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eme Music : From Silence to Noise and Everything in Between

그 “Lord of Chaos”가 나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의 제목이 “Extreme Music”이라면 당연히 떠오르는 건 메탈이겠지만 이 책이 다루는 음악은 메탈만이 아니라 모든 ‘극단적인’ 부류의 음악을 다루고 있다. Michael Tau라는 이름을 잠깐 구글링해 보아도 록/메탈과는 별 상관이 없고 오히려 노이즈나 인더스트리얼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커리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얘기하는 ‘extreme’은 ‘익스트림메탈’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와는 용례가 사뭇 다르다. 꼭 강력한 음악이 아니더라도 어느 한 가지 특성을 극으로 밀어붙인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덕분에 메탈 얘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그런 류의 음악 얘기를 기대하는 건 좀 곤란하다. 다양한 음악 얘기가 나오지만 저자의 전문분야가 있는지라 ‘극단적으로 거칠고 난폭한’ 부류의 음악은 메탈보다는 노이즈, 고어노이즈(에 약간의 고어그라인드/포르노그라인드), 스피드코어 등 음악에 집중되어 있고, 이후에 등장하는 건 반대로 ‘극단적으로 조용한 음악'(John Cage를 떠올리는 게 편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긴 음악’, ‘극단적으로 짧은 음악’ 식의 주제들이다. 읽다 보면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더니 내 돈 주고 굳이 사서 듣고 싶지 않아 보이는 음악들의 ‘심연’을 소개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음악이 누군가에게 들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심연’의 음악들은 더 이상 음악이라 부를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천 년 동안 연주될 걸 전제로 만들어진 곡이라면 음악이라기보다는 어떤 개념에 가까워 보인다. 책의 마지막 챕터에는 아예 재생 불가능한 앨범 얘기까지 나오는 판이니 이런 걸 음악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수많은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인’ 음악이 어떤 ‘진보’를 표상하는가? 묻는다면 거기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진보라는 개념이 일종의 ‘발전적인’ 방향성을 전제한다면 많은 부분은 발전은커녕 퇴행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부류의 음악들을 진보적이라고 부르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노이즈 뮤지션들이 21세기에 한 인터뷰에서 제시하는 목표나 방향성이 예전 다다이즘이나 플럭서스 운동의 내용에 닮아 있다는 점이나, 아예 음악을 떠나서 그 음악을 담아내는 ‘물리적 매체’를 플로피디스크나 마이크로카세트 테이프 등만을 고집하는 사례는 이와 같은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극단적인’ 음악은 기존의 어떤 규칙이나 질서를 깨뜨리는 형태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음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류의 극단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생소한 정보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다. 음악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 정도로 아는 게 안 나오는 책도 오랜만인데 그런 면에서 레퍼런스용으로는 더없이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기엔 출판사가 좀 문제려나?

[Michael Tau 저, Feral House]

비판적 장애이론

비판적 장애이론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독자가 문외한인 것도 있겠지만 당장 ‘비판적 장애이론’으로 구글링을 해도 출판사에서 이 책을 내놓았다는 게시물 외에는 언급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출판사(겸 연구소)의 소개에 의하면 서양에서 아주 뜨거운 학문 분야로서 푸코, 들뢰즈, 퀴어 이론, 인종 이론, 페미니즘 이론 등을 전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만 치면 고작 81페이지에 불과한 이 한 권으로 방대한 분야를 건드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문외한으로서 극도로 간략화된 개론서를 본다는 느낌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럼 개론서니까 용어의 의미부터 살펴보면 장애는 ‘disability’를 의미하고, 저자에 의하면 이 이론의 과제는 장애를 문화적, 역사적, 관계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으로 고찰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인데, 이는 ‘주제 중심의 연구 영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법론에 가깝고, 이 분야의 이론가들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활동주의를 지행하며 학술장에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저 ‘장애’도 반드시 신체적 장애에 한하는 것도 아니다. 조앤 W. 스콧은 장애를 ‘특정 개인이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개인에게 귀속된 것이되, 개인에게 병리적이거나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일련의 복합적 특징들’로 서술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애라는 용어를 사용할지언정 그 실질적 의미는 권력의 반대편에서, 권력의 작용을 받아내는 억압의 대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비판적 장애 이론이 다양한 이론들을 전유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처럼 보이고, 억압이라는 현상에 대한 분석은 많은 겨우 동시에 그 현상에 대한 기존의 장애 이론들의 분석을 수반하니만큼 시끌시끌한 학제일 수밖에 없어 보이고, 그런 비판들에 대해서는 애초에 장애가 무엇이었는지를, 장애인의 삶에 있어서의 신체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즉, 사회가 일으키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지적하는 공격도 다시금 등장한다. 그렇다면 결국은 파편적인 활동들보다는 다양한 이론들이 함께하기 위한 공동전선의 구축 전략이 이 ‘뜨거운 학문 분야’의 앞으로의 과제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이 ‘학문 분야’가 전유하는 다양한 이론들의 공동전선 구축을 위한 분류에 지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개론서를 이렇게 선동적으로 읽는 게 맞는 것인가? 하긴 활동과는 상관없이 책상에서 펜대만 굴리는 사람이니 독해라도 화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원래 선무당이 이렇게 용감한 법이다.

[멜린다 C. 홀 저, 오창환 역, 에라스무스]

제3의 남자

가슴 아픈 분단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남자의 격정적 일대기라는 광고문구에서 어느 하나 당기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지만 책을 읽게 된 이유를 굳이 짚는다면 첫 번째로는 제목만 봤을 때 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스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겠다. 그런 면에서 무작위로 책을 폈을 때 등장한(그러니까 책의 개인적인 첫인상이나 마찬가지일) ‘월출’의 음주 장면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대체 이름이 왜 월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명동 골목길 지하의 과묵한 바텐더가 음악을 틀어 주는 고급진 바에서 양주를 홀짝이며 여성들의 경계심도 풀어질 것을 기대하면서도 여자와 깊은 관계까지는 만들지 않는다는 무척 007스러운 설정으로 등장하는 사나이는 바에 앉아서 캪틴큐를 마신다. 다음날을 삭제시켜 준다는 그 술 맞다.

물론 ‘월출’은 비중은 무척 높지만 주인공은 아니고, 어쨌든 이 ‘격정적 일대기’에서 담당한 역할이 007스럽긴 하며, 이 책이 관통한다는 분단의 현대사는 6-70년대로 보이는만큼 바에서 혼술하는 남자가 먹는 술이 캪틴큐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겠고, 고된 현대사 속에서의 일상을 잊자면 캪틴큐만큼 적절할 술도 별로 없을 테니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결국 거칠게 요약하면 대단할 것까지는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군상들이 얽혀 있는 이야기이니 우리의 ‘월출’이 먹는 술이 캪틴큐가 아니라 시바스 리갈은 됐어야 했다고 할 이유도 굳이 없어 보인다. 잊을만 하면 우리의 현대사를 소재로 영화를 내놓는 충무로에서 참 영화로 만들기 좋아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 작가에게 시나리오 작업까지 시켜서 ‘대한민국 최고의 CF감독’에게 맡겨 영화화한다는 기사도 나온다.

말하자면 작가의 집필의도는 어두운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묵직함을 품으면서 동시에 문제적 시대상을 이용해서 재미까지 잡았다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스러운’ 평가를 받으려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들고, 그리 복잡하게 재지 않고 선 굵게 밀어붙이는 가운데 등장하는 장면들이 영화 문외한의 눈으로 보더라도 뭘 보고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는지 알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리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캪틴큐 마시는 유사 007보다는 좀 더 ‘간지나는’ 인물이 등장해서 캪틴큐의 충격을 지워주지 않는다면 그 영화를 내가 볼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월출’이 틈만 나면 입고 나오는 츄리닝부터 벗겨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곤란해 보인다.

그런데… 이 쯤 되면 사실 책의 문제라기보다는 초장부터 캪틴큐에 꽂혀서 계속 그 얘기만 하는 독자의 문제가 더 많아 보인다. 그러니까 문제는 결국 술이다, 술.

[박성신 저, 황금가지]

파놉티콘

“감시와 처벌”을 읽었으니 이 책도 한번 간만에. 중학교 때부터 슬슬 교과서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내밀기 시작했던(것으로 기억하는) 벤담이 교도소장을 목표로 프랑스 의회에 세일즈 삼아 집필했지만 저자가 저자인지라 일반적인 세일즈용 제안서 수준을 훨씬 초월한 결과물이 나온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 그저 교도소지 이 ‘파놉티콘’은 벤담이 일생을 걸고 구상했던 사회 모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현실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우리는 벤담의 시대에서 200년은 이후의 시절을 살고 있으므로 이미 벤담이 생각했던 저 사회 모델이 조금은 비정해 보이는 류의 유토피아에 가까웠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벤담이 파놉티콘 한번 만들어 보려다 실패하고 파산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공리주의의 운명을 얄궂은 방식으로 예견하는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그렇게 공리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쓰여진 이 벤담식 ‘제안서’는 그런 만큼 파놉티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감옥의 필요성과 그 구상에 대해서 거의 낭비되는 부분이 없어 보일 정도로 집약적인 서술을 보여주지만, 그 빡빡한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면 아무래도 감시자는 피감시자를 모두 볼 수 있으나, 피감시자는 감시자의 존재조차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푸코가 ‘시선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지점은 이 부분일 것이고, 결국 근대 이후의 권력이 이와 같은 전략으로 개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한다는 게 “감시와 처벌”의 핵심일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해석은 그렇다 치고 벤담 본인의 생각은 어떠했을 것인가? 벤담도 파놉티콘의 원리가 반드시 감옥이라는 분야에 한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파놉티콘의 중심에서 피감시자들을 살펴보는 역할을 자임하며 파놉티콘의 건축을 바라는 모습에서는 벤담 본인은 파놉티콘에서의 감시자의 시선을 온전한 통제보다는 좀 더 ‘시혜적인’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일단 그 이전의 감옥보다는 좀 더 인도적이고 발전된 형태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세일즈맨의 자세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이 감시자로서의 권력을 휘둘러야 할 국가에 자신있게 그 권력을 ‘거 나 한번 믿어보고 맡겨주세요’ 식의 얘기였다면 제안서로서는 빵점짜리 문서일 것이다. 왕정이 공식적으로 전복되기 전이었으니 제3신분이 감히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권력의 담지자임을 입 밖으로 얘기하기는 조심스러웠을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모두가 바로 지금의 사람들보다는 조금씩은 더 ‘순진했을’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감옥 세일즈의 사례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감옥 얘기의 파괴력을 몰랐던 셈인데, 하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는 그 최대 다수가 저런 파괴력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좋아 보이긴 한다. 그런 면에서는 사회사상사에서 이만큼 노골적인 ‘실용서적’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고, 벤담이 영향력에 비해 깊이는 의외로 얇다더라 하는 얘기가 나오는 지점도 여기일 것이다. 감옥 만들려다 파산한 것도 아쉬운데 벤담 입장에선 지하에서 뒤집어질 노릇이렷다.

[제레미 벤담 저, 신건수 역, 책세상]

감시와 처벌

학문적 평가를 떠나서 철학이고 교양이고 잘 모르는지라 ‘푸코는 딱 하나밖에 못 읽어봤어요’라 말하는 이들이 읽어봤을 그 한 권이라면 아마도 이 책이 아닐까? 물론 이런 사실은 아무래도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오길 진심으로 기대했는지 추천 도서 100선에 이 책을 넣어놓은 서울대의 탓이 클 것이다. 하긴 나도 고등학생 때 처음 손에 잡힌 책이긴 한데, 손에 잡혔다 뿐이지 텍스트 자체는 소화불량을 일으키기 충분했으니 그 때 읽었다고 말하기는 좀 많이 그렇다. 어쨌든 푸코의 출세작이라면 출세작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접근성은 무엇 때문일까? 일단, 이 책 덕분에 다미앙이라는 실패한 암살자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실패한 암살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례가 얼마나 되나?) 이 책은 서점의 철학 코너에 꽂혀 있는 여타 책들에 비해 상당히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내용을 떠나서 책의 시작부터 나오는 이 사디즘적인 장면은 근대 이전 시대의 죄수에 대한 제재가 일종의 스펙터클로 작용했음을 설명하는 사례가 되는데, 뒤의 설명을 보기도 전에 사례에 대한 소개만을 보고도 눈앞에 그려질 정도이니 이 스펙터클한 장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런 효과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책들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자극적인 맛을 생각하고 이런 책들을 굳이 집어들 사람들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니 저런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이고, 결국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이 모두 그랬듯이 “감시와 처벌” 이전의 저작들이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주제에 접근하였다면, “감시와 처벌”에 와서는 계보학적 방법론으로 주제에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존의 고고학적 방법론으로는 하나의 사유 방식이 새로운 사유 방식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 외에 그러한 전환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룰 수 없었고,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통해 사유 방식의 전환이 이성에 의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우연한 역사적 변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옥과 감금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누가 봐도 아날 학파스러운 흔적 많은 역사책 아닌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자극적인 역사적 사실에서 이만큼 묵직한 썰을 풀어낸 사례는 그리 많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암만 생각해도 나로서는 이게 고등학생 읽으라고 써 놓은 썰은 아닌 것 같다(하긴 고등학생 추천도서가 됐다고 그게 푸코 탓은 아니긴 하다). 뭐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수없이 많으니 그런 분들에겐 괜찮은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미셸 푸코 저, 오생근 역, 나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