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프로그한 걸 너무 많이 들어서 좀 덜한 걸 들으려다 보니 손에 잡힌 게 하필 왜 Caravan일까 싶긴 한데 캔터베리 씬이다 뭐다 하는 세평을 떠나서 나는 이 밴드의 가장 큰 강점은 그 팝 센스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태생부터 재즈나 클래식 물을 잔뜩 먹은 밴드였던 건 맞고 앨범을 듣다 보면 난해하달 수밖에 없는 임프로바이징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명확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단정한 리듬감과 팝 센스는 같이 캔터베리로 분류되는 다른 밴드들과도 확실히 구별될 것이다. 하긴 캔터베리 씬이라는 말이 애초에 어떤 장르적 특성을 가리키는 건 아니기도 하고.

누가 뭐래도 밴드의 최고작일 이 3집은 22분짜리 ‘Nine Feet Underground’ 때문인지 무슨 프로그레시브의 화신처럼 얘기되곤 하고, 실제로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프로그한 축에 드는 것도 맞지만 이 앨범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그야말로 브리티쉬함의 극을 달리는 팝이다. 피아노는 물론 플루트, 색소폰, 피콜로, 오르간, 멜로트론에 다양한 퍼커션들까지 어우러진 풍성한 연주에 ‘Love to Love You’같은 곡이 보여주는 은근한 댄서블함, 프로그레시브가 뭔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게도 자연스레 틀어줄 수 있을 ‘Golf Girl’과 단정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Winter Wine’ 등 빠질 곡이 없다. 오히려 굳이 빠질 곡을 고른다면 가끔은 이렇게까지 과중하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한 ‘Nine Feet Underground’라고 생각한다. 연주 잘하는 거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반복은 자칫하면 많이 피곤해지는 법이렷다.

그러고 보면 이 앨범을 좋아하지만 어디 가서 Caravan을 좋아한다고는 말 못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아니 이 프로그 명반을 그저 팝이라 한다고 분기탱천하시는 분이 있다면 당신 말이 맞으니 그냥 돌아가 주세요.

[Deram, 1971]

Caravan “In the Land of Grey and Pink””의 2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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