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Radiohead를 별로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생각하면 이 정도까지 될 이유는 아무래도 없기는 한데) 이 책이 왜 책장에 꽂혀 있는지 정확한 이유는 나밖에 알 사람이 없건마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Radiohead로 철학을 한다니 괜한 지적 호승심이 어딘가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Radiohead에 대한 찬사들을 보매 얼마간은 납득이 되면서도 또 삐딱해지는 게 사실인지라 이런 책을 읽고 전반적인 취지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밴드보다는 귀 짧은 독자의 탓이 클 부분이다.

그래도 Radiohead에 대한 용비어천가식 책은 아니고, 그보다는 Radiohead를 단초로 삼아 대중음악에 대한 철학적 변을 늘어놓는 책에 가까운 편이다(하긴 Radiohead 정도가 아니라면 애초에 단초로 삼기도 어려울 것이다). Thom Yorke의 가사를 위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이 많은지라 아무래도 실존주의적 시각이 많은 자리를 잡는다. 그래도 어지럽게 등장하는 이름들에 비해서 책의 논조가 그 정도로 어지럽지는 않다는 게 나름의 미덕일 것이다(특히 이 책은 개념 설명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Radiohead의 텍스트의 사회적 함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Mark Grief의 글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음악’ 책인 이상 확실한 음악 얘기도 등장한다. Johnny Greenwood의 기타가 얼마나 클래식에 빚지고 있는지(특히 쇼팽)나, “Kid A” 부터 맞닥뜨리는 노골적인 일렉트로닉스의 ‘이론적 풀이’는, 평론은 결국 음악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이들에게는 꽤 우수한 사례로 꼽힐 만해 보인다. 물론 음악과는 상관없이 밴드 자신의 행동 윤리에 대한 내용에 가까운(그리고 적당히 선동적인) Daniel Milsky의 글도 있다. 록 얘기를 한다면 내용이야 뭐가 됐든 꼭 스피릿 얘기를 해야만 하는 이들이 있는 법이다.

개인적인 의문점이라면 Thomas Pynchon에 대한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Thom Yorke의 가사가 Pynchon에 빚진 바 많다는 건 사실 잘 알려진 얘기고,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던 등의 얘기를 하면서 한 번쯤 짚기는 참 좋아 보이는 내용인데 의외로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얘기가 나왔더라도 이해가 잘 됐을까 하는 생각은 물론 들지만 어쨌든 그렇다.

[브랜든 포브스 외 저, 김경주 역, 한빛비즈]

Confessions of a Heretic – The Sacred and The Profane : Behemoth and Beyond

많은 블랙/데스메탈 밴드들이 있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나름의 음악적 또는 상업적 성과를 거두었지만(후자의 측면에서는 그래봤자라는 평가도 보통 따라오긴 하지만) 그래도 그 중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락스타의 이미지에 가장 들어맞는 인물을 고른다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후보의 한 자리에는 Nergal이 있을 것이다. Behemoth의 음악적 성과야 잘 알려져 있는데다, 왕성한 활동 가운데 맞닥뜨린 불의의 백혈병도 극복해내면서 이제는 폴란드판 슈퍼스타K(“The Voice of Poland”) 심사위원도 하고 에너지드링크 모델도 겸하면서 부업으로 바버샵에 나이트클럽까지 운영하고 가십란에 열애설까지 등장하는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역경은 있었을지언정 확실히 성공적인 인생에 가까워 보인다.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 Nergal이 밴드를 결성한 것은 1991년이었고, 바야흐로 노르웨이의 불한당들이 장르의 전형을 만들어가면서 그네들에게는 음악이 ‘그저 음악’이 아니었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껏 살아남은 노르웨이의 불한당들이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지도 꽤나 오래 됐지만, 전 세계 수많은 대중문화/대중음악 연구자들에게 두고두고 우려먹을 연구거리를 던져준 대형사고를 쳤던 만큼 이 폴란드의 ‘모범적’ 뮤지션에게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시절 블랙메탈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여타 다른 책들과는 좀 달리 읽히는 데가 있다. 하긴 서문부터 Lamb of God의 D. Randall Blythe가 썼으니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말하자면 커리어 내내 딱히 사고친 적도 없었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아마도 현재까지는)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례의 하나로 꼽힐 법한 인물이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과 인생관 등을 풀어놓는 책이고, 꼭 음악만이 아니라 삶, 죽음, 종교, 여자, 그리고 셀러브리티로서의 인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만큼 이 책을 블랙메탈 관련 서적으로서 구한다면 아마 조금(사실은 많이) 허탈할른지도. 하지만 Adam ‘Nergal’ Darski라는 사람의 스테이지 뒤에서의 이런저런 면모들이나 헤비메탈 비즈니스의 이모저모들을 살펴보기에는 유용할 것이다. 인터뷰 곳곳에서 Nergal 본인의 유머감각도 드러나는만큼 읽기 그리 무겁지도 않은 편.

[Mark Eglinton & Adam Nergal Darski 저, Jawbone Press]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예전(정말로 예전)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프래그머티즘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머리가 한참 굵어진 지금도 도통 모르겠고, 극동의 어느 나라의 교과서에 그래도 한 소절을 박아넣었으니 나름 의미있는 지적 사조이겠거니 하면서 접한 인물 중 하나가 리처드 로티였다. 따진다면 리처드 로티는 네오 프래그머티즘이니 애초에 첫 만남 자체가 좀 잘못됐던 거겠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고, 그렇게 접한 저작에서 받았던 인상은 과연 이 ‘석학’을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애초에 보편성이나 거대 서사를 구축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이 시간과 우연의 산물(또는 그와 유사한 무언가)로 귀착되는 이상 리처드 로티의 주장은 철학자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집요하게 지적하는 비평가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덕분에 1989년 저작이 2020년에 재출간되는 쾌거를 일궈낸 이 책도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하긴 애초에 대표작을 두고 의외점을 찾는 시도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는 하다). 삶의 방식이 하나의 이념으로 포괄되거나 동질화될 수 없음이 아마도 명확히 입증된 것처럼 보였던 1989년 로티는 그런 동질성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역사적 토대가 결국 우연의 산물임을 깨닫고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지향점으로 삼자는 취지라고 할 수 있으려나? 결국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데는 이념은 (경우에 따라 도움이 되는 도구일 수는 있겠지만)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럼 이념 없이 연대할 방법은 무엇인가? 로티가 제시하는 방식은 우리는 결국 우연성의 토대에 기초한 만큼 유한하고 한정되며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열린 자세만이 가능하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를 발판삼아 참신한 메타포를 만들어내고 연대를 위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가자! 그러니까 읽으면서 어우 이분은 어떻게 맞는 것 같은 말만 하네? 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갸웃거리)다가 종국에는 뭔가 비전문가의 싸구려 토크콘서트를 듣고 나온 다음에 드는 찜찜함이 남는다. 저 새로운 어휘가 뭔가? 참신한 메타포는 뭔가? 나는 모르겠다. 아마 리처드 로티 본인도 모르겠거니 생각한다. 그 정답이 튀어나오는 순간, 우연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우리의 세상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리처드 로티 저, 김동식/이유선 역, 사월의책]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일찍이(래봐야 몇 년 안 되긴 했는데) 사이토 다마키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에서 어떻게 ‘전투미소녀’가 등장하게 되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 중의 한 부분의 요지를 정리하자면, 도상 표현이 상징적 거세를 당하는 서구적 공간과 달리 일본적 공간에서는 상상적 거세만으로 그치고(즉, 서구적 공간에서는 페니스를 상징하는 모든 도상이 검열되지만, 일본적 공간에서는 페니스 자체를 그리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그려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서구적 공간에서는 ‘그려진 것’은 자율적 리얼리티를 획득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현실의 대상을 대체하는 가상의 지위에 머무르나, 일본적 공간에서는 다양한 허구가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고, 허구가 현실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투미소녀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반영을 읽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사이토 다마키를 읽어봤을 것 같진 않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마법소녀’는 그런 전투미소녀의 상과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소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합성어지만 마법소녀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소녀일 필요가 없다. (능력을 ‘각성’할 때 실제로 말하기엔 좀 낯간지러울 멘트가 등장하긴 하지만)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멋들어진 코스튬이나 무기 같은 건 등장하지 않고, 그런 면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법소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각자 현실의 인생을 살아가다가 필요한 때에 마법소녀로서 활동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생계형 히어로’에 가깝다. 사실 히어로라는 표현까지 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긴 그러니까 꽤 허름한 반지하방에 29세 취준생 주인공이 갑자기 마법소녀로 발탁되는 게 소설의 세계관에서나마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당연히 이 보잘것없던 주인공이 이 세계관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와서야 비로소 겨우겨우 능력을 각성하고 엉겁결에 세상을 구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사실 그리 예상 외의 서사는 아닌 셈인데, 작가가 이 뻔한 서사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세상의 위기라는 것이 사실은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라는 배경설명을 덧붙이는 것이고, 주인공의 능력이 사용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어떻게든 치르게 되는 등가교환식이라는 것이다(무슨 강철의 연금술사도 아니고). 그런 위기를 늘어놓으면서 꽤 유쾌한 설정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무겁진 않지만 급격하게 표정을 바꾸어 진행되고, 결론에서 위아더월드를 외칠 수 있게 되었을진 모르겠지만 그 유쾌한 세계관은 어느새 웃음기를 싹 거두게 된다. 마법소녀가 존재했지만 곧 마법소녀들이 대부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없던 능력이 생겨났고,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세상을 구할 것이다. 교훈적이겠지만 제목에 마법소녀가 들어가는 소설을 읽는 이들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이 왜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이전에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도 왜 꽂혀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따지면 (있을 리가 없었던)읽기 전 기대에 비해서는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박서련 저, 창비]

자기관리론

자기개발서 없는 인생살이에 갑자기 선물로 이런 책이 끼어들어 왔으니 스스로 자기개발이 부족해 보였나 잠시 되돌아보게 된다. 자기개발서를 본다고 모두들 자기개발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결국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개발에의 의지를 심어주는 게 자기개발서의 1차 목표라면 벌써 이 책은 나에 대해서는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인데, 목표달성을 했다고 그냥 덮어두고 있는다면 증정자에 대한 예의는 아닐테니 표지를 들춰본다.

“How to Stop Worrying & Start Living”이라는 원제가 어떻게 번역해야 자기관리론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세상 근심걱정들과 맞서 싸우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저자의 충고를 담고 있다. 결국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를 이런저런 근거들을 붙여 책 한 권의 분량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없는 근심걱정을 만들어서 굳이 달고 사는 나 같은 이에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저명한 저자의 책 전체를 꿰뚫고 있지만 딱히 이유는 없어 보이는 낙관론은 이 저자는 정말로 괜찮았던 것일까에 대한 추가적인 걱정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이 정도의 낙관론이라면 혹시 비관적인 전망을 할 통찰 자체가 없었던 거 아닐까?

그러니까 이 책은 텍스트 자체를 굳이 삐딱하게 바라보지 않고 하나하나를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는 나름의 효용을 가질 수도 있겠고, 어쨌든 이 저자의 자기개발서를 읽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니 저런 걱정은 기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책을 훌훌훌 들춰보자니 피곤해지기 전에 휴식하랬다가 수면부족으로 죽은 사람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저자의 말에 다시금 뒷목이 뻐근해진다. 저자는 새벽녘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심 수면부족을 호소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직장인들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열차 안에서는 그렇게 피곤한 직장인들이 수면부족을 호소하며 직장으로 향하고 있지만, 지하철역 한켠에 다소곳이 자리잡곤 하는 깜찍한 규모의 서점(또는 매대)에 떨이로 이 저자의 책들이 올라와 있곤 하니 적어도 그 직장인들에게는 저자의 충고가 잘 먹혀들기는 어렵지 않을까? 뭔가 얼굴도 이름도 모를 동지들을 잔뜩 얻은 듯한 느낌만은 괜히 뿌듯하다.

[데일 카네기 저, 임상훈 역, 현대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