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tramp “Crime of the Century”

지난 6일 Rick Davies가 돌아가셨다기에 간만에. 사실 Supertramp의 좋았던 곡이 있었지만 이 밴드를 좋아했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좀 애매했다. Genesis에 뒤질세라 인상적인 심포닉 프로그를 보여준 데뷔작 이후에 밴드가 그만큼 프로그레시브한 앨범을 내놓은 적은 없었고, 프로그레시브 레떼르를 아예 떼버리긴 좀 그렇다 하더라도 이후의 메가 히트가 그 프로그한 맛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공룡 프로그 밴드들이 이미 망했거나 한창 망해가고 있던 1979년에 “Breakfast in America”를 터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Supertramp라는 밴드의 핵심은 적당히 프로그한 맛도 있는 고급스러운 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Breakfast in America”는 취향상 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이들을 위한 한 장이라면 아마 이 3집이 아닐까? 프로그레시브 록다운 면모가 엿보이긴 하지만 어느 하나 팝적이지 않은 곡이 없고, 이후 밴드를 상징하는 Rick Davies의 팔세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Hide in Your Shell’ 같은 오케스트럴하면서도 프로그한 발라드가 있지만 ‘Dreamer’ 같은 본격 팝송이 있고, 라이브 떼창에도 적절해 보이는 코러스와 멋진 토크박스 연주를 선보이는 ‘Bloody Well Right’가 있다. 이게 무슨 프로그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슬슬 팝송 좀 들어보겠다고 이것저것 찾아다니던 어느 돈없는 학생에게 이렇게 고급진 대중가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 준 앨범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Supertramp가 최애 밴드였던 적은 없지만 이 앨범은 인생디스크 중의 한 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앨범과 Alan Parson를 듣고 나서 그 돈없는 학생의 인생은 (그 전이라고 꼭 괜찮은 건 아니긴 했지만) 뭔가 급격하게 꼬여가기 시작했으나 말이다.

[A&M, 1974]

Chortoryi “Мисливці(The Hunters)”

현존하는 블랙메탈 레이블들 중 No Colours만큼 장르의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곳도 드물겠지만 최근에 No Colours의 신작 얘기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이 장르의 현재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쇠락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예전의 ‘클래식한’ 스타일이 장르의 중심에서는 비껴난 것처럼 보이는 현재(어쩌면 그 시발점은 Deathspell Omega의 성공일지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에 와서 No Colours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NS 혐의 짙은 레이블이 여태까지 독일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조금은 놀라울 일이다. 각설하고.

대충 ‘초루흐’ 정도로 읽는다는 이름(드네프르강 지류의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 밴드의 데뷔작은 No Colours가 2025년 9월 현재를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냈던 신작이면서(그러니까 꽤 오래 쉬고 있는 셈이다) 포크 바이브 강한 멜로딕 블랙메탈을 담고 있다. 하긴 애초에 저런 이름을 달고 나온 블랙메탈 밴드라면 포크적인 면모는 당연할 것이고, 출신이 출신인지라 Nokturnal Mortum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직선적이면서 덜 서사적이다. ‘Крик в чорноті (Scream in the Black)’ 같은 곡의 인트로에서는 살짝 Judas Priest 생각도 났다고 하면 과장일까? 사실 앨범을 관통하는 kobza라는 전통 악기(이게 커버에 그려진 저 만돌린처럼 생긴 악기라 한다)를 제외하면 포크적인 면모가 그리 짙지는 않다. Kroda 같은 밴드의 음악에서 이런저런 악기들을 걷어내고 메탈 밴드의 본연의 편성으로 연주한 부분만을 남겨놓는다면 비슷하겠거니 싶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포크’를 내세운 블랙메탈 밴드들 중에서는 가장 정통적인 사운드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곡을 끌어가는 모습이 꽤 매끄러운지라 앞으로의 앨범을 기대해 봄직 하다… 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다 보니 밴드의 핵심인 Ievhen Olefirenko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했다 하더라. 전쟁의 화마는 이렇게 생각지 않은 지점에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No Colours, 2023]

Anneke van Giersbergen & Agua de Annique “Pure Air”

The Gathering을 들었으니 Anneke의 솔로작을 듣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기에는 Anneke의 솔로작을 굳이 찾아들을 이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지 않으므로 좀 애매하기 하다. 이미 둠-데스보다는 프로그레시브나 심포닉, 또는 좀 더 보컬이 중심에 가는 팝송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행보를 보여주었으니 굳이 Anneke 시절의 The Gathering의 팬이 이 음악을 찾아갈 이유까진 없었고, 저 프로그레시브/심포닉 테이스트는 Ayreon이나 Devin Townsend의 앨범을 통해서도 맛볼 수 있었으니 대체재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소시적 The Gathering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메탈헤드라면 이런 행보가 꼭 맘에 들지만은 않을 가능성이 높겠다. ‘미녀와 야수풍 고딕메탈’의 전형같은 보컬은 아니었지만 장르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걸출한 보컬에 대한 아쉬움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나처럼 프로그 팬을 자처하는(잘 안다는 얘기는 아님) 메탈헤드에게는 이후의 Anneke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 사실 남성보컬과는 구별되는 여성보컬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이만큼 파워풀한 보컬은 드문데다, 어찌 생각하면 종전보다 훨씬 보컬의 힘에 의존하는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으니 Anneke 본인으로서는 이쪽이 훨씬 만족스러울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Anneke의 커리어 중에서도 가장 본인의 취향과 보컬리스트로서의 기량을 잘 드러낸 한 장이라면 이 어쿠스틱 커버 모음집이 아닐까? 어쿠스틱 라이브이다 보니 사실 파워라는 면에서는 기대할 것 없겠지만 애초에 솔로작에서는 메탈과는 담 쌓은 스타일을 보여준 Anneke이므로 파워를 기대할 일은 없어 보이고, Ayreon이나 John Wetton의 커버야 충분히 예상가능한 범위지만(Arjen Lucassen과 John Wetton 본인이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Alanis Morisette나 Damien Rice의 커버를 발견한 이들은 아마 꽤 당혹스러울 수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보컬 본연의 매력은 충만한 앨범이고, 충만하다 못해 화려한 게스트진이 이럴거면 굳이 참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한 수준인만큼 Anneke의 팬이라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Ayreon의 심포닉 프로그를 포크로 바꿔놓은 ‘Valley of the Queens’이 앨범의 백미… 인데, 생각해 보니 이건 원곡부터가 Anneke가 부른 곡인만큼 커버라고 하긴 좀 그렇겠구나.

[Agua Recording, 2009]

Gathering, The “Almost a Dance”

The Gathering 얘기 나온 김에 간만에 들어본다만 “Mandylion”으로 이 밴드를 처음 접한지라 Anneke가 없던 시절의 The Gathering이 엔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밴드의 1, 2집이 나왔던 Foundation 2000은 90년대 초중반에 여성보컬을 앞세운 밴드의 앨범이 나올 만한 곳은 아무래도 아니었고, 빛나는 면을 보여주는 둠-데스를 연주했다지만 앨범을 낼 때마다 보컬이 바뀌는 행보는 훗날의 성공이야 어쨌든 밴드 초창기의 배고프고 불안정한 입지를 짐작케 한다. 말하고 보니 이 밴드가 어떤 고정적인 스타일을 유지한 적이 있긴 있었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밴드의 제일 배고픈 시절은 이 “Almost a Dance” 까지일 것이다.

그래도 이후의 스타일의 변화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앨범이기는 분명하다. Foundation 2000의 발매작이라고 믿기 어려운 커버도 그렇고, 데뷔작을 주도했던 Bart Smits의 그로울링이 사라지고 Niels Duffhuës의 클린 보컬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 장뿐이었지만 Orphanage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보여준 Martine van Loon을 여성 보컬리스트로 영입했다. 전작이 둠-데스 연주에 심포닉 프로그의 기운을 살짝 입힌 스타일이었다면 이젠 데스메탈의 기운은 더욱 옅어졌다. 가가멜 느낌까지 나는 Niels의 보컬만 아니었다면 분위기 퍽 잘 살린 둠-데스라고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잘 들어오는 곡이 어쿠스틱 발라드인 ‘Nobody Dares’라는 걸 보면 Niels의 영입은 밴드에게 그리 좋은 선택은 확실히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Niels 대신 새로운 보컬을 내세우고 연주를 좀 더 풍성하게 해서 다시 녹음하면 어떨까 되게 궁금한 앨범이기도 하다. 물론 메탈 졸업한 지 20년도 넘은 이 밴드가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궁금한 걸 어쩌겠나.

[Foundation 2000, 1993]

Gathering, The “Home”

처음에는 메탈로 시작했었지만 이제는 The Gathering을 메탈 밴드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Anneke van Giersbergen 본인이야 항상 (꼭 이 밴드가 아니더라도) 메탈에 발을 담그고는 있었지만 정작 The Gathering은 메탈을 연주하지 않은 시간이 메탈을 연주한 시간보다 훨씬 길어져 버렸으니 그렇게 말하기는 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밴드의 가장 빛나는 시절은 “Mandylion”부터 “Nighttime Birds”까지일 테니, 이제는 ‘메탈 밴드 The Gathering’은 밴드 본인들보다는 밴드를 둘러싼 청자들의 욕망의 결과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무리까지는 아닐 것 같다.

밴드가 메탈을 포기한 이후의 앨범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 장이라면 아무래도 이 “Home”일 것이다. 이미 “How to Measure a Planet?”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스타일을 향한 밴드의 갈짓자 행보가 비로소 정리된 앨범이기도 하고, 기존의 ‘고딕’적인 분위기 대신 적당히 우울하지만 도회적인 – 이렇게 얘기하니 Anathema 생각이 나기도 한다 – 기운으로 빈자리를 메운다. ‘Shortest Day’부터 ‘Alone’까지의 앨범 초반 심플한 전개의 곡들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두드러지는데, 어찌 보면 항상 어느 정도는 프로그레시브한 스타일에 닿아 있던 Anneke의 커리어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와 거리가 있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래도 – 어쨌든 메탈은 아니지만 – 밴드가 여전히 흥미로운 리프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하는 ‘The Box’같은 곡이 있고, Anneke의 여전히 힘있는 보컬만으로도 기존 스타일을 좋아한 이들이라도 실망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이 앨범을 아주 좋게 들었다.

[The End,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