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 미래의 음악

보들레르와 베를리오즈, 테오필 고티에의 바그너론을 엮은 책이지만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정교한 평가라기보다는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민감한 감수성을 가졌을 동종업계 종사자 및 펜끝 날카로운 데카당스 딜레탕트들의 충격을 그대로 담아낸 글들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특히나 로엔그린 2막이나 트리스탄과의 이졸데 관현악 도입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베를리오즈에 비해서는 아예 바그너에 대한 해석과 자신의 작품들의 문구들을 혼연일체시키는 게 목표인지 열광을 아끼지 않는 보들레르의 글에서 그런 충격들이 제대로 드러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실성이라는 틀에 꼼짝없이 갇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바그너가 제시한 혁명적인 입장”을 대리설명하는 과격파 딜레탕트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과격파 딜레탕트에 의하면 바그너의 엄청난 능력과 비판적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천재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굳이 바그너의 이성과 천재를 분리하려는 이들의 ‘시기심’의 발로이고, 바그너의 음악은 시가 없지만 여전히 시적이며, 정말 잘 지은 시가 갖는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긴 바그너의 시도가 신화와 전설에 토대를 둔 이상적인 드라마를 구현하려는 것이었고, 이는 오페라라는 장르가 가졌던 결함에 오래전부터 진력을 내던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보들레르에게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을 것이다.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스스로도 음악 작품의 분석은 어려운 수준임을 인정하면서도 파리 비평계의 공격을 받아내며 바그너의 변호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들레르의 입장이 오늘날 바그너의 일반적인 해석과도 상당히 맞닿아 있으니, 바그너의 음악은 이런 문외한까지도 확실히 설득시킬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입증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음악으로 밥을 먹지는 않지만 분명한 관심을 보였던 어느 딜레탕트가 역사에 남을 수준의 글발을 휘날리면서 지면을 통해 남긴 인상비평의 기록인 셈인데, 저자에 의하면 철없고 유치한 말들을 한없이 늘어놓는 것이 저널리즘이라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음악을 두고 서로가 이름을 걸고 인상이든 이론이든 나름의 근거들을 기고했던 기록들은 비평의 위기가 이미 자명한 이야기가 된 시절에 참 신기하게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전투력 배틀의 19세기 버전이라면 망자들에 대한 모독이겠지만, 저자가 저자인지라 전투력도 출중하니만큼 탄호이저 서곡 한 번 듣고 읽어내려가면 스트레스 해소에도 나름 유용하다.

[샤를 보들레르 저, 이충훈 역, PHONO]

운율? 그리고 의미? / 헝클어진 이야기

루이스 캐럴에 대하여 찾아보면 나오는 이야기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관련 내용을 제외하면 대충 ‘루이스 캐럴은 언어유희의 대명사’ 라는 취지의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flea’와’ ‘flee’의 발음이 똑같음을 이용한 말장난 같은 사례들의 설명이 달린 각주를 읽으면서 얻는 감흥 같은 걸 말할 일은 없겠다. 사실 그런 각주가 아니더라도 ‘판타즈마고리아’나 ‘사진사 히아와타’ 같은 작품에서 루이스 캐럴이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레 드러나니 나처럼 영어가 짧은 독자라도 언어유희라는 부분에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까진 없겠다. 출판사의 “그림과 대화가 있는 책”에 실린 작품만을 대상으로 선정하였다는 원칙도 사실 그런 고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로지 텍스트만 가지고 이 문장의 원문은 어떤 단어를 썼을 것이고 그게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어떤 손장난을 부렸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그림과 대화가 있는들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그럼 나 같은 영문학 문외한은 이런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문외한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손쉬운 정답은 ‘독법에 정답이 어디 있나? 그냥 각자 알아서’일 것이고, 이 성의없는 정답은 루이스 캐럴의 경우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어유희의 대명사’라면 독자로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언어유희를 즐겨 주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결과일 것이고, 캐럴은 ‘나는 사람들이 단순한 난센스 외에 다른 의미들을 찾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낸 설득력 있는 의미들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이라 말했다고 하니, 이 선집의 글들을 읽고 혼자서 뻘생각을 키워 가는 모습이야말로 독법의 왕도일른지도.

그러고 보면 이 책이 결국은 문학 카테고리의 ‘선집’으로 엮어져 나온 사실도 캐럴의 의도에는 더없이 부합하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헝클어진 이야기”로 실린, 요새 같으면 “요즘 수학문제 해설.jpg” 식으로 짤이 생산되어 돌아다닐 법한 루이스 캐럴식 수학 퀴즈 강평은 아마 정답 응모자라면 조금은 상처받을지도 모를 수준의 지독한 유머가 섞여 있긴 하지만 19세기 영국인이라면 이런 글들을 문학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가 저자인지라 나온 결과이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굳이 수학 퀴즈 강평에서까지 어떻게든 난센스와 추가적인 의미(‘이 수학 퀴즈 강평의 영문학적 가치’?) 등을 찾아내서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이는 이 책으로 엮어내 서점 매대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 저, 유나영 역, 워크룸프레스]

대머리 예찬

Rush는 일찌기 본격적으로 프로그 물을 먹기 직전 “Caress of Steel”에서 ‘I Think I’m Going Bald’를 불렀다. 지금이야 할아버지가 돼버렸지만 그 시절에는 20대 초반의 혈기가 남아 있었고, 프로그보다는 하드록 밴드에 좀 더 가까워 보였던 밴드에게도 탈모는 불안의 대상이었다. 물론 저 노래는 대머리를 한탄한다기보다는 지나온 젊음과 시간을 아쉬워하는 노래였고(그럼에도 앨범에서 가장 처지는 곡이기는 했다),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통해 Rush가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끝맺는 그 때까지 멤버 전원 탈모인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분들이 돈 없어서 머리 못 심을 분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별로 탈모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보이는 이들에게도 탈모는 경계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럼 대머리에 대한 경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 정보화 시대도 쉬이 답을 주지 못하는 질문이지만 이 책은 그런 경계가 꽤 옛날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키레네의 시네시오스가 겨우 후대에게 그런 정보를 주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건 아니었겠지만 이 책이 알려주는 효용성 있는 정보는 사실 거기까지다. 황금 입의 디온과 시네시오스 간의 현란한 말싸움이 그대로 담겨 있긴 하지만, 아마도 이 책에 나온 시네시오스의 논변을 가져와 이제 와서 스스로의 탈모를 변호했다가는 모두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상황에 이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실 시네시오스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논변을 시작함에 앞서 디온의 머리카락 예찬에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을 고백하면서 책을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대머리를 예찬하고는 있지만, 이 책을 죽 훑어보는 중에 독자는 이걸 다 읽는다고 해서 대머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그리고 사실은 아마도 읽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나 간통을 가장 질이 나쁘고 해로운 행실로 설명하면서 이는 ‘머리털이 달린 부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지점에서 아마도 탈모인일 가능성이 높을 독자는 이 책이 그 때부터는 독자를 공격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해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인 불륜을 저지르려면 머릿결도 좋고 잘생겨야 하는데, 너는 대머리니까 그만큼 선량한 거라고 얘기하는데 수긍할 이라면 아마도 대머리보다는 이미 바닥을 친 자존감을 위해 다른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시절 어느 대머리 소피스트의 패배의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후대에 황금 입의 디온의 머리카락 예찬을 기억하는 사람들보다는 이 대머리 예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니, 그 부분에서는 시네시오스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겠지만 말이다.

[키레네의 시네시오스 지음, 정재곤 역, 21세기북스]

달까지 가자

문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렇긴 하다만)에 있어서 문외한에 가깝고 특히나 국내 문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런 어느 직장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장류진의 소설은 쉽게 읽혔고, 아마도 평단은 내면이나 자아 같은 용어로 표현할 법한 무거움(그러니까 그 ‘진짜배기 순수문학스러움’)을 찾을 만한 글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웹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쏘시개감 글들이 넷상을 횡행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글을 쓰고 대중에 보여줄 수 있게 된 시대에 문단이 순수문학의 기치 아래 포용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근접한 사례인 셈이다. 알고 보면 내가 이런 책까지 찾아 읽을 정도로 힙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끼어들지만 양심상 그러지는 못하겠다. 각설하고.

“달까지 가자”도 마찬가지다. 아니나다를까 웹상에서 연재했던 소설을 책으로 출간한 듯하고, “일의 기쁨과 슬픔”이 그랬듯이 직장인이라면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을 대목들을 군데군데 끼워넣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일의 기쁨과 슬픔”이 그럴법하면서도 직장괴담에 가까웠던 이야기를 소재로 써먹은 반면(물론 소재로 쓰는 것도 능력이다. 누군가는 포인트로 급여를 지급한다는 얘기에서 소설쓰기보다는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먼저 따져볼 것이다) 이번에는 시의성만큼은 더없을 알트코인에 미래를 거는 직장인의 모습이 소재였다는 것이다. 도지코인으로 달렸다가 아마도 손절시기를 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뵈는 옆자리의 누군가와 우리의 주인공(들)의 모습은 결과만 빼면 별로 차이도 없어 보인다.

중요한 건 그래도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 주인공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쨌든 꽤 재미를 보았고, 다른 선택을 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도지코인으로 달렸던 우리의 옆자리 누군가는 아마도 무척 부러워할 결과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 젊은 직장인들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마냥 달달하게 마음을 잠깐 달래줄 우화같은 소설일 것이다. ‘알트코인으로 돈 딴 직장인 얘기’라고 하면 그냥 끝나버릴 수도 있을 얘기를 작가의 경험(과 적절한 시의성)과 버무려 달달하게 만들어낸 우화다. 코인 안 하는 직장인이 읽기에도 많이 달다. 적어도 Elon Musk가 가진 코인들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쭉 달달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직장인용 우화를 역시나 책 막바지의 해설은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머러스하게 포착해 낸 한국사회의 세태’라고 풀어내고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좀 웃으며 살려면 이런 우화라도 필요한 현실이 아닐까 싶다. 현실은 글보다 자주 냉혹하다.

[장류진 저, 창비]

잔혹(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아웃사이더”의 약관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은 총기 넘치는 독학자가 오컬트는 물론이고 인간의 폭력성 등 수많은 주제들에 대한 박물지스러운 저작들을 내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뭘까는 지금껏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모으느라 고생했겠다 싶은 많은 사례들과 이론들을 꽤나 성의껏 정리요약하면서 인간의 폭력성을 어느샌가 두뇌 자체에 내재한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원시키는 모습은 범죄형 인간에 대한 체자레 롬브로조의 견해가 이랬으려나 하는 짐작도 불러온다. 읽고 나서 책의 내용보다는 이 책을 쓴 사람에 대해서 더 궁금해지는 흔치 않은 경험도 맛볼 수 있다.

그러다가 든 생각은 이 범죄의 세계사와는 좀 동떨어진 얘기, 즉 ‘범죄피해자의 세계사’ 같은 책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살인마들은 손에 한두 명만의 피를 묻히지는 않았을테니 그런 책을 쓰는 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더라도 저자에게 훨씬 많은 수고를 요구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메리 패터슨이라는 조그마하고 매력적인 시체”, “백치로 알려진 대프트 재미” 이상의 설명은 없는 모습은 책의 테마인 인간의 잔혹성을 저자 스스로도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일까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큼 철저하게 주제에 충실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이런 미시사들을 계속해서 캐내기 시작하는 시대, 범죄피해자의 세계사 같은 책이 많으면 곤란하겠지만 충분히 따뜻한 시선으로 한두 권 정도는 나오는 게 세상을 위해서는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콜린 윌슨도 쓰고 있지만 역사 속의 수많은 범죄피해자들은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범죄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다. 아마 저 메리 패터슨이 피해자가 된 것도 어쩌면 그냥 체구가 작아서, 대프트 재미가 피해자가 된 것도 그냥 생각 없이 바깥 구경을 나왔다가였을 수도 있다. 그 망자들의 유족이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속화시키지 않으면서 정확히 다뤄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해답일 수 있겠다.

[콜린 윌슨 저, 황종호 역, 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