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y Currie “Transportation”

transportation198880년대에 뉴웨이브로 살길 찾아보려던 프로그레시브 뮤지션들이 좋은 평가를 들은 적은 (내 기억에)별로 없었지만 Billy Currie의 이 앨범은 그런 흐름에서는 조금은 비껴갔던 거로 기억한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어쨌든 Billy Currie의 솔로 앨범이었으므로 아예 프로그레시브로 분류될 기미조차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한데, 사실 음악을 듣자면 Steve Howe가 사운드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고로 그래도 그 시절 프로그레시브 록이 내놓았던 수많은 자구책들 중 하나로 봐주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뮤지션 본인부터가 커버에 Steve Howe를 확실히 올려두고 있기도 하고.

Billy Currie 본인은 이 앨범을 통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실험을 마음껏 했다고 하긴 하는데 사실 그렇게 실험적인 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원래 Ultravox에서 보여주던 공간감 있는 신서사이저 연주를 좀 더 긴 호흡으로 들려준다. 그런 면에서는 Mike Oldfield 생각도 나는 편인데, 그보다는 확실히 좀 더 단순하고 팝적인 멜로디인지라 80년대의 그런 ‘자구책들’이 듣곤 하는 볼멘소리에서 비껴나갈 앨범은 아니다. 그래도 시타에 우쿨렐레, 기타 신서사이저, 만돌린, 프렛리스 베이스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 Steve Howe의 연주만으로도 앨범은 충분히 기억할 가치가 있다. 결국은 좀 프로그한 터치가 있는 신스팝 앨범인데, 그 프로그 터치가 묵직했던 앨범 정도로 기억하면 좋겠거니 싶다. 요새 출퇴근 때 ‘Traveller’와 ‘Transportation’을 자주 듣는다.

[I.R.S, 1988]

Boyd Rice and Friends “Music, Martinis and Misanthropy”

boydrice1990과연 Boyd Rice 본인은 이런 음악을 마티니를 마시면서 듣기는 할까 싶을 정도의 음악이지만 어쨌든 앨범은 장르의 또 하나의 클래식…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할지언정 그래도 심심찮게 회자될 만한 입지를 다졌다. 원래 World Serpent에서 소량만이 나왔던 앨범은 몇 년이 지나 Douglas P.의 강력추천 하에 NER에서 멋들어진 패키지로 재발매되었고, 꽤 많이 찍었는지 지금까지도 눈에 잘 띄는 편이다. 하긴 그러니까 내 손에까지 들어왔겠지만 말이다.

음악은 Boyd Rice 특유의 뒤틀린 위악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괴팍한 유머(를 넘어선 똘끼)도 배어들어 있다. Carpenters와 Charles Manson을 뒤섞은 ‘Invocation’이나 Boyd Rice의 뒤틀린 정치관을 짐작케 하는 ‘Shadows of the Night’이 ‘정치적인’ 스타일의 인더스트리얼을 보여준다면 ‘Disneyland Can Wait’, ‘Down in the Willow Garden’은 Douglas P.의 기타에 Rice의 나레이션, Rose McDowall의 보컬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듣기 편한 네오포크’ 스타일이다. 그렇지만 디즈니랜드에서 핵폭탄과 AK49를 얘기하는 가사를 듣노라면 이게 그리 나긋나긋한 음악이 아님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원래 제정신인 이들이 별로 없는 필드가 네오포크라지만 이 구역의 미친놈을 한 명만 꼽는다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이의 하나일 것이다.

[World Serpent, 1990]

Doris Norton “Personal Computer”

dorisnorton1984Doris Norton 얘기가 나온 김에 한 장을 더한다면 어쨌든 하드록의 기운이 남아 있던 “Parapsycho” 이후 Doris는 본격적으로 전자음악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래도 그간 Jacula에서 익숙해져 온 신서사이저 스타일을 버리는 데에는 앨범 두 장 정도의 여유가 더 필요했다. 말하자면 Doris Norton이 오늘날 (자주는 아니고 간혹)듣곤 하는 이탈리아 신서사이저 뮤직 구루의 명칭에 걸맞는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 것은 이 “Personal Computer”였다…는 게 사견이다. 사실 “Norton Computer for Peace”나 이 앨범이나 스타일에서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둘 중에 어느 앨범을 시작점으로 볼지는 결국 개인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물론 이탈리아 신서사이저 뮤직 구루!의 얘기는 결국 시간이 지나서의 얘기이고 애플의 스폰서 하에 사과 마크까지 넣어가며 야심찬 활동을 했지만 사실 앨범의 반응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Doris 입장에서는 커리어의 일대 전환이자 실험이었겠지만 이런 류의 스타일이라면 이미 Kraftwerk가 알파이자 오메가를 만들어 두었으니 굳이 “Personal Computer”를 샵에서 집어들 사람이 많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Kraftwerk보다 좀 더 비트 위주의, 별다른 서사 없이 정말 신서사이저 놀음에 가까운 – 특히나 ‘Binary Love’ – 음악이었던만큼 나름대로의 재미도 (많지는 않더라도)분명하다. ARP 2500/2600만큼 칩튠 만드는데 적합한 기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Durium, 1984]

Doris Norton “Raptus”

dorisnorton-raptus비교적 어릴 때였지만 Jacula의 앨범들(이라고해봐야 몇 장 안 되지만)을 나름 많은 이들이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 밴드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맡고 있는 여성이 중심에 있으면서 흑마술적인 음악을 한다더라 식의 얘기들이 나돌았다. 물론 뒤에 이 밴드를 주도한 양반은 Antonio Bartoccetti라는 남자분임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음악을 들었을 때 홍일점인 Fiamma Dello Spirito의 비중은 확실히 큰 편이었다. 다양한 스타일의 보컬은 물론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통한 인상적인 사운드(아무래도 파이프오르간이 중심에서 자리잡고 있던 “Tardo Pede in Magiam Versus”보다는 “Anno Demoni”가 더 그렇다)를 구축함에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괴상한 예명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사이비 교주 소리까지 나왔을 것이다.

몇 년 더 지나서 Fiamma Dello Spirito의 본명이 Doris Norton이라는 멀쩡한 이름이었으며 Antonio의 배우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본인도 Jacula를 떠나서까지 사이비교주 오해까지 듣는 이름을 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Doris는 Jacula 이후 이름을 걸고 Jacula(와 Antonious Rex)와는 다른 스타일로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했고, 본업이 키보디스트였던지라 키보드-신서사이저를 중심에 두면서 새로운 사운드(라기보단 좀 특이한 신스 팝)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내놓았고, 덕분인지 무려 애플(Steve Jobs의 거기 맞음)의 스폰서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 그렇게 대중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때로는 Mike Oldfield가 싼티나는 튠으로 ELP를 따라하는 듯한 모습도 엿보이지만 당대로서는 이런 것도 미래를 예견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은근히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도 있는지라 흥미롭다. 참고로, 기타 연주와 곡 중후반의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목소리는 물론 Antonio의 몫이다.

[Durium, 1981]

Covenant “The Blinding Dark”

theblindingdark국내에서야 Nagash(Dimmu Borgir에 계셨던 그 분)의 그 프로젝트 밴드의 이름을 The Kovenant로 바꾸게 만든 밴드 정도로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 더 오래 되고(무려 1986년부터 활동한) 유명한 쪽은 이 헬싱보리 출신 밴드라는 점에서 이들로서는 많이 억울할 것이다. 이들의 음악이 일부 메탈헤드들이 힐난했던 것처럼 단순한 댄스 플로어 뮤직도 아닌 만큼 더욱 그렇다(남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반성을). 밴드는 사이버펑크 테마에 Kraftwerk와 Nitzer Ebb 등의 어깨를 딛고 만들어낸 단단한 EBM/신스 팝을 연주했고, 그런 음악을 셋이서 무려 라이브로 연주할 줄 알았다. 일단 공연장에서 3명 모두 신서사이저 연주하면서 노래하느라 춤 출 시간도 없는 양반들이다.

이 앨범은 이 퓨처팝-EBM 거물의 2016년작인데, 솔직히 “Skyshaper”부터는 EBM계의 Metallica를 지향하는지 욕도 많이 적립하고 있는지라 “Leaving Babylon”의 반등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의 위엄에는 확실히 떨어지는 반응을 얻었다.아무래도 떨어지는 반응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I Close My Eyes’나, 예전과는 차이가 있지만 ‘Sound Mirrors’ 같은 EBM의 컨벤션을 열심히 따라가는 곡들에서는 청중을 고양시킬 줄 알았던 밴드의 모습을 재차 발견하게 된다. 종전보다 어두워진 이런 분위기가 그리 와닿진 않는지라 밴드의 미래에 의문이 없지 않지만, 늘상 그렇듯이 웰메이드 EBM 앨범으로서는 충분하다.

[Dependent,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