 걸 너무 많이 들어서 좀 덜한 걸 들으려다 보니 손에 잡힌 게 하필 왜 Caravan일까 싶긴 한데 캔터베리 씬이다 뭐다 하는 세평을 떠나서 나는 이 밴드의 가장 큰 강점은 그 팝 센스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태생부터 재즈나 클래식 물을 잔뜩 먹은 밴드였던 건 맞고 앨범을 듣다 보면 난해하달 수밖에 없는 임프로바이징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명확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단정한 리듬감과 팝 센스는 같이 캔터베리로 분류되는 다른 밴드들과도 확실히 구별될 것이다. 하긴 캔터베리 씬이라는 말이 애초에 어떤 장르적 특성을 가리키는 건 아니기도 하고.

누가 뭐래도 밴드의 최고작일 이 3집은 22분짜리 ‘Nine Feet Underground’ 때문인지 무슨 프로그레시브의 화신처럼 얘기되곤 하고, 실제로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프로그한 축에 드는 것도 맞지만 이 앨범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그야말로 브리티쉬함의 극을 달리는 팝이다. 피아노는 물론 플루트, 색소폰, 피콜로, 오르간, 멜로트론에 다양한 퍼커션들까지 어우러진 풍성한 연주에 ‘Love to Love You’같은 곡이 보여주는 은근한 댄서블함, 프로그레시브가 뭔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게도 자연스레 틀어줄 수 있을 ‘Golf Girl’과 단정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Winter Wine’ 등 빠질 곡이 없다. 오히려 굳이 빠질 곡을 고른다면 가끔은 이렇게까지 과중하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한 ‘Nine Feet Underground’라고 생각한다. 연주 잘하는 거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반복은 자칫하면 많이 피곤해지는 법이렷다.

그러고 보면 이 앨범을 좋아하지만 어디 가서 Caravan을 좋아한다고는 말 못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아니 이 프로그 명반을 그저 팝이라 한다고 분기탱천하시는 분이 있다면 당신 말이 맞으니 그냥 돌아가 주세요.

[Deram, 1971]

Fraction “Moon Blood”

6말 7초 헤비 사이키델릭 록의 알아주는 걸작 중 하나이지만 나로서는 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접한 것도 이 앨범을 사려던 것이 아니라 Moonblood의 “Fraction”이라는 앨범이 있는 줄 알고 구한 건데 1도 상관없는 앨범이 도착해서 되게 황당하게 앨범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무식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괜찮게 나온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각설하고.

바야흐로 히피 무브먼트가 기세가 꺾였고 다양한 장르들이 뒤섞이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독특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헤비 사이키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드록이라고 하긴 어려울 스타일이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밴드는 물론 The Doors이지만 Jim Beach의 보컬은 Jim Morrison보다는 좀 더 어둡고 와일드한 편이고, Don Swanson의 퍼즈 잔뜩 먹인 기타는 사이키 좀 들었다면 익숙할 그 스타일을 그 시절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듯 묵직하게 나아간다. 이걸 두고 후대의 둠 메탈이나 고쓰 록을 예기했다고 주장하는 혹자도 있기는 한데… 그건 좀 많이 과한 얘기지만 ‘Come Out of Her’ 같은 곡을 보자면 이 밴드가 그 시절 많은 The Doors 짝퉁 밴드와는 확실히 격이 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저 어두운 맛 때문에 비슷한 밴드로 Black Sabbath를 언급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에너제틱한 면모를 많이 가진 건 맞지만 메탈의 기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그런 쪽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별로 맞지 않을지도.

[Angelus, 1971]

Asia “Live in Moscow”

Asia의 첫 번째 공식 라이브 앨범? Asia가 그 시절의 걸물들만 모아 놓은 슈퍼밴드인 것도 맞고 제일 잘 나가던 시절에는 차트를 호령…까지는 아니어도 의미있는 성과를 보여준 것도 맞지만 이 밴드의 앨범을 “Astra” 이후에까지 찾아들은 사람은 아마 별로 없으려니 싶다. 그래도 1990년에 무려 모스크바 라이브라니 암만 기세가 꺾였을지언정 Asia가 80년대 서구의 록을 대표하는 밴드들 중 하나로 비춰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라이브를 하거나 말거나 Asia가 한국에 올 리는 만무했고 그러니까 Asia의 공연을 간접체험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90년대 초중반 이 라이브앨범은 반드시 구해야 할 아이템이었다. 물론 이후 이 밴드의 라이브가 사골 우리는 수준으로 계속 나올 줄 알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구할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그런 걸 알 수 있었다면 아마 돈 모아서 애플 주식부터 사지 않았을까… 뭐 어쨌든 ‘아시아’냐 ‘에이셔’냐 헷갈렸던 이 밴드명 읽는 법을 John Wetton이 공연 서두에 ‘아시아’라고 확실히 밝혀준 앨범이라는 의미도 덧붙여 본다. 앨범의 퀄리티를 떠나서 꽤 추억이 많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Steve Howe보다는 아무래도 Mandy Meyer에 가까워 보이는 Pat Thrall의 기타 덕분인지 앨범의 곡들은 원곡보다는 좀 더 심플하게 전개되어 있고, 특히 ‘Don’t Cry’나 ‘Sole Survivor’ 같은 초창기의 곡들은 원곡과 꽤 눈에 띄는 차이를 보여주는데, Steve Howe보다 좀 더 헤비한 연주를 보여주는 탓인지 King Crimson의 ‘Starless’ 연주가 들어 있다는 점이 앨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겠다. 문제라면 그 헤비한 연주를 녹음이 전혀 받쳐주지 못한다는 점인데 특히나 한창 시절의 에너지를 쏙 빼버린 듯한 Geoff Downes의 키보드 연주는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긴 Asis 앨범 들으면서 파워 찾는 것도 아니다 싶긴 하지만 이런 스타디움 밴드가 이렇게 빈티를 내서는 좀 그렇지 않은가.

[Cromwell, 1990]

Camerata Mediolanense “Atalanta Fugiens”

클래시컬 다크웨이브에서 Camerata Mediolanense는 가장 무거운 이름들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야 80년대 중반부터 혼자 이런 음악을 하고 있었던 Ataraxia와 Peter Bjärgö가 이끄는 Arcana 같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클래식보다는 낭만성 짙은 던전 신쓰에 가까워 보이는 저 둘에 비하면 밴드 편성도 그렇고 좀 더 클래시컬한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호전적인 비트로 역동성을 이끌어내는 모습으로 나름의 개성을 보여준만큼 Camerata Mediolanense도 장르를 선도한다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그러니까 사실 이 밴드의 음악을 설명함에 있어 굳이 포스트펑크를 끄집어내는 얘기들은 틀렸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무척이나 짙은 셈이다). 뭐 장르를 선도한다기엔 따라오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그걸 이 밴드들 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이 밴드야 데뷔 때부터 이런 스타일 자체는 비교적 일관되게 가져온 편이었지만 그래도 전작인 “Le vergini folli”가 연주보다 보컬 하모니에 좀 더 기울어지면서 그나마의 공격성을 상당히 걷어낸 앨범이었다면 “Atalanta Fugiens”는 밴드의 기존 스타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금 강해진 퍼커션의 힘은 ‘Corallus’의 위계 넘치는 사운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편인데, 미니멀하지만 점차 고조되는 구성으로 힘을 보여주는 ‘Embryo Ventosa’ 도 있고, 확실히 파워풀해야 할 지점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는 현재까지 나온 Camerata Mediolanense의 앨범들 중에서는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Prophecy가 돈 쓴 티 나는 매끈한 레코딩 덕에 ‘싼티 심한 신서사이저에서 무슨 중세풍이란 말이냐’ 식의 비판도 해당하진 않을지니 그런 걱정을 하는 이라면 이 앨범을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지도.

[Prophecy,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