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s Insignia “Mechatronic Carnation”

루마니아 출신 war-metal 밴드의 데뷔 EP라고 대개 소개되고 있는 듯하고 ‘Chaos Insignia’ 라는 이름이 눈에 박히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Antichrist Siege Machine의 그 곡을 기억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므로 이 EP에서 Blasphemy나 Revenge 풍의 음악을 기대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저 커버가 과연 그런 음악 스타일에 어울리느냐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 Blasphemy의 앨범들도 커버와 어울리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하니 의심은 이쯤에서 거두고 음악 얘기를 하자.

그런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블랙메탈의 기운이 살짝 깃들긴 했으나 전형적인 데스메탈에 가깝다.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지만 war-metal이 아니라 Bolt Thrower 식으로 전쟁 얘기를 하는 데스메탈이랄까? 중간중간 꽤 격렬한 솔로잉을 보여주긴 하지만 극적 구성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일관되게 건조하고 밀어붙이는 템포의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굳이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EP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Altar Machine’은 확연히 다이내믹한 구성을 보여주는지라 이 밴드의 정규반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war-metal 얘기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정도 음악에 저런 광고문구를 붙였다면 사기이거나 또는 레이블의 무지의 결과일 것인데, 이 앨범은 war-metal이라고 해서 무슨 이익을 볼 것 같진 않으므로 아마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사실 저 ‘Altar Machine’을 제외하고는 격렬함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게 있나 싶은 데스메탈인데,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웰메이드 소리를 해 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20분 남짓한 러닝타임이므로 전반적으로 곡들이 비슷한들 지겹다 할 정도까지는 또 아닐 것이다. 요새 이 레이블에서 나오는 데스메탈들은 대개 귀에 들어오는 편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쯤 기회를 줘봐도 좋을지도.

[Iconoclasm Conquest, 2025]

Orion(UK) “Into Darkness”

Orion은 Ben Jones라는 영국 출신 뮤지션의 1인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젝트라고 하고, 2023년부터 보여준 솔로 활동으로 이런저런 프로그 웹진에서 이름을 비춘 바는 있으나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뭔가 벤 존슨(88올림픽 때 약물 걸리신 그 분) 생각나는 음악 잘 못할 것 같은 이름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렇게 모든 파트의 연주를 혼자서 하는 프로젝트들의 경우 송라이팅은 차치하더라도 연주나 이런저런 만듦새에서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정작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던 작년의 “The Lightbringers” 커버 때문일 듯싶다. Ben Jones가 누구길래 Hugh Syme이 커버를 만들어 주나? 뭐 그만큼 쌈짓돈을 안겨드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생각은 사실 들지 않는다. 각설하고.

그렇게 접한 Orion의 2025년작은 혼자 만든 작품이라기엔 많이 훌륭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키보드를 쓰면서 좀 더 모던해지기 시작한 이후의 Rush이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공간감 있는 분위기에서는 Porcupine Tree의 모습도 느껴진다. 테크니컬하다기엔 좀 여유 있는 전개와 연주이지만 ‘Someday’ 같은 곡에서는 때로는 Tangent 같은 밴드를 연상할 정도로 살짝 뒤틀린 리프(이걸 두고 djent 스타일이라기엔 많이 과하긴 하겠지만)도 보여준다. 사실 가사는 Pain of Salvation 정도로 어두운 데가 있는지라 그보다는 연주가 좀 밝은 게 아닐까 싶지만 ‘Left Behind’ 같은 곡에서 느껴지는 네오프로그의 향기는 좀 더 어두운 분위기였다면 제대로 어울리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Rush 후반기 스타일의 연주에 스페이스한 분위기를 더했지만 정작 곡은 Rush스럽지 않다고 할까? 그런 게 이 뮤지션의 개성이랄 수도 있겠다. 사실 이 정도면 개성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근래 들은 프로그 앨범들 중에서는 손꼽히는 수준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앞으로 수집할 이름이 또 늘어났다.

[Self-financed, 2025]

Envy “Ain’t It A Sin”

Blackie Lawless가 한창 시절 이미지에 비해서 훨씬 스마트한 인물이란 거야 이미 꽤 알려져 있지만 Dee Snider가 Blackie Lawless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 못지않게 개차반 이미지를 가졌으면서도 그저 생각없는 로큰롤러가 아니라는 점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하긴 PMRC 청문회에 나가서 할 말 다 하면서 PMRC 라벨이 없애야 할 앨범이 아니라 멋진 앨범에 붙는 것처럼 이미지를 바꿔놓는 데는 Dee Snider의 공이 없다고는 못할거다. 그럼 왜 그런 이미지를 사람들이 알아주질 않는가? 모르긴 몰라도 Twisted Sister 말고는 본업에서 딱히 눈에 띄는 행보가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각설하고.

어쨌든 2000년 이후에야 내놓는 솔로작들은 차치하고 80년대에 Twisted Sister를 제외하고 Dee Snider의 가장 의미있는 음악적 행보는 이 밴드를 꾸려낸 게 아닌가 싶다(허나 다른 걸 들어보질 못해서 장담할 순 없음). 잘 알려진 마초 호소인…인 Dee Snider지만,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여성 록 밴드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 두 자매를 중심으로 밴드를 꾸린 걸 보면 Snider가 나름 열린 눈을 가졌겠구나 생각도 들고, Gina Stile은 훗날 힘든 시간 속에서도 살아남은 Vixen의 기타로 발탁되기도 한 걸 보면 나름 사람 보는 눈도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물론 90년대 후반에 Vixen의 멤버였다는 게 살림살이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됐을테니 큰 의미있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남는 건 이 한 장 뿐인 앨범이고, Twsited Sister만큼의 하드함은 없는 이제 와서 굳이 장르를 따진다면 멜로딕 AOR 정도일 이 음악은 생각보다 준수한 만듦새를 보여준다. 이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준수한 보컬과 멜로디 깔끔하게 뽑아줄 수 있는 기타라고 한다면 핵심은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Wait On You’나 ‘Heartache’ 같은 곡은 테크니컬한 맛을 좀 덜어낸 Vixen이래도 이상치 않아 보인다. 조금만 더 하드했다면 이 앨범을 한 장 내고 망했지만 기억할 만한 그 시절 헤어메탈 hidden gem으로 언급하는 이들도 더 많았을 것이다. 하긴 지금 보면 저 커버도 Poison 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Atco, 1987]

도둑의 도시 가이드

도시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에 (나름대로는)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걸어다니는 거리가 어떠한 이유와 판단에서,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조차 잘 모르겠으나 짐작건대 아무래도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월급통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열렸던 바야흐로 소개팅의 시대, 남녀가 평등하다지만 현실적인 성공 쟁취를 위해서 나름의 데이트 플랜을 만들자면 일단 어느 동네가 괜찮은가? 그렇다면 그 동네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하는 게 중요한 준비사항이었고, 그러자면 일단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부터 알아봐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개팅은 그런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분야가 아니었으므로 보통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했다고 준비하면서 뭔가 재미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국내에는 “파리, 모더니티”로 번역되었다)는 이런 류의 지적 욕구에 뭔가 있어보이는 외피를 부여해 주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소개팅에 가서 할 수는 없었으니 실용성은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실패를 거듭하던 그 남자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있었다… 라고 이제 와서 덧붙인다.

저자가 도둑과 은행털이범 등을 직접 취재해 지었다는 이 책도, 아마도 이 책을 읽어볼 독자들이 도둑과 은행털이범(또는 해당 분야를 준비하는 일종의 ‘취준생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 같은 뜨내기 방문객이라면 절대 돌아보거나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숨겨진 모습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들춰내고 있으니 구성의 난삽함은 둘째치고 독자에게 확실히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다. 사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던 얘기를 새로이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그러기엔 이미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너무 깊게 노출되어 있다) 덕분에 그런 부분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각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임을 실감하기에는 더욱 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도시의 구조, 공간의 구조의 중심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제시하는 ‘도둑을 위한 가이드’는 결국 외부에서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한 ‘감시와 통제’ 목적으로 구성된 도시의 구조를 극복하는 소정의 목표를 달성한 성공담들일 것이고, 덕분에 책의 상당부분은 이제 건축과 공간을 벗어나 도둑과 당국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말하자면 헐리우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안티히어로격 도둑마냥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통제적’ 측면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조지 레오니다스 레슬리가 수많은 헐리우드 케이퍼 무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렇다고 도둑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려서는 곤란하다. 막판에 굳이 처가가 도둑질을 당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은 아마도 그런 사소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 얘기를 했으면 더 효과적이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아마 좀 더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됐을 테니 어쩔 수 없으려나.

[제프 마노 저, 김주양 역, 열림원]

Theoden’s Reign “Mitheithel”

최근에 알게 된 의외의 소식 중 하나는 벌써 문 닫아도 예전에 닫았던 라트비아의 데모 전문 레이블 Elven Witchcraft가 2023년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면 많지는 않았지만 꽤 솔깃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고 Valar나 Uruk-Hai처럼 Chanteloup Creations를 통해 활동을 이어간 사례들도 있었지만, CD도 안 쳐주던 반지의 제왕 컨셉트 블랙메탈 또는 던전 신스 데모테이프 전문 레이블이 2023년에 되살아나서 (이제는 CD도 내주면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반갑기도 하면서도 이해가 잘 되진 않는다. 뭐 그만큼 찾는 이들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간다.

Theoden’s Reign은 이 레이블이 되살아난 뒤 새로운 이름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사례인데, 나야 전혀 아는 바 없으나 Heralder라는 양반이 혼자서 다 해먹는 미국 원맨 프로젝트라고 한다. 반지의 제왕 얘기를 제대로 다뤄낸 미국 밴드를 사실 거의 본 적이 없었고 Elven Witchcraft에서 미국 밴드를 본 적도 없었으므로 우려는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세오덴을 밴드명으로 내세운 거 보면 영화만 대충 보고 반지의 제왕을 다루는 건 아닐테니 어느 정도의 기대는 분명하다. 영화에서야 오랜 세월 정신줄 놨다가 정신차리자마자 전쟁터에서 개돌하다 나즈굴에게 당하는 할아버지 왕… 같은 이미지이지만 원작의 세오덴은 그보다 훨씬 영웅적인 존재기도 하고,

그렇게 접한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이런 밴드들이 그렇듯이 Summoning의 그림자가 분명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Caladan Brood의 모습도 역력한 편이고, 혹자는 뽕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포크 바이브도 강한 편이다. 포크풍이다못해 The Meads of Ashpodel이 연상될 정도인데, ‘Roads Go Ever On…’처럼 흥겨운 인트로가 Summoning식의 꽤 멋들어진 분위기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90년대 블랙메탈 열심히 듣고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머니 속 송곳마냥 문득문득 드러나는 싼티만 아니었다면 CCP에서 나와도 꽤 어울렸을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기대보다 훨씬 좋게 들었다.

[Elven Witchcraft,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