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er Benjamin의 글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돈주고 산 사람이라면 Ermst Junger의 글에 초점을 맞추었겠거니 싶다. “노동자(Der Arbeit)”은 Junger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이지만 나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글의 하나인지라 영문판도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대리석 절벽 위에서”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마냥 나치와 연관짓는 것도 좀 아닌 인물이지만 어쨌든 Junger가 보여주는 비문학 저작들의 선동적인 맛은 참호전을 경험했던 그 시절 참전 용사들에게는 지금 우리와는 확실히 달리 보였을 것이다. 사실 독일 작가 답게 문장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고통에 관하여(Uber den Schmerz)”는 좀 더 명쾌하게 읽히는 편이다.
아무래도 “노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Nietzsche의 “권력에의 의지”의 냄새다. Junger에게 노동자는 개인주의화된 부르주아나 부패한 형태의 대중과는 구별되는 신인류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이 글에서 노동자 개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노동자라기보다는 노동자라 불리는 인간들의 ‘유형’에 가까운데, ‘영웅적 주체’와 같이 집단을 다루고 있다보니 오늘날 Junger가 받는 나치의 구루! 식의 혐의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또 Junger가 그러면서도 어째서 나치 당을 마치 시정잡배들 보듯 바라보았는지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덕분에 나치즘의 마그나 카르타라는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무색하게 이 저작이 정말 나치즘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해도 되는 건지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 이 극단적인 논리에는 혁명가의 추동력보다는 그 시절에 걸맞는 염세주의(어찌 보면 Oswald Spengler 수준)가 짙게 깔려 있어 보인다. Junger 특유의 폭력적이고 ‘화끈한’ 미학의 연장선일지는 모르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문외한의 시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극우파의 악용을 우려한 때문인지 출판사가 같이 끼워넣은 Benjamin의 글은 이러한 Junger의 시각을 신비주의적 망상, 즉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과 같이 지적한다. 하긴 Junger의 글 전체를 뒤덮는 ‘골치아픈 관념론’의 냄새는 따지고 보면 무학의 사기꾼들이 설파하는 개똥철학과도 뭔가 연결되는 점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 ‘관념론’ 덕분에 이걸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것도 있지만 말이다. 노동자론을 읽었는데 내가 읽은 게 노동자론이 맞나? 묘한 의문이 남는다.
[에른스트 윙거/발터 벤야민 저, 최동민 역, 글항아리]
그러다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19세기, Darwin은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에서 ‘horde’ 를 원시인들의 집단과, 그보다 좀 더 원숭이에 가까웠을 인류의 선조를 가리키면서 사용한다. 문명의 발흥지가 어디였건, 모든 문명이 유래하였을 그들의 원시적 집단은 자연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 아마 책의 요지일 것이다(책을 본 지가 좀 오래 됐다). 물론 이에, 또한 잘 알려진 성선택의 결과가 더해지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진화론과 자연 선택의 진위는 많이 논쟁되는 문제인 것 같다(특히 종교계와 관련하여). 어쨌든, 이러한 이야기가 타당성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인간성의 탄생에 대한 하나의 신화로서 작용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신화 속의 ‘horde’ 가 보여주는 폭력성은 명확하다.
Deleuze/Guattari의 “천 개의 고원” 에도 이러한 모습이 등장한다. 아무래도 토인비와 Frued의 저작에 힘입었을 이 두 철학자는 ‘노마드적인’ 삶의 사회철학적 의미를 도시국가에서의 삶과 비교한다. 계급적이며 동질적이고, 전체주의적인(“수목형의”) 집단으로 도시국가가 특징지어진다면, 노마드는 더 자유로운 구성의, 이질적인(“리좀적인”) 집단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horde’ 는 다시 서구 문화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을 폭력적인 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지카 프라티카’야 이미 충분히 잘 알려진 책일 것이다. 원제는 “Practica : The Social Practice of Western from Gregorian Chant to Postmodernism” 인데, 제목부터 말해 주고 있지만 대중 음악에 대한 책이 아니다(물론 후반부에 조금 나오기는 한다). 굳이 애기한다면 ‘음반 산업’ 에 대한 책인데, 보통은 ‘서구 음악의 사회적 관습’ 을 다루고 있다는 정도로 소개되는 듯하다. 일단 저자 본인이 훌륭한 관찰자로서 다양한 사실들을 꽤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그 사실들에서 맥을 짚어내는 데 능숙해 보이는만큼 기본적으로 내용은 아주 풍요롭고, 여기에 바흐친이나 롤랑 바르트, 쇤베르크 등 다양한 인물들을 엮어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원래 1998년에 나온 이 책에 대해서는 사실 그리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저자인 Michael Moynihan부터 이 책 외에도 Blood Axis에서의 활동 등으로 충분히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고… 헐리웃에서 영화까지 나온 마당이니 더욱 그렇다. 그런 사정들 말고도 이 책은 노르웨이 서브컬쳐 씬 하에서의 이런 저런 사건들에 대해서, 아마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책 중 하나일 것이다. 잘 알려진 Mayhem의 Dead나 Euronymous의 사망 및 Varg와의 관계, 일련의 교회의 방화, Faust의 살인 사건 등과 같은. 물론 여기에는 이와 관련된 인물들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시절 노르웨이 블랙메탈 씬에 대한 ‘crime journalism’ 정도가 될 것이다. 밴드 얘기들이 나온다고 해서 본격 음악 책이라긴 좀 곤란한 셈이다.
프로그레시브 메탈 라이센스반들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면 으레 Rush와 Metallica가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Watchtower, Queensryche, Fates Warning 정도의 밴드들을 잠깐 훑고 지나갔다 결국은 이 밴드는 Dream Theater의 따라쟁이더라로 끝맺는 해설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Dream Theater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 밴드들을 Dream Theater 따라쟁이라고 표현한 게 잘못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해설지가 그 얘기를 찬찬히 해 주고 있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 드는 생각의 하나는 해설지 참 쓰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럼 좀 더 근본적인 질문, 프로그레시브 락과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입니까, 아니면 프로그레시브 메탈은 대체 어떤 음악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건 바로 Dream Theater 비슷한 음악입니다’가 아니라 그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해 놓았던 글은 내 기억엔 딱히 본 적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