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ege Lord “Master Control”

새해의 첫 앨범은 Liege Lord의 3집. 뭐 새해에 어울리는 음악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 클래식을 듣겠다고 얘기한 지 얼마 안 됐으므로 뭔가 클래식이랄 만한 걸 찾다 보니 이 앨범이 손에 잡힌다. 요새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Master Control’이란 제목도 괜히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한다만 이들이 그런 뜻을 의도하고 쓴 것 같지는 않으므로 이만 넘어가고.

앨범 세 장으로 끝났지만 Liege Lord라면 Jag Panzer나 Omen 등과 같이 80년대 초반 USPM의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전형을 보여준 밴드래도 부족하지 않을진대, 그 중에서도 장르의 미덕들을 가장 고루 갖춘 사례라면 이 “Master Control”이 아닐까 생각한다. 파워메탈과 스래쉬(와 약간의 펑크)를 버무린 스타일인데, NWOBHM의 기운 강하면서 곡마다 개성 강한 리프들이 USPM식 코러스를 만나면서 ‘적당히 희망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새로운 보컬인 Joe Comeau의 목소리는 묘하게 Bruce Dickinson과 King Diamond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밴드의 스타일에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편이다. Rainbow의 ‘Kill the King’의 커버나 ‘Fallout’ 같은 곡은 장르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별로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아직은 메탈이 힘을 잃지 않았다고 대개 말하곤 하는 1988년에 나온 이 앨범이 별로 빛을 보지 못한 건 사실 좀 의외이기도 하다. 멋진 앨범이다.

[Metal Blade, 1988]

Absu “Barathrum: V.I.T.R.I.O.L.”

Barathrum 얘기 나온 김에 간만에 들어본 앨범…이지만 Barathrum과는 아무 상관없는 Absu의 데뷔작. 요새야 cascadian을 위시한 블랙게이즈도 이미 많이 등장했고, 언제부턴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들어봤다는 사람조차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Blasphemy 류의 war-metal을 좋아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미국 블랙메탈에 대한 관심도 확실히 예전보단 높아진 듯하지만, 블랙메탈이라면 당연히 스칸디나비아를 얘기해야 마땅하던 시절 미국 블랙메탈에서 몇 안되는 주목해야 할 밴드들에는 Absu의 이름이 빠지질 않았다. 블랙스래쉬는 아니지만 90년대 초반부터 활동한 여느 밴드들보다도 스래쉬하면서 오컬트한 사운드도 밴드의 개성이라 할 수 있겠다.

“Barathrum: V.I.T.R.I.O.L”도 그런 밴드의 초창기 음악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스래쉬의 기운이 덜하고 오히려 Nocturnus식 데스메탈을 좀 더 스푸키한 분위기로 풀어낸 듯한 음악을 들려주는 점에서 이 밴드의 다른 앨범들과도 확실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음악을 프로그레시브하다고까지 하긴 어렵겠지만 앨범은 1993년에 나오던 여느 블랙메탈 앨범에 비해서도 확실히 복잡하고 테크니컬한 전개를 보여주고, 때로는 싼티가 좀 과하다 싶긴 하지만 오페라틱한 면모까지 보여주는 ‘Descent to Acheron(Evolving to the Progression of Woe)’ 같은 곡은 이 밴드가 멜로디가 그리 다양하진 않지만 이를 변주해 가면서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처음부터 솜씨가 좋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옛날 핫뮤직식 표현으로 Rotting Christ에 대한 (좀 뜬금없긴 하지만)미국의 대답 같은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키보드 얘기가 좀 거슬리는 이들도 있긴 하겠지만 1993년이면 키보드 좀 썼기로서니 블랙메탈을 배신했네 어쩌네 소리 듣기는 많이 이른 시대였을 것이다. 하긴 데모 몇 장 나오긴 했다지만 이게 데뷔작인데 대체 뭘 변절하고 할 게 있을까.

[Gothic, 1993]

Celtic Frost “To Mega Therion”

성탄절도 되고 해서 연말까지는 그간 자주 듣지 않았던 클래식들을 꺼내들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간만에 돌려보는 앨범. 나도 그랬지만 “Morbid Tales”와 “Emperor’s Return” 때문에 이 앨범이 2집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이 앨범이 Celtic Frost의 1집 앨범이었다. 아마 1집이라기엔 이미 장르의 정점에 가까워 보였던 탓도 있겠고, 이미 이전의 EP 때부터 많이 될성부른 떡잎이었다는 것도 있겠다. 그렇지만 밴드의 음악이 단순히 Hellhammer의 업그레이드판에서 벗어나 후대의 수많은 밴드들의 음악을 예기할 수 있는 그 모습을 띠기 시작한 건 이 앨범부터일 것이다. 말하고 보니 그 Hellhammer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수많은 후배 밴드들은 뭔가 싶지만 일단 여기서는 넘어간다.

보통 Celtic Frost의 최고 역작이라 얘기되는 것은 “Into the Pandemonium”이지만, 이후 많은 익스트림메탈 밴드들이 수없이 써먹은 여성보컬과 남성보컬의 병치, 곡마다 개별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특정 모티브를 중심으로 연계되어 있는 구성(‘Innocence and Wrath’의 모티브가 ‘Dawn of Megiddo’에서 등장하는 모습 등) 등은 이미 이 앨범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밴드는 스피드에 그리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스래쉬하고 에너제틱한 곡을 만들 수 있었고, 동시에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들이나 컨셉트를 통해 메탈이란 장르 자체의 외연을 넓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독한 실험이었겠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모습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Into the Pandemonium”의 실험들은 이 앨범의 단초들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앨범 최고의 미덕은 역시 실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메탈 본연의 모습에 있다는 점이 이후의 앨범들과도 가장 구별되는 차이일 것이다. 솔직히 “Into the Pandemonium”이 메탈의 전형은 아니지 않나? 그런 면에서는 밴드의 가장 메탈다운 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Noise가 멜로딕 스피드메탈이 아닌 유로피언 스래쉬의 전당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Noise, 1985]

Fír “De stilte van God”

네덜란드 출신 원맨 밴드의 데뷔작. 전혀 몰랐던 이름이었고 인터넷의 힘을 빌려도 나오는 게 많지는 않다. 그나마 알려진 내용은 Blood Tyrant에도 참여했던 The Specter가 하는 밴드라는 정도? 뭐 이것도 정보냐 하겠지만 애초에 이 앨범을 샀을 이들의 대다수는 Tour de Garde의 이름을 보고 샀을 것이고, 그 중의 또 상당수는 Blood Tyrant를 들어 봤을 테니 그래도 나름 홍보 포인트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장사야 될 리 없건마는 Tour de Garde도 이제 20년을 넘게 살아남은 블랙메탈 레이블이다.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출중하다. 물론 새로울 것은 하나 없는 스타일이지만 이만큼이나 90년대 초중반 노르웨이 블랙메탈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례도 요새는 드문 편인데, 굳이 특이점을 찾는다면 Darkthrone이나 Burzum의 정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들에 비해 이 밴드는 ‘Aerie Descends’를 긁어대던 시절의 Thorns를 떠올리게 하는 편이라는 정도? 하지만 그 지글거림이 피곤해질 때쯤 ‘Morgenster’ 같은 Bathory풍의 호방함을 만나볼 수 있고, Blood Tyrant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밴드에서도 그 시절 블랙메탈의 뒤에서 분위기 깔아주는 풍의 신서사이저 연주에 일가견이 있음을 다시금 보여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90년대 노르웨이 블랙메탈을 좋아했던 이라면 이 앨범을 반기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별 기대 없이 샀는데 거의 올해의 앨범 급으로 만족하고 있는 중이다.

[Tour de Garde, 2024]

Barathrum “Überkill”

Barathrum의 2024년 신보. 뭐 Beherit과 더불어 핀란드 블랙메탈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거물임은 말할 필요 없겠지만, 이래저래 스타일도 계속 바뀌고 당혹스러운 전자음악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Beherit에 비해 좀 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 건 이쪽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좋게 얘기하면 적당히 구수한 스타일로 둠의 그림자 짙은 블랙메탈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화끈한 맛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이 음악을 즐겨들을 이는 아무래도 별로 없어 보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리버브 잔뜩 먹인 사운드로 가득했던 “Fanatiko” 이후 이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사실 이 밴드의 동시대 밴드들과의 가장 큰 구별점이라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딱히 큰 차이 없는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동시대에 활동하던 노르웨이의 불한당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하긴 베이스 두 명이 붙은 음악이 일반적인 블랙메탈과 같을 리 없겠지만 둠의 그림자는 물론 때로는 헤비메탈이나 하드코어의 느낌까지 엿보이는 이 앨범만큼 들으면서 다른 밴드들이 연상되던 사례는 이들의 앨범들 중에서는 없었던 것 같다. ‘Spark Plugs of Purgatory’의 드라이브감이나 스래쉬의 기운이 강한 ‘Denial of God’, 펑크의 기운 강한 ‘Black Magick Rites’ 같은 곡들은 Barathrum의 다른 앨범이었다면 약간의 이질감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래도 앨범에 깔린 분위기 자체는 일관되는데다, 따지고 보면 Mortuary Drape나 Denial of God 같은 밴드들이 Barathrum을 듣고 받은 영감으로 만들고자 했던 게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싶고, 또 이들만큼이나 ‘스웜프’ 스타일의 블랙메탈 리프를 만들 수 있었던 밴드는 없었으니 나로서는 반갑게만 들린다. 몇 번 더 들으면 생각이 바뀔 거 같긴 한데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Hammer of Hat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