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zor “Armed and Dangerous”

역사적인 Razor의 데뷔 EP. 1984년에 나온 스피드/스래쉬메탈 데뷔작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하면 할 말 없는데(Slayer는 이미 데뷔작에다 “Haunting the Chapel”까지 내놓은 시점이었다만, 그건 뭐 Slayer니까) 그래도 Razor만큼 일관되게 달리는 스타일을 유지한 스래쉬 밴드는 그리 많지만은 않다. 말하고 보니 바로 Whiplash나 Exciter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고 심지어 Exciter는 이미 1983년에 데뷔작을 냈으니 좀 더 이른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앨범명부터가 그렇듯이 헤비메탈의 기운이 강한 스피드메탈이었던 Exciter에 비해서 장르의 전형에 가까운 건 Razor가 아니었나 하는 게 사견.

그런 이름값에 비하면 이 데뷔 EP는 이상할 정도로 CD 재발매가 꽤 늦은 편이었는데, 그래도 80년대 캐나다 메탈의 굵직..한지는 좀 헷갈려도 어쨌든 의미있는 이름이었던 Viper Records에서 나온 이후의 앨범들과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이야 High Roller나 Relapse 같은 곳에서 재발매한 덕에 구하기 쉬운 앨범이 됐지만 덕분에 나 같은 얼치기 메탈헤드는 구해 듣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앨범명이 앨범명인지라 Anthrax의 그 EP를 검색순위에서 절대 이길 수 없었던 점도 있겠다. 하긴 이쪽이나 그쪽이나 찾는 이는 대개 비슷했겠지만.

그런 Razor의 이름값을 생각하고 이 EP를 듣는다면 생각보다 좀 더 헤비메탈에 가까운 음악에 잠깐 당황할 수도 있겠다. 바로 “Executioner’s Song”부터는 때로는 필받아서 너무 빠르게 간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스피드메탈이 등장함을 생각하면 밴드가 이런 스타일을 보여준 건 사실상 이 EP가 유일해 보이는데, 그래도 수록곡들은 대개 훌륭한 스피드를 보여주는데다(당장 수록곡의 절반이 “Executioner’s Song”과 겹침) ‘Killer Instinct’처럼 “Evil Invaders”의 스래쉬메탈의 단초를 보여주는 곡도 있으니 훗날의 Razor의 위명을 생각하더라도 부끄러워할 만한 앨범은 아닐 것이다. 혹자의 말마따나 Motörhead와 Judas Priest의 그림자가 만나 좀 더 어두워진 지점에서 튀어나온 음악이래도 무난할 것이다.

[Voice, 1984]

G, The “Highway of Love”

활동명이 저런 덕분에 The G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사실 저런 앨범명의 신스웨이브라면 굳이 뮤지션에 대한 정보를 찾지 않더라도 그 스타일을 응당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의 하이웨이’나 ‘사랑의 고속도로’로 구글링을 하면 1989년에 독집을 낸 최민호의 ‘사랑의 하이웨이’ 아니면 소위 고속도로용 트로트(내지는 뽕짝)가수 민지의 ‘오빠 달려'(대충 사랑의 고속도로로 달려가자는 내용)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러니까 2024년에 LA에서 사랑의 하이웨이를 얘기하고 있는 신스웨이브라면 응당 80년대풍 드림웨이브를 연상하는 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래도 내놓고 선셋 스트립을 달려가는 오픈카의 형상을 그려내던 Timeslave Recordings 시절 곡들에 비하면 NewRetroWave로 옮겨온 이후에는 좀 더 신스팝에 가깝게 다듬어지고, 곡들의 주제도 선셋 스트립을 벗어나 80년대스러운 다른 주제들에도 다가가기 시작했다. 보컬만 좀 더 소울풀했다면 The Weekend에 비교됐을 법한 ‘(We All)Fall Down’이나 ‘Alone Again’ 같은 곡들을 2016년의 ‘Malibu Nights’와 비교해 보면 댄스 플로어 분위기는 확실히 자제하고 좀 더 단정한 팝 앨범을 만들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Waverunner Alpha’에서 느껴지는 Timecop 1983의 분위기도 사실 사랑의 고속도로 이미지와는 약간은 거리가 있다.

그래도 ‘Action Man’ 같은 곡이 결국은 The G가 가장 잘 하는 스타일이고, The G를 인터넷의 수많은 방해공작을 떨쳐내고 찾아내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굳이 앨범에서 가장 ‘뽕끼’ 있어 보이는 곡을 하나 고른다면 역시 ‘Action Man’이다. 그러니 한국인을 위한 2024년의 신스웨이브 한 장을 고른다면 아마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인생은 뭐 모르는 법이니까.

[NewRetroWave, 2024]

Ragana “Desolation’s Flower”

이런 밴드를 접할 때면 블랙메탈이란 장르가 내가 처음에 블랙메탈을 듣기 시작할 때와는 꽤 다른 장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유럽에서 시작하고 좀 더 융성한 편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북미가 힘을 쓰지 못한 음악이 90년대까지의 블랙메탈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이 슬슬 인종의 용광로다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종래에는 이 장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이제는 그 90년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게 무슨 블랙메탈이냐란 소리가 나올 정도의 음악(아무래도 Sacred Bones나 The Flenser 같은 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도 등장한다.

페미니즘과 LGBTQ를 다루는(게다가 멤버 중 한 명은 논바이너리라는) 알고 보면 2011년부터 시작했다는 의외로 오랜 역사의 이 듀오가 블랙메탈 카테고리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이 음악을 둠적인 데가 있는 블랙메탈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음악에서 90년대 북유럽 블랙메탈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사실 듣다 보면 이걸 블랙메탈이라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블랙메탈이라기보다는 Isis 류의 슬럿지의 모습을 Mogwai풍 포스트록에 입혀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게 cascadian 블랙메탈이라 하면 할 말은 없음)? 하지만 때로는 Chelsea Wolfe 같은 이를 연상케 하는 적당히 어둡고 자욱한 분위기가 슈게이징의 물을 먹으면서 꽤 노이지한 기타 리프와 대조를 이루는 모습은 블랙메탈이 멜랑콜리를 표현하는 모습과 많이 닮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블랙게이즈나 Wolves in the Throne Room 류의 음악을 즐기는 이라면 만족할 수 있어 보인다. 솔직히 커버만 보고 뭔가 잘못됐다 싶었는데 정작 음악을 들어보니 가끔은 좀 많이 거슬리는 보컬을 제외하면 가끔은 달려주는 맛까지 보여주는지라 꽤 재미있게 들었다. 다만 많은 곳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혁명적이기까지 한 음악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니 취향 때문이라 하시면 당신 말씀이 맞겠지요 네.

[The Flenser, 2023]

Old Nick “Witch Lymph/Flying Ointment”

Old Nick은 이름답게 미국 블랙메탈 밴드이고, 기본적으로 거칠고 심플한 전개의 raw-black에 던전 신스풍의 건반을 얹어낸 류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밴드명부터 이렇게 삐딱한 밴드가 평범한 스타일을 연주하길 기대하긴 어렵겠다. 키보드는 조금만 더 뿅뿅댄다면 칩튠에 들어가도 어울릴 정도의 연주를 보여주고, 거칠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밝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아마도 예전에 했던 콘솔 비디오게임이나 미국 민요 같은 게 아닐까?)를 연주하는 리프를 듣다 보면 뭐야 이건 소리가 나오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좀 더 멀쩡해 보이고 불온하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음악을 연주하는 Impaled Northernmoon Forest 같은 밴드라고 할까? 내놓고 블랙메탈의 다양한 소재들을 조롱했던 Impaled Northernmoon Forest보다는 그래도 더 ‘온건한’ 류의 유머를 다루는 Old Nick 쪽이 소위 골수 메탈헤드들에게는 더 나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야 이 앨범으로 Old Nick을 처음 접하지만 이런 식으로 음악 만드는 밴드이다 보니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곡이 나오는 데까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metal-archives에 의하면 2020년 한 해에만 EP 7장과 정규반 2장, 스플릿 2장, 컴필레이션 3장, 박스세트 3개를 내놓는 미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뭐하는 인간들이냐 진짜), 어찌 생각하면 퀄리티와 상관없이 정말 취미로(만) 음악 만드는 골방 블랙메탈러의 전형이랄 수 있겠으나 앨범을 돈주고 산 입장에서 할 말인지 애매하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Witch Lymph”와 “Flying Ointment”는 그 중에서도 밴드가 맨 처음 내놓은 두 장의 EP인데, “Witch Lymph”가 2020.4.9에, “Flying Ointment”가 2020.4.14에 나왔으므로 뭐 그냥 같이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싶었는지 두 장을 묶어서 CD화하여 팔고 있다. 그래도 5일 먼저 나와서 그런 건지 “Witch Lymph”가 좀 더 건조하고 거친 스타일인데, ‘Infallibld Order of Profane Wizardry’ 도입부의 좀 멀쩡한 리프를 듣고 ‘어?’ 하다가도 곧 등장하는 싼티의 극에 달한 키보드(라 하기도 뭣한 효과음)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Flying Ointment”가 좀 더 멀쩡하단 의미는 아니다. 밴드의 대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Vampyric Candle’의 뭔가 유치하지만 그럴듯하던 도입부가 곧 칩튠으로 변신하는 모습이나 ‘Broomstick Shrouded’의 칩튠을 넘어선 엄청난 도입부를 듣고 있자면(그 와중에 리프는 또 되게 멀쩡함) 세상은 참 넓기도 하다는 진리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Cacophonous Mandrake Horde’ 같은 곡을 들으면 이 분들이 정말 음악 못해서 개그로만 승부하는 건 아니라는 게 엿보인다. 이런 밴드가 중간에 정말 멀쩡하게 한 장 만들어서 내놓는다면 그게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앞으로 계속 찾아보게 될 이름 같다.

[Grime Stone, 2020]

Ray Wilson “Live and Acoustic”

Phil Collins 이후 Genesis의 마이크를 꿰찬 Ray Wilson의 첫 솔로작? 하지만 제대로 된 솔로작이라기보다는 2002년의 시점에서 Ray Wilson이라는 보컬리스트의 그 때까지의 행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어쿠스틱 라이브 앨범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실 Genesis 경력 덕분에 이 솔로작을 구하는 이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렇게 참여한 Genesis의 앨범은 “Calling All Stations” 하나 뿐이고, 앨범은 밴드의 커리어에서 손꼽힐 정도로 폭망했으며, Ray가 Genesis 이전 몸담았던 Stiltskin도 인디/얼터너티브라 할지언정(영국식 포스트 그런지랄까?) 프로그레시브와는 거리가 먼 음악을 했으니 애초에 Ray Wilson을 프로그레시브 뮤지션이라 하는 자체가 좀 어렵긴 하겠다. 하지만 레이블도 Inside Out이고 앨범의 1/4 정도는 Genesis의 커버로 채우고 있는만큼 결국은 Genesis의 팬층을 노렸음은 분명해 보인다. 뭐 그러니까 나도 이 앨범을 구해서 갖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이 보컬리스트와 기타, 건반까지 3명의 단촐한 편성으로 보여주는 이 라이브에서 Genesis의 프로그레시브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애초에 커리어부터 프로그레시브보다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의 팝 보컬에 가까운 Ray Wilson이고, 결국 앨범의 중심에는 Stiltskin때부터 함께 해 온 Steve Wilson(Porcupine Tree의 그 분이 아님)의 곡들과 Bob Dylan과 Bruce Springsteen, Eagles의 커버가 있다. Ray가 마이크를 잡기 이전 Genesis의 주요 넘버들의 커버도 있지만 Genesis의 팝 센스도 애초에 범상치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선곡인지라 본격 프로그레시브 록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Ray Wilson의 기량만큼은 확실히 출중하다. 허스키한 부분에서는 확실히 Peter Gabriel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고, 아마도 Mike Rutherford와 Tony Banks도 그걸 보고 Ray를 새로운 보컬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애초에 Genesis가 끝장나고 몇 년 뒤에야 나온 이 라이브앨범을 두고 어째서 Genesis답지 않느냐고 하는 것도 우스울 일이다. 오히려 다양한 스타일들을 자신의 목소리 아래 모두 녹여내고 있으니 Ray Wilson이라는 보컬리스트의 기량을 엿보는 데는 이만한 앨범도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Inside Out,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