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Légions Noires, 횡설수설

항상 신경쓰지 않으면 주변의 공간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인지라 정기적인 정돈은 필수적이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띄는 사실은 Les Légions Noires 출신 밴드들의 이름들이 이게 실제로 있는 말인가 의심스럽게 괴팍하다는 것이다. Dzlvarv, Moëvöt, Vzaéurvbtre, Vrepyambhre 등. 외국어에 영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서도 이게 불어 이름이 아니라는 정도는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Vlad Tepes 같은 밴드들이 참 점잖게 이름을 붙였던 셈이다. 물론 이름들이 서로 제각각이라 그렇지 다들 음악은 대동소이하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곡명이라고 저 이름들보다 상황이 나은 건 아니다. 괴팍한 한 친구는 저걸 언술, 내지는 언어의 카니발화라고 하더라. 물론 그 친구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희극의 가장 인기 있는 형태 중 하나는 소위 ”횡설수설(coq-à-l’âne)’ 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부조리한 언어의 조합의 장르이며, 모든 규범, 심지어는 기본적인 논리마저 무시하는 완전히 해방된 말의 형태이다. 이와 같은 언어적 부조리는 중세기 동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것이었다…. (중략) …. 모든 기존의 언어들, 대상들, 생각들의 재편을 가져왔던 세계의 계급제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는 시기에, ‘횡설수설’ 은 본질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 그것은 모든 논리적 연결에서의 일시적인 해방, 자유로운 재창조의 허용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의 카니발화와 같다…” (바흐친, “Rabelais and his world” 중)

‘횡설수설’ 이라니 바로 떠오르는 것은 바흐친의 저 글에서 보여지듯이 라블레는 물론이고, 몰리에르, 루이스 캐럴, 굳이 좀 근대에 가까운 예를 찾는다면 많은 다다이스트들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물론 아니면 말고). 어쨌든 이들이 대충 저 언어의 카니발화의 선구들이었다고 치자. 물론 이들과 Les Légions Noires와는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일단 느껴지는 것은 후대의 저 우울한 친구들보다는 선대의 작가들이 훨씬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들은 라블레 등보다는, 후대의 다다이즘적인 그로테스크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역시 내 생각이지만, 이 후대의 우울한 밴드들의 이름을 (굳이)소리내어 읽어 보면, 저 괴이한 알파벳들의 조합은 의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편이다. 아마 그 이유는 어째서 ‘sacrifice’ 같은 단어가 메탈 밴드의 이름으로 적합한지와 비슷한 얘기일 것이다. ‘f’ 같은 글자가 다른 것보다 좀 더 강렬하게 들리는 발음을 갖고 있고, 그런 글자들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낸 이름이랄까? 그리고 그 조합의 결과는 현대적이기보다는 원시적인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말하자면 소리에 의미를 함몰시킨 경우인 셈인데, 이 밴드들이 Magma 같은 경우처럼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서 유희를 즐기는지는 모르지만(물론 ‘Vampyre’ 같은 단어를 보자면 Magma에 비해서는 소심해 보이는 편이다) 어쨌든 다다이스트로서는 꽤 훌륭해 보인다.

영화로 보는 사탄의 교의

어린 시절 드래곤볼 만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여러 장면들 중 하나는 베지터가 손오공의 뒤를 이어 초사이어인이 되는 장면이었다. 초사이어인이 된 베지터를 보고 우리의 주인공 패거리들이 모두 놀란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초사이어인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베지터는 거기다 대고 지금 같으면 중2병에 찌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멘트를 던져준다. ‘순수하긴 순수했지, 다만 순수한 ‘악’ 이었을 뿐…. ‘ 물론 그 ‘순수한 악인’은 곧 인조인간들과 셀에게 원없이 얻어맞고(물리치료라면 물리치료일지도) 많은 인고의 시간을 지났는지 마인 부우와 싸울 때쯤이 되서는 무려 가정을 이루고 자기희생까지 할 줄 아는 ‘사실은 내면은 따뜻한 사나이’의 표상이 되었다. 순수한 악이라는 건 그렇게 별 거 아니었던 셈이다.

2021년에 굳이 영화를 통해 사탄의 교의를 들춰내는 시대착오적 슬로건과 표지 디자인을 앞세운 이 책에서도 꽤 비슷한 결론에 이르를 수 있다.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교의를 파헤친다는 이 책은 지나친 친절함을 발휘하여 저자가 선별한 영화의 줄거리를 스포일러 잔뜩 담아 스틸 컷들과 함께 펼쳐 놓고, 그렇게 펼쳐 놓은 이야기와 장면들에 어떻게 사탄의 교의가 숨어 있는지를 나름대로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시작하는데, 그건 ‘사탄의 교의’가 어떻게 숨었는지를 설명하지만 정작 그 ‘사탄의 교의’가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12보다 1이 많은 숫자 13은 사탄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숫자 12보다 1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게 설명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더 심각한 건 뭔지 모를 ‘사탄의 교의’가 영화 속에 숨어 있다는 방식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 사법제도의 선기능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사탄의 상징체계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밝혀 두고 숨어 있는 ‘사탄의 상징’들을 들춰주는데, 12인의 배심원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가리키는 것이고,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은 18세인데, ‘666’의 숫자를 더하면 18이니 이 소년은 사탄을 상징한다고 선언한다. 하긴 그 나이 때 나도 부모님 말 안 듣고 악마 같긴 했겠구나 싶지만 이 정도면 저게 사탄의 교의인지 나 같은 일반인이 대체 어찌 알겠나 싶다. 사탄이 굳이 자신의 교의를 뭐하러 영화에 담을 것인가? 의도가 있다면 결국 교의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텐데, 정작 나 같은 일반인이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다면 헛수고도 이런 헛수고가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탄, 내지는 ‘순수한 악’이 존재한다면 일단 이 분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괴벨스 평전(랄프 게오르크 로이드의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꽤 괜찮았다)이나 구스타프 르 봉의 “군중심리학” 한 번 읽고 프로파간다의 설파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보는 게 좋겠다. 방식이 틀려먹었으니 나 같은 범부에게 순수한 악도 별 거 아니구나 같은 소리나 듣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스틸 컷들 저작권 클리어는 한 건지 모르겠다. 아… 저자라면 악마라고 영화사에 연락 안 해 봤겠구나.

[공도성 저, 이야기연구원]

가난 사파리 : 하층계급은 왜 분노하는가

영국에서는 꽤 유명한 래퍼라는 저자가 쓴 자전적 에세이라는 소개문구와 꽤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다가 저자가 그동안 쓴 칼럼들의 제목을 늘어놓아 만들었다는 난삽한 표지 디자인으로 기껏 모았던 시선을 단숨에 흩어버리는 모습이 돋보이는 이 책은 저자의 약력과 소개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랩이나 힙합과는 별 상관없는(바꿔 말하면 굳이 랩이나 힙합을 갖다쓰지 않더라도 책을 풀어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류의 책이라면 Suede의 Brett Anderson이 데뷔 전 거지같았던 유년기를 회상하며 내놓은 “칠흑 같은 아침”을 떠올릴 수 있겠는데, 인종의 차이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둘 다 하위계층으로서 팍팍한 인생을 살다가 나름의 성공의 맛을 본 이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멜로디메이커 기질이나 문학성을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글을 읽었다는 식으로 어쨌든 풀어내는 “칠흑 같은 아침”에 비해 더욱 음악 얘기를 쫙 뺀 이 책은 스코틀랜드 흑인 게토에서 자라난 저자가 풀어내는 가난에 대한 르포르타주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게토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타고난 능력의 고하와 무관하게 정신적 위축, 정신적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저자는 이러한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발언권의 부재를 지적한다. 말하자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대개 실생활에서의 경험에서 비롯하는 만큼 꽤 타당해 보이는 이유를 동반한다. 심지어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마저 지역의 자활이 아니라 지역의 외부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면서 가난한 이들을 더욱 더 종속적인 위치로 몰아넣고, 결국 빈곤 지역은 계속해서 보존되는 일종의 사파리가 되는 것이다, 라는 게 책의 대략적인 결론이다.

그러니까 저자에게 랩은 결국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자기애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던 셈이고, 비행청소년들의 교화(내지는 재사회화) 수단으로 랩을 가르쳤다는 소개글의 토막은 덕분에 좀 다르게 읽힌다. 이걸 뜨고 나서 옛날 생각 못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가난을 딛고 일어섰다는 식의 ‘스웨그’를 강조하는 많은 힙합 뮤지션(또는 뮤지션 호소인)들의 모습보다는 이런 모습이 더 진정성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금수저 물고 태어나 두꺼운 지갑을 내세우며 이걸 스웨그라고 덧붙이는 이들이 힙합 문외한의 눈에는 좀 많아 보였다. 그런 분들이 주변에 있다면 일독을 권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한 대 맞을까봐 안했다.

[대런 맥가비 저, 김영선 역, 돌베개]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블랙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 팬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생각들 중 하나는 어느 쪽이 되었든 청소하면서 틀어놓기는 꽤 곤란한 음악이라는 점이다. 일단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자니 층간소음의 영역을 넘어서 외부의 행인들에게도 소음공해 클레임을 받을 가능성이 보이고,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 틀어놓자니 뿌리깊은 취향을 원없이 공격받을 광경이 그려진다. 그래서 안전하게 혼자 있을 때 틀어놓고 열심히 청소한다는 선택지에 이르면 청소에 집중하면 음악이 안 들리고 음악에 신경쓰면 청소가 안 된다는 딜레마에 마주한다. 수많은 헬스장의 관장들이 생각해 보면 다들 음악 취향이 똑같을 리 없건마는 헬스장 bgm은 어딜 가나 비슷했던 것과도 비슷한 원리일 것이다.

자기 소개부터 재즈를 즐겨 듣는다고 취향을 밝혀두고 있는 이 저자의 경우는 그럼 어떠할 것인가? 흥미로운 점은 제목에까지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임을 밝혀두고 있지만 정작 이 책에서 저자가 청소하면서 들었던 음악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사실 청소라는 건 상쾌함, 청량함, 명랑함 등을 떠올릴 수 있을 일종의 비유일 뿐이라 밝히고 있긴 하지만 청소가 ‘refresh’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의미로 다가오는 (나 같은)이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다. 청소가 ‘상쾌하고 청량하고 명랑함의 알레고리’가 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자가 나와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던가, 아니면 저자의 초고가 출판사를 거치면서 새롭게 변신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다.

출판과 관련해서는 최종 소비자로서의 역할 외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자로서 이 책의 초고가 거쳐왔을 운명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저런 가능성에 비추어 짐작해 본다면 아마 꽤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을 편집자는 이 책의 초고를 받아들고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하려는데 Dream Theater가 흘러나올 때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저자가 정말 청소하면서 들었던 음반들의 내용들을 원고에서 들어냈을 것이고, 그러다가 책의 제목과 내용의 차이가 주는 극명한 괴리감을 깨닫고 들어낸 원고를 살려낼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은 ‘비교적 사소한’ 수정을 가하기로 하는 결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음악 얘기를 하면서 청소라고 했다고 정말 곧이곧대로 청소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청소나 다른 일상에서의 일들이나 음악을 배경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혹시 고지식한 독자도 있을지 모르니 흐름을 깨지 않게 간단히 머리말에 밝혀두는 건 어떨까요?’ 등등등.

물론 이런 흐름들은 순전히 내 생각이고, 저자나 편집자나 한 번도 저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청소는 저자나 편집자에게 그냥 미끼같은 단어였을 뿐 기획의도는 그냥 음악을 소재로 한 에세이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책은 나왔다. 청소할 때 들을만한 음악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자의 재즈 취향과 인생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아마도 이 책을 돈주고 샀던 메탈헤드에게는 어정쩡하게 다가올 수 있는 형태로 나와서 그 메탈헤드의 책장에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다. 근데 이거 서평이 맞기는 맞나…

[이재민 저, 워크룸프레스]

작가를 위한 싸움 사전

학창 시절 한문 수업과는 다들 데면데면하면서도 무협지는 챙겨 보면서 정파와 사파의 구분 정도는 학생의 기본소양처럼 챙겨가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무슨 무공이나 초식을 쓰더라도 그걸 읽는 이들은 무공은커녕 약육강식의 교실에서 자세 낮추고 살던 경우들도 많았다(어라 내 얘긴가). 하긴 싸움 실력이 읽는 책 따라 가는 거였으면 나는 아마 벌써 세계를 정복했다가 어느 골방 무협 전문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냉가슴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 블로그 글들이 대개 그렇지만 쓰면서도 정말 쓸데없어 보이는 얘기다.

그래서 그런 골방 무협 전문가들이 현실의 쭈글이 생활을 잠시나마 잊고 탐닉한 취미는 많은 경우 나만의 무협 만들기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네들의 상당수는 앞서 말했듯이 한문 수업과는 데면데면했고 그건 다른 과목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는 경우도 상당했으므로,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무협은 당췌 무슨 얘기인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인 경우가 많았다. 가장 문제는 일단 액션물이거늘 얘네 싸우는 게 맞기는 한가 수준의 기묘한 서술은 무협을 무협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는 기묘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긴 시트콤 인생을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은 많이 봤어도 액션물 인생을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은 본 적이 없었으니 그네들로서도 변명거리는 충분한 셈이다. 펜이야 매일같이 쓴다마는 법치주의의 시대에 무슨 주먹질이란 말인가.

작가이자 훈련받은 격투가로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저자는 이러한 이들을 위하여 싸움의 조건, 심리와 반응, 싸움의 유형, 무기와 부상 등 다양한 측면들을 조명하면서 나름의 가이드를 제시한다. 허나 한 가지 드는 의문은 어느 폭력의 현장을 여러 각도로 조명하면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이러한 내용들은 본질적으로 부정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 책에 영상이나 사진을 담은 몇 장의 CD나 QR코드들을 첨부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를 위한” 책은 이 책의 수요자들이 결국 이 책을 보고 공부한 내용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 들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 정도 부정확성은 그저 감수해야 할 부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이 돈 될리 없어 보이는 분야에 대한 장황하면서도 때로는 듬성한 묘사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방향의 선택이 작가임을 자임하는 저자가 어쨌든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기왕 문학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독서 편력이 형편없긴 하지만 생동감 있는 싸움의 현장을 담아낸 글을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현실적인 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게 무협지였다면 존재하지 않았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테지만 문학과 현실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던 이들의 글들에서도 그런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음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결국 그 분들도 사실은 무협지를 쓰는 이들과 어느 면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물론 글밥 먹는 입장은 아닌지라 이런 얘기는 여기까지.

[카를라 호치 저, 조윤진 역,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