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ptopsy “An Insatiable Violence”

다작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겠다만 그래도 2-3년마다 정규반이던 EP던 하나씩은 꼬박꼬박 내던 Cryptopsy가 웬일로 EP 이후 5년만에 발표했던(그리고 정규반으로는 11년만이었던) “As Gomorrah Burns”는 밴드 초기의 공격성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반가운 앨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히 모던해진 사운드가 “The Unspoken King”이 괜히 나온 앨범은 아니었음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는 점에서 청자에게 밴드의 미래에 대한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긴 Flo Mounier 말고는 오리지널 멤버도 없는 2023년의 밴드에게 1994-6년의 사운드를 요구하는 건 너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굉장한 초창기를 선보였던 밴드였으니 이쯤되면 밴드의 업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The Unspoken King” 정도면 업보라기에 충분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다시 근면하게 2년만에 내놓은 신작은 여전히 밴드의 기존 노선을 담아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모던함은 오히려 전작보다 덜하면서도 원래 Cryptopsy식 데스메탈이 보여주는 ‘chaotic’한 맛은 좀 덜하다는 점인데, 좋게 얘기하면 좀 더 스트레이트하고 앨범 전반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보여준다랄 수도 있겠다. 아마도 밴드에게 데스코어 소리를 듣게 했을 Matt MaGachy의 하이톤 보컬도 여전하지만 덕분에 이 앨범이 코어 소리를 들을 일은 없어 보인다. 좀 더 묵직한 분위기를 가져가는(덕분에 조금은 “Once Was Not” 생각도 나는) ‘Malicious Needs’를 듣는다면 보컬의 넓은 음역대를 강점이라 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제일 귀에 남는 것은 Flo의 드럼이다. 일단 더 스트레이트한 앨범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2집에 수록됐더라도 어울렸을 듯한 ‘The Art of Emptiness’는 밴드의 유일한 원년 멤버가 Flo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기대보다 훨씬 좋게 들었다.

[Season of Mist, 2025]

Abraxas(POL) “99”

얘기가 나온 김에 간만에 폴란드 Abraxas도 한 번. 사실 폴란드 프로그레시브 ‘메탈’은 Riverside 이후 꽤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폴란드 프로그레시브 록은 그보다는 확실히 빛을 좀 덜 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Quidam이나 Satellite, SBB 같은 사례들을 제외하면 딱히 돈값했다는 기억이 있는 이름들도 나로서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 밴드는 정규반을 다 갖고 있는데, 일단 몇 장 안 되는데다 국내에 수입도 잘 됐으므로 모으기 좀 더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그레시브라지만 데뷔작을 제외하면 전부 Metal Mind에서 나왔기 때문에 뭘 모르는 메탈헤드가 혹하기도 더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더 알려진 한 장을 꼽는다면 1999년의 이 앨범일 텐데, Metal Mind에서 나오다 못해 레이블 사장님(알고 보면 Metal Hammer 폴란드판 편집자라고 한다)이 직접 프로듀스를 맡아서인지 밴드의 앨범들 중 가장 메탈적이다. 물론 이 밴드는 데뷔작 때부터 메탈의 기운이 없지는 않았는데, Marillion풍 네오프로그 중간에 갑자기 후끈한 연주를 선보이던 데뷔작에서 좀 더 어둡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이 앨범에서 나름 새로운 스타일의 정점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14.06.1999’나 ‘Spowiedź’ 같은 곡은 데뷔작이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헤비한 곡이고, 어지간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앨범에 실려도 좋을 정도의 묵직함을 보여준다.

그래도 이 밴드의 강점은 적당한 몽롱함을 동반하는 낭만일 것이다. Peter Hammill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Adam Lassa의 보컬과 “Wish You Were Here”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전개를 보여주는 ‘Anatema, Czyli Moje Obsesja’는 꽤 자주 찾아 들었다. 헤비하다 못해 이런 곡에서도 헤비함을 내세우곤 하는 모습이 가끔은 뭔가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 앨범을 처음 접했을 때면 헤비함은 응당 미덕이었다. 이래저래 좋은 추억이 묻어난다.

[Metal Mind, 1999]

Abraxas(GER) “Shattered by a Terrible Prediction / Signs”

아브락사스라는 이름도 밴드명으로는 – 흔치는 않더라도 – 간혹 보이는 편인데, 내가 아는 한도에서 그래도 멀쩡한 음악을 했던 사례는 이 밴드와 폴란드 네오프로그 밴드 정도였던 것 같다. 저 네오프로그 밴드도 은근히 메탈릭한 면모를 자주 보여줬던 걸 보면 메탈 밴드 이름으로 나쁘지 않을 듯도 한데 저 영지주의스러운 용어가 메탈 밴드의 이미지에는 그닥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각설하고.

이 밴드도 나보다는 훨씬 좋게 들은 사람이 많았는지 활동 접은 지 20년도 넘은 밴드의 데모 2장(1988년의 “Shattered by a Terrible Prediction”과 1991년의 “Signs”)을 묶어서 이렇게 재발매됐는데, 첫 정규작인 “The Liaison”은 1993년에 나왔지만 이미 1988년부터 데모를 냈던 밴드인지라 음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Abraxas의 음악보다 좀 더 파워메탈의 전형에 가깝다. 정규작이 파워메탈이긴 하지만 사실 Fates Warning의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레시브함이 있는 음악이었다면 데모는 그보다는 좀 더 Helloween(특히 “Walls of Jericho”)나 Heaven’s Gate 같은 밴드들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Iron Maiden 스피드업 버전이랄 데도 있겠다.

그래도 듣기에는 확실히 좀 더 원숙해 보이는 “Signs” 데모가 더 나아 보인다. 첫 데모보다 확실히 USPM의 그림자가 느껴지면서 좀 더 극적인 구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몇몇 곡에서는 소시적 Crimson Glory의 모습도 보여주는 데가 있다(특히 ‘Stolen Memories’). 이 앨범 두 장 내고 망해버린 밴드를 굳이 왜 끄집어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즐겁게 들었다.

[Golden Core, 2025]

Shining(SWE) “Lots of Girls Gonna Get Hurt”

우울하기 그지없던 초창기를 뒤로하고 이제는 블랙메탈계의 락스타에 많이 가까워진 Shining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레이블을 정말 꽤나 자주 바꾼 사례이고, 이 밴드가 드라마틱할 정도로 방향성을 튼 적은 없지만 레이블의 변화와 함께 스타일도 조금씩은 레이블에 맞췄는지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Depressive라는 수식어에 가장 어울릴 정도로 어두웠던 1, 2집은 Selbstmord Services에서, 이후 좀 더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전개의 3, 4집은 Avantgarde Music에서, 이후 좀 더 정통적이면서도 시원하게 후려치던 5, 6집은 Osmose에서, 그보다도 좀 더 흥겨웠던 7, 8집은 Spinefarm에서 나왔다. 일부러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평론가라면 아마 꽤 많은 쓸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다른 이들의 과제일 테니 이쯤에서 접어두고.

그래도 어쨌든 Depressive한 분위기만큼은 꾸준하게 가져간 Shining의 발매작 중에서 가장 특이한 한 장을 고른다면 Spinefarm에서 나온 이 EP가 아닐까? “VII: Född Förlorare”부터는 확실히 메인스트림에 가까워진 음악을 연주하긴 했지만 예전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Katatonia의 커버(‘For my Demons’)는 물론이고, 나머지는 아예 Kent나 Imperiet처럼 메탈과 상관없는 넘버들을 음울한 무드의 ‘발라드’로 커버하고 있으니 Shining이라는 밴드는 물론이고 Niklas Kvarforth라는 보컬리스트의 커리어에서도 가장 독특한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Peter Bjärgö의 코칭 덕분인지 Niklas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었나 싶을 정도로 수려한 보컬을 들려주고, 원곡들이 괜찮은 멜로디의 팝이었던지라 밴드의 발매작들 중에서는 가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한 장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보컬이 다르고 묵직하게 편곡되었다는 정도를 빼면 원곡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력한 듯한 음악인지라 Shining의 이름을 지우고 듣는다면 그리 재미있는 앨범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Shining이라는 이름이 이런 음악에 어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Niklas 같은 얼굴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오면 안 된다고도 하던데… 뭐 노래 잘 하는 게 죄는 아니니 이만 넘어간다.

[Spinefarm, 2012]

King’s X “Gretchen Goes to Nebraska”

이 앨범이 36년 전 오늘 발매됐다길래 간만에. 프로그레시브라는 레떼르가 으레 붙는 밴드지만 이 밴드가 보통의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메탈과 비슷한 음악을 연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가끔은 메탈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들이 그 시절 메탈의 전형다운 리프를 보여준 적도 내 기억엔 없다. 1989년이니 아직은 스타일을 바꾸기 이전이긴 했지만 이 시절의 음악이라 해도 그 점에서 다를 건 없다. 메탈 소리가 나오는 건 아무래도 어쨌든 헤비함을 잊지 않은 Ty Tabor의 기타와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에 끼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Jerry Gaskill의 드럼 때문일 텐데(특히나 ‘Out of the Silent Planet’), 어쨌든 이 음악에서 메탈헤드의 귀를 잡아끌 구석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Jeff Ament(Pearl Jam의 그 분 맞음)의 말마따나 이 앨범에서 그런지 내지는 얼터너티브 메탈의 어느 단초를 찾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헤비하되 메탈릭하지 않은 Ty Tabor의 기타와 Ian Gillan이 가스펠 부르듯 하는 듯한 Doug Pinnick의 보컬은 그 독특한 전개를 뺀다면 확실히 거친 곡에서도 관조적인 기운을 던져주던 Pearl Jam과도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런가하면 3인의 멤버 전원이 그리 나쁘잖은 보컬로 보여주는 하모니는 때로는 비틀레스크하기까지 하다. 사실 1989년의 음악이라기엔 꽤 고색창연한 로큰롤에 닮아 있는 구석도 있다(‘Over My Head’). 그렇다면 이런 음악을 80년대, MTV와 헤어메탈에 프로그레시브 록이 박살났다고 평해지곤 하는 그 시절, 미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을 새로운 스타일의 프로그레시브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 같으면 메탈보다는 하드록이라고 부를 것이다.

[Atlantic,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