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rium(NED) “Zzooouhh”

Delirium은 정규반이라고는 1990년에 이 한 장만을 내고 망해버린 네덜란드 둠메탈 밴드이다. Sempiternal Deathreign이 역사적인(하지만 별로 알아주는 이는 없는) 데뷔작을 낸 게 1989년이었으니 이 앨범이라고 데스메탈의 기운을 걷어낸 둠 메탈일 리는 없겠다. 생각해 보면 음악만이 아니라 멤버들 본인들도 서로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년 다이나모 페스티벌이 열리는 나라였다지만 그 시절 네덜란드에 그 정도로 묵직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앨범을 내기는 했는데 그 만큼 잘 안 팔리던 밴드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은 Sempiternal Deathreign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Sempiternal Deathreign이 스래쉬메탈의 면모를 짙게 보이던 시절의 데스메탈이 Black Sabbath의 영향 하에 둠 메탈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을 했다면, Delirium의 음악은 Celtic Frost의 스타일이 둠 메탈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려주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케스트럴한 면모는 없으니 굳이 짚는다면 “To Mega Therion”일 텐데, 특히나 ‘Bitch’나 ‘Amputation’ 같은 곡에서의 리프나 보컬은 Celtic Frost의 오마주에 가깝다. 말하자면 Celtic Frost를 좀 더 데스메탈스럽게 만든 스타일의 리프를 이용해서 연주하는 둠 메탈(그런 면에서는 Asphyx와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Mark Hanout의 보컬도 Martin van Drunen 스타일이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내 여유있는 템포로 흘러가는 앨범은 아니고, 소시적의 Pestilence처럼 스트레이트한 구석도 보여주는 ‘Menace Unseen’ 같은 곡도 있고, 전반적으로 꽤 역동적인 구성을 보여주는지라 지루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기타만 좀 더 묵직하게 녹음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Memento Mori의 재발매반이 이 앨범뿐만 아니라 밴드의 모든 데모까지 망라하고 있는만큼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오리지널보다는 그쪽을 찾아보는 편이 좋을지도.

* 수정: 이 앨범을 낸 Prophecy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Prophecy 레이블이 아니더라. 여태까지 완전 잘못 알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

[Prophecy, 1990]

아카이브 취향

‘아카이브’를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그 뜻은 ‘기록 보관소’라고 나온다(옥스포드 영영사전 기준). 그러니까 ‘아카이브 취향’이라고 하면 나처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 두곤 하는 기질의 사람들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자!’ 하고 자신의 취향과 경향을 반영하여 자신만의 도서관 내지는 박물관을 만드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책 서두부터 푸코와 아날 학파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이 프랑스 역사가(이쯤 되면 프랑스는 어쩔 수 없나보다하는 생각도 든다)가 그런 의미로 아카이브란 말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이 고명한 학자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카이브는 그러니까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자신이 직시하려는 ‘역사적 진실'(이런 표현이 그리 적절치는 않겠다만)에 이르기 위해 과거의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적절한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저 푸코의 향기는 이러한 ‘취사선택’이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서부터 깃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승자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얘기와도 연결되는 셈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고, 결국 역사가는 시시해 보이기까지 할, 아카이브의 한 대목을 받아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어떠한 진실에 이른다. 어떤 갈림길에서 흔히 부유하곤 하는 지식인의 특성이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진실마저 사실은 편파적일 수 있으므로, 저자는 역사가 결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라, 아카이브 속에 가라앉아 있는 역사가 그렇게 가라앉은 이유와 경로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결국 현재와 과거와의 소통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민다. 그러니까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을 걸어두긴 했지만 이건 저자가 역사학도에게 제시하는 ‘역사학도로서의 올바른 연구자세’ 같은 셈이다. 덕분에 중간중간 저자의 한창 시절 열람실에서 지리하게 사료들을 필사할 때의 날 선 긴장감도 드러나고, 그러다가 ‘아카이브의 선물’이라고 이름붙인 소기의 성과에 이르렀을 때의 성취감도 엿보인다.

그러니까 요새의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라면 아카이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도 좋겠지만, 당신의 소중한 자녀의 공부는 이런 자세로! 같은 얘기를 아날 학파스럽게 풀어낸 책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그렇다고 출판사가 이 책에 차마 ‘역사학의 거두 아를레트 파르주가 제시하는 공부 솔루션’ 같은 홍보문구를 붙일 수는 없을테니 좀 아쉽다. 붙였다면 어떤 의미로든 벌어지는 광경이 기가 막혔을 것이다. 결론이 왜 이러냐면 쓰는 사람이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다.

[아를레트 파르주 저, 김정아 역, 문학과지성사]

Fear Factory “Demanufacture”

흘러간 음악 듣는 김에 간만에 들어보는 앨범. 사실 헬스장에서 Fear Factory를 틀어놓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나 적어도 이 앨범 전반부의 절도있는 리듬감과 그루브는 헬스장에서 들으면서 운동하는 데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이제 헬스장만 가면 되는데 원래 실천은 생각보다 어려운 법이라는 핑계를 붙여본다. 각설하고.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기획이 매력적이었는지 ‘인더스트리얼’이란 레떼르를 붙이고 등장한 서브장르는 꽤 많은 편인데, 이런 류의 분화가 오랜 시간 반복되면 결국 오리지널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가 되듯이 사실 Fear Factory쯤 되면 인더스트리얼이란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뭐 원래 “Demanufacture” 이전에는 좀 더 데스메탈 물을 먹은 음악을 연주했던 밴드이기도 하고… Ministry이야 “Twitch”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Cabaret Voltaire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Fear Factory의 음악은 디스토션 먹은 리프 뒤에 깔리는 이펙트 정도를 제외하면 인더스트리얼과의 연관점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거의 확립된 용례에 따라 이 앨범을 인더스트리얼 메탈이라고 부른다면 앨범은 장르의 가장 대표적인 앨범임이 분명할 것이다. 인더스트리얼풍 이펙트는 애먼 그루브에 집착하던 그 시절 다른 여타 밴드들과 이들을 차별화시켰고, Head of David를 커버한 ‘Dog Day Sunrise’ 같은 곡은 밴드가 마냥 헤비함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장르의 ‘근본’을 잘 알고 있다(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호오는 무척 갈릴 곡이기는 함)는 점을 보여주었다. ‘H-K’나 ‘Replica’ 같은 히트곡이 보여주는 심플하지만 힘있는 리프는 전개의 양상은 무척 다르지만 Meshuggah의 리프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발라낸 원형은 이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돌아보면 Meshuggah도 “Contradiction Collapse” 시절에는 좀 더 사람다운 음악을 했었다.

그러니 Burton C. Bell의 라이브가 조금만 덜 형편없었고 Nine Inch Nails의 행보가 조금만 더 지지부진했다면 밴드의 앞날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지도 몰랐겠다는 생각도 든다. 1995년에는 내가 이런 것도 들었었구나 싶어서 괜히 이런저런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다.

[Roadrunner, 1995]

Bram Stoker “Heavy Rock Spectacular”

프리미어리그 소식을 보다 보면 가끔 눈에 띄는 본머스라는 동네 출신의 하드록 밴드. 1972년에 이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 밴드지만 그 시절 뭐 그런 밴드가 한둘이 아닌지라 딱히 이 밴드가 눈에 띄어야 할 이유가 있냐면 많진 않아 보이는데 어째 나보다 먼저 음악을 들은 선배(다른 말로는 아재/아지매들)들은 사이키한 음악 좀 찾아 들었다 하면 이 앨범을 다들 알고 있더라. 그러니까 넷상에서 흔히 보이는 이 밴드가 ‘미스테리한 밴드’라는 류의 소개는 어찌 생각하면 좀 황당한 셈이다. 찾아보면 본머스에 있던 울워스 마트 체인점 근무자들이 모여 만든 밴드라는 얘기도 있던데, 진실이 뭐가 됐든 이 밴드에 대해 관심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각설하고.

Bram Stoker를 얘기했지만 드라큐라나 흡혈귀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앨범명은 “Heavy Rock Spectacular”지만 헤비하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은 음악인지라 그런 면에서는 과장광고의 극을 달려간 앨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Atomic Rooster 생각나는 오르간 묵직한 하드록인 만큼 그 시절 기준으로 하면 헤비하다는 것까지는 틀리지는 않다손 치기로 하자. 게다가 클래시컬하게 몰아치는 ‘Fast Decay’ 같은 곡을 보면 ELP 마이너 버전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사실 그보단 The Nice 생각이 더 많이 나기는 한다), ‘Poltergeist’처럼 흡혈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스푸키한 분위기를 시도하는 곡들도 있다. 멘델스존의 오리지널을 나름대로 하드록으로 풀어내는 ‘Fingals Cave’은 피아노학원 집 아들로서 꽤 자주 틀어놨던 곡이기도 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드라큐라도 아니고 헤비하지도 않고 스펙터클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음악은 좋아서 지금껏 살아남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음악으로만 승부했던 밴드라고 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스스로를 ‘legendary progressive rock band’라고 소개하고 있는 밴드 홈페이지를 보면 멤버들 본인들의 생각은 나 같은 범인과는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밴드를 전설이라고까지 띄워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Windmill, 1972]

Incarnator “The Anthology – In Nocturnal Glory / Nordic Holocaust”

Incarnator는 Zyphrianus라는 양반이 혼자서 하던 1992년에 두 장의 데모만을 남기고 사라진 노르웨이 블랙메탈 밴드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밴드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꽤 많을 것이고 이쪽 음악의 인재풀이 그리 넓지 않은고로 실력자라면 여기저기 다양한 밴드에서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90년대 초중반의 노르웨이는 더했음을 생각하면 이 원맨 밴드의 데모 모음집(그래봐야 3곡밖에 되지 않는다)에 많은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 이름도 처음 보는 레이블도 검색해 보니 이 모음집을 포함하여 3장의 발매작이 전부 부틀렉이니 이 지점에서 앨범에 대한 기대는 또 한번 깎여나간다. 암만 노르웨이 블랙메탈 팬을 자처한다지만 이래서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귀를 잡아끄는 편이다. 1992년이니 Bathory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 당연한데 기대 이상으로 차가운 분위기와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전개를 보여주지만 중간중간 타이트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는 드럼(좀 느려서 그렇지 D-beat 스타일이긴 하다)은 생전 Euronymous가 이 밴드를 Deathlike Silence에서 발표하는 걸 검토했다는 트리비아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한다. 거칠긴 하지만 1992년의 블랙메탈 데모치고는 음질도 꽤 준수한 편이다. 이미 “A Blaze in the Northern Sky”가 나온 시점에서 이걸 대단한 음악이라 하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겠지만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팬이라면 관심을 가져봄직한 수준은 충분해 보인다.

그렇지만 13분도 안 되는 이 앨범도 부틀렉이라고 해 봐야 싸지도 않고, 오히려 오리지널 데모는 비싸서 그렇지(대충 60유로 수준) 꽤 자주 보이는 편인지라, 어느 쪽을 사던 본전 생각은 피할 수 없겠지만 컬렉션의 측면에선 차라리 오리지널 데모를 찾는 게 더 나을지도.

[Bange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