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예찬

Rush는 일찌기 본격적으로 프로그 물을 먹기 직전 “Caress of Steel”에서 ‘I Think I’m Going Bald’를 불렀다. 지금이야 할아버지가 돼버렸지만 그 시절에는 20대 초반의 혈기가 남아 있었고, 프로그보다는 하드록 밴드에 좀 더 가까워 보였던 밴드에게도 탈모는 불안의 대상이었다. 물론 저 노래는 대머리를 한탄한다기보다는 지나온 젊음과 시간을 아쉬워하는 노래였고(그럼에도 앨범에서 가장 처지는 곡이기는 했다),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통해 Rush가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끝맺는 그 때까지 멤버 전원 탈모인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분들이 돈 없어서 머리 못 심을 분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별로 탈모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보이는 이들에게도 탈모는 경계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럼 대머리에 대한 경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 정보화 시대도 쉬이 답을 주지 못하는 질문이지만 이 책은 그런 경계가 꽤 옛날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키레네의 시네시오스가 겨우 후대에게 그런 정보를 주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건 아니었겠지만 이 책이 알려주는 효용성 있는 정보는 사실 거기까지다. 황금 입의 디온과 시네시오스 간의 현란한 말싸움이 그대로 담겨 있긴 하지만, 아마도 이 책에 나온 시네시오스의 논변을 가져와 이제 와서 스스로의 탈모를 변호했다가는 모두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상황에 이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실 시네시오스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논변을 시작함에 앞서 디온의 머리카락 예찬에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을 고백하면서 책을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대머리를 예찬하고는 있지만, 이 책을 죽 훑어보는 중에 독자는 이걸 다 읽는다고 해서 대머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그리고 사실은 아마도 읽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나 간통을 가장 질이 나쁘고 해로운 행실로 설명하면서 이는 ‘머리털이 달린 부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지점에서 아마도 탈모인일 가능성이 높을 독자는 이 책이 그 때부터는 독자를 공격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해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인 불륜을 저지르려면 머릿결도 좋고 잘생겨야 하는데, 너는 대머리니까 그만큼 선량한 거라고 얘기하는데 수긍할 이라면 아마도 대머리보다는 이미 바닥을 친 자존감을 위해 다른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시절 어느 대머리 소피스트의 패배의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후대에 황금 입의 디온의 머리카락 예찬을 기억하는 사람들보다는 이 대머리 예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니, 그 부분에서는 시네시오스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겠지만 말이다.

[키레네의 시네시오스 지음, 정재곤 역, 21세기북스]

Cyberpunk

컴퓨터(또는 교과서적 표현으로 ‘정보화 사회’)가 지배하는 환경 – cyber – 을 배경으로, 현세적이고 반문화적인 내용 – punk – 을 담은 이야기를 가리키는 용어. 1980년에 Bruce Bethke의 단편소설 “Cyberpunk” 에서 처음 사용. 그러나 이 용어를 William Gibson과 Neal Stephenson 등이 쓰는 종류의 과학소설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과학소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종의 문학 무브먼트와 연관지은 첫 번째 사람은 Asimov’s Science Fiction Magazine의 편집자 Gardner Dozois이다.

사이버펑크 문학은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이 놀랍도록 발달하였으나 여전히 전통적인 국가 및 사회적 권력관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개, 이런 소설에서는 일반인들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때때로) 조작하는 권력체로 정부, 거대기업, 또는 종교단체 등을 꼽는다. 개인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앞선 정보기술력을 바탕으로 권력체는 개인을 보다 확고하게 통제하기를 원한다. 정보기술은 사회체제는 물론, 뇌 삽입물, 의수, 의족, 복제 또는 유전적으로 처리된 장기들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에도 침투한다. 즉 인간은 최첨단 기계/정보통신문명의 일부로 환치되도록 끊임없이 압박을 받는 것.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언제나 양날이 선 칼이고, 기계적으로 권력체계에 순응하도록 강요받는 개인들은 유기적인 변화 및 적응을 통해 통제 영역에서 이탈해 왔다. 사이버펑크적인 미래 사회에서도 이러한 통제와 아노말리, 그리고 뒤 따르는 새로운 (그러나 결코 중앙집권적인 질서가 아닌) 질서는 항상 일어난다. 특히 국가 및 사회 권력체가 세부적으로 통제하기 힘든 대상 및 영역은 “가장자리” 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이버펑크의 배경과 분위기가 자주 어둡고 비관적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부랑자, 범죄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젊은 세대를 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싶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과거의 소외계층과는 달리 지극히 테크놀로지 친화적이다. 단지 테크놀로지를 수단으로 형성된 거대 권력 구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처럼 보이고, (좋게 말하면) 소박하며, (나쁘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유치하다(Bruce Sterling의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펑크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숨막힐 만큼 쏟아져 내려오는 기술과 이를 처리하는 상징적인 언어감각이 독자에게 놀랍게도 낭만적인 반영웅의 이미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기술로 뭉친 사회는 마찬가지로 기술에 의해서 완전히 변모한 인간형을 창조하게 되고,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형과는 크게 다른 이들의 행동은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동기를 파악하고 이해하며 증오하고 사랑하게 하는 전통적인 이야기 수법의 효과와는 다른 기이한 효과를 던져준다.

그러므로 사이버펑크는 외견상 철저하게 무정치적인 것 같지만(또는 아주 단순한 무정부주의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정치적인 서브장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과학소설이 다루어 온 체제를 고스란히 가져다 놓으면서, 로맨틱한 반영웅까지 등장시키면서도, 우리가 익숙해 있는 정치적 메시지와는 다른, 끊임없이 개인화된 이상과 체제라고 부르기도 힘든 체제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달까지 가자

문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렇긴 하다만)에 있어서 문외한에 가깝고 특히나 국내 문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런 어느 직장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장류진의 소설은 쉽게 읽혔고, 아마도 평단은 내면이나 자아 같은 용어로 표현할 법한 무거움(그러니까 그 ‘진짜배기 순수문학스러움’)을 찾을 만한 글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웹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쏘시개감 글들이 넷상을 횡행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글을 쓰고 대중에 보여줄 수 있게 된 시대에 문단이 순수문학의 기치 아래 포용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근접한 사례인 셈이다. 알고 보면 내가 이런 책까지 찾아 읽을 정도로 힙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끼어들지만 양심상 그러지는 못하겠다. 각설하고.

“달까지 가자”도 마찬가지다. 아니나다를까 웹상에서 연재했던 소설을 책으로 출간한 듯하고, “일의 기쁨과 슬픔”이 그랬듯이 직장인이라면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을 대목들을 군데군데 끼워넣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일의 기쁨과 슬픔”이 그럴법하면서도 직장괴담에 가까웠던 이야기를 소재로 써먹은 반면(물론 소재로 쓰는 것도 능력이다. 누군가는 포인트로 급여를 지급한다는 얘기에서 소설쓰기보다는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먼저 따져볼 것이다) 이번에는 시의성만큼은 더없을 알트코인에 미래를 거는 직장인의 모습이 소재였다는 것이다. 도지코인으로 달렸다가 아마도 손절시기를 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뵈는 옆자리의 누군가와 우리의 주인공(들)의 모습은 결과만 빼면 별로 차이도 없어 보인다.

중요한 건 그래도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 주인공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쨌든 꽤 재미를 보았고, 다른 선택을 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도지코인으로 달렸던 우리의 옆자리 누군가는 아마도 무척 부러워할 결과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 젊은 직장인들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마냥 달달하게 마음을 잠깐 달래줄 우화같은 소설일 것이다. ‘알트코인으로 돈 딴 직장인 얘기’라고 하면 그냥 끝나버릴 수도 있을 얘기를 작가의 경험(과 적절한 시의성)과 버무려 달달하게 만들어낸 우화다. 코인 안 하는 직장인이 읽기에도 많이 달다. 적어도 Elon Musk가 가진 코인들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쭉 달달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직장인용 우화를 역시나 책 막바지의 해설은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머러스하게 포착해 낸 한국사회의 세태’라고 풀어내고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좀 웃으며 살려면 이런 우화라도 필요한 현실이 아닐까 싶다. 현실은 글보다 자주 냉혹하다.

[장류진 저, 창비]

잔혹(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아웃사이더”의 약관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은 총기 넘치는 독학자가 오컬트는 물론이고 인간의 폭력성 등 수많은 주제들에 대한 박물지스러운 저작들을 내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뭘까는 지금껏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모으느라 고생했겠다 싶은 많은 사례들과 이론들을 꽤나 성의껏 정리요약하면서 인간의 폭력성을 어느샌가 두뇌 자체에 내재한 생물학적 요인으로 환원시키는 모습은 범죄형 인간에 대한 체자레 롬브로조의 견해가 이랬으려나 하는 짐작도 불러온다. 읽고 나서 책의 내용보다는 이 책을 쓴 사람에 대해서 더 궁금해지는 흔치 않은 경험도 맛볼 수 있다.

그러다가 든 생각은 이 범죄의 세계사와는 좀 동떨어진 얘기, 즉 ‘범죄피해자의 세계사’ 같은 책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살인마들은 손에 한두 명만의 피를 묻히지는 않았을테니 그런 책을 쓰는 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더라도 저자에게 훨씬 많은 수고를 요구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메리 패터슨이라는 조그마하고 매력적인 시체”, “백치로 알려진 대프트 재미” 이상의 설명은 없는 모습은 책의 테마인 인간의 잔혹성을 저자 스스로도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일까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큼 철저하게 주제에 충실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이런 미시사들을 계속해서 캐내기 시작하는 시대, 범죄피해자의 세계사 같은 책이 많으면 곤란하겠지만 충분히 따뜻한 시선으로 한두 권 정도는 나오는 게 세상을 위해서는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콜린 윌슨도 쓰고 있지만 역사 속의 수많은 범죄피해자들은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범죄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다. 아마 저 메리 패터슨이 피해자가 된 것도 어쩌면 그냥 체구가 작아서, 대프트 재미가 피해자가 된 것도 그냥 생각 없이 바깥 구경을 나왔다가였을 수도 있다. 그 망자들의 유족이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속화시키지 않으면서 정확히 다뤄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해답일 수 있겠다.

[콜린 윌슨 저, 황종호 역, 하서]

Storm of Steel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세상이 거의 망할 뻔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이들이 떠나가고 교과서를 통해서만 그 사실을 간접체험한 이들이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해서인지 이후로도 세계 어디에선가는 크건 작건 전쟁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고 보면 유려한 필치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많은 반전 문학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작품들이 실제로 전쟁을 막는 데 보여준 기여는 그 필치에 대한 세상의 찬사만큼 대단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말하자면 세상을 움직이는 데 그런 예술 작품은 아마도 전위로서 역할을 수행하긴 어렵지 않을까, 기껏해야 세상을 움직이는 현상의 가운데에 놓이게 될 어느 주요 인물에게 행동의 당위, 아니면 구실을 던져주는 정도의 역할만이 허락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런 반전 문학가들과는 달리 몸소 참호전을 경험하고 전율의 미학을 설파한 Ernst Junger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달리한다. “Storm of Steel”의 두 번째 문단은 그 시절, 참호전을 받아들이던 어느 병사(라기보단 작가 본인)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We had come from lecture halls, school desks and factory workbenches, and over the brief weeks of training, we had bonded together into one large and enthusiastic group. Grown up in an age of security, we shared a yearning for danger, for the experiene of the extraordinary. We were enraptured by war. We had set out in a rain of flowers, in a drunken atmosphere of blood and roses. Surely the war had to supply us with what we wanted; the great, the overwhelming, the hallowed experience. We thought of it as manly, as action, a merry duelling party on flowered, blood-bedewed meadows. ‘No finer death in all the world than…’ Anything to participate, not to have to stay at home!

물론 우리는 역사 공부를 통해 이 모험에 찬 가슴을 안고 전쟁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기대와 참호전의 실상은 많이 달랐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험에 찬 가슴’을 잃지 않는다. 저격수의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까지도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와 형식’을 운운하며 거의 즐겁기까지 했음을 고백하는 모습은 작가의 자신있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독자에게 지독한 아이러니를 던져준다. 말하자면 군복무 시절 갖은 악폐습을 겪었던 경험을 덤덤하게 얘기하면서 그래도 그 시절 낭만이 있었어! 한들 그 이야기를 미적분 수업 듣는 수포자의 마음으로 잠자코 듣고 있던 어느 미필자가 군복무를 부푼 가슴으로 기다리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선 이 책은 反戰 아닌 反轉 문학이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작가 본인조차 전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책이 읽히게 되는 정도의 엄청난 反轉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선을 넘어선 예술 작품은 결국에는 창작자의 손을 떠나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종국에는 창작자의 의도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펜으로 남을 계도하려거든 이런저런 문학적 기교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다듬는 것이 결국 관건일 것이다. 형편없는 필력의 소유자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Ernst Junger 저, Penguin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