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ündgard “Stronghold of Majestic Ruins”

칠레 블랙메탈계의 근면성실의 대명사 Lord Valtgryftåke의 또 다른 밴드. 이 분의 분주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음악 여정을 좀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90년대풍 클래식 스타일 블랙메탈에 적당히 신서사이저를 곁들인 류의 음악을 밴드 이름만 바꿔가면서 계속 내고 있는지라 이 쯤 되면 굳이 밴드 새로 파가지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만드는 분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퀄리티를 떠나서 일단 저 근면함만큼은 생활인으로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그래도 어쨌든 무슨 이름으로 만들더라도 명반까진 아닐지언정 준작이라 부르기엔 부족함 없는 결과물을 항상 보여주는 분인지라 이 앨범도 나쁘지 않다. 굳이 다른 프로젝트들과 비교하자면 Darkthrone풍 리프에 던전 신스를 얹어놓은 듯한 다른 프로젝트들에 비해서 이 Ründgard가 좀 더 극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다른 프로젝트들(특히 Lord Valtgryftåke나 Winterstorm)에 비해서는 좀 덜 노르웨이스럽고, pagan한 면모는 찾아볼 수 없지만 “Grom”까지의 Behemoth의 모습을 닮아 있는 데가 있다. ‘Descending from the Southern Skies’ 같은 곡이 이런 면모가 두드러지는 편인데, 정말 바이킹스러움만 조금 더해졌다면 소시적의 Satyricon 생각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좋다는 얘기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영광의 이름들에 비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즐겁게 들었다. 그렇지만 되게도 안 팔리는지 2021년에 100장 한정으로 찍었다는 앨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으니 좀 안타깝다. 이 글을 보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잘 팔렸으면 좋겠다.

[Signal Rex, 2021]

Unreqvited “A Pathway to the Moon”

Blackgaze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적어도 Blackgaze의 가장 잘 나가는 밴드들 중 하나인 Unreqvited의 2025년 신작. Prophecy라는 레이블이 원래 이런 음악을 다루는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최근에 Blackgaze 스타일에 있어 최고의 레이블을 꼽는다면 단연 Prophecy가 가장 유력한 후보에 있을 것이다. Blackgaze 밴드로 가장 유명한 밴드들 가운데 Prophecy에서 앨범 한 장 안 내 본 밴드가 얼마나 될 것이나 하면 Deafheaven을 위시한 미국의 힙하다 못해 더 이상은 blackgaze라고 분류하기도 뭣해진 이들을 제외하면 별로 떠오르는 사례가 없기도 하고.

“A Pathway to the Moon”은 이 장르의 떠오르는(아니 돈만 못 벌었지 이미 떠오를 대로 떠오른) 락스타의 현재까지의 앨범들 중 가장 대중적이고 블랙메탈의 기운이 약한 앨범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진폭이 크지는 않아도 Unreqvited의 여태까지의 앨범들은 조금씩은 스타일을 달리해 왔지만 어쨌든 블랙메탈의 색깔이 포스트록보다는 좀 더 짙은 편이었다면, 이제는 이 밴드를 포스트록 성향이 있는 블랙메탈 밴드인지, 아니면 포스트록 밴드가 블랙메탈의 요소를 받아들인 것인지 모호해졌다. blackgaze 밴드가 블랙메탈과 포스트록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전의 앨범들이 두 가지가 혼재된 양상의 음악을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그 두 가지는 슬슬 분리되어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한다. ‘Antimatter’처럼 Ihsahn과 Alcest가 섞이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곡이 밴드의 색채를 대변한다면 과장인 부분이 있겠지만 이전의 Unreqvited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이 앨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블랙메탈이 아닌 부분에 있다. ‘Starforger’나 ‘Departure: Everlasting Dream’의 파르라니 빛나는 듯한 신서사이저 앰비언트는 다른 블랙메탈 밴드가 보여주기 어려운 무엇일 것이다. 솔직히 ‘Departure: Everlasting Dream’의 어느 부분에서는 Enya 생각이 났다. 지금 한국인이 좋아하는 블랙메탈을 꼽는다면 이 앨범을 추천할 것이다. 아 그런데 그런 걸 꼽지도 않겠지만 꼽아도 나한테 물어보질 않겠구나….

[Prophecy, 2025]

Frelser “Afgrundsprofeti”

작년에 결성됐다는 덴마크 블랙메탈 밴드의 데뷔작. 덴마크 블랙메탈이라면 Afsky나 Angantyr, Blodarv, Holmgang 정도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힙한 귀를 자임하는 이라면 Myrkur 정도를 덧붙일 수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이 장르에서 덴마크가 딱히 퀄리티를 보장하는 나라는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시선일 것이므로 이런 설명만으로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래도 Vendetta Records의 발매작들을 보면 QC는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므로 이 쯤 되면 레이블의 안목만을 믿을 뿐이다.

그렇게 나온 앨범은 2025년 발매작으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전형에 다가간 편이다. 근래 접했던 덴마크 블랙메탈 밴드들이 펑크풍이 강했던 걸 생각하면(그것도 따지면 Darkthrone 때문이랄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이나 Mayhem의 초창기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밴드는 흔치 않은데, 특히나 ‘Knivene hvisker’ 같은 곡은 – 음질을 제외하면 – 보컬 스타일도 그렇고 Mayhem 1집에 실리더라도 그리 이질적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Afgrundsprofeti’과 ‘Elsker du stadig din næste?’에 등장하는 첼로 연주는 좀 이색적으로 들리지만, 완급조절을 넘어서 아예 중간중간 둠 메탈 패시지를 박아넣는 밴드의 작풍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긴 저 ‘Elsker du stadig din næste?’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에 좀 더 했어도 됐겠다 싶긴 하지만.

[Vendetta, 2025]

Hammers Rule “Spontaneous Human Combustion”

간만에 Metal Enterprises 발매작. 어쩌다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개똥같은 레이블 발매작들 전작 컬렉션이 나름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개똥같은 레이블에서 나온 개똥같은 밴드의 개똥만도 못해보이는 앨범이 150유로를 호가하는 덕분에 포기한 지 꽤 오래되었다. 훗날 어느 미친자가 재발매한다면 구해볼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재발매하기엔 너무도 대단한 물건이 많은지라 이 레이블의 발매작들이 다시 빛볼 일은 정말 웬만해서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말하다 보니 내 얼굴에 침뱉기 같은 느낌이므로 일단 넘어가고.

그래도 이 레이블의 카탈로그가 그런 사례들로만 꽉 차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메탈이 아닌 펑크 발매작들만 보면 놀랍도록 멀쩡한 레이블이고(Böhse Onkelz가 뭐 약점잡힌 게 있나 싶은 수준) 메탈만 보더라도 Black Virgin이나 Expect No Mercy 같은 멀쩡한 밴드들이 있었으며 레이블이 레이블인만큼 기대치를 좀 많이 낮춰놓고 본다면 이 Hammers Rule의 2집도 비교적 모범사례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스타일을 말하자면 템포 좀 낮춘 Iron Maiden의 기운이 살짝 엿보이는 류의 헤비메탈인데, 데뷔작과 동일인물인지 모르겠으나 훨씬 앵앵대는 목소리의 보컬이 무척 거슬리지만 기대 이상으로 서사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Buried Alive’나 그래도 미국 밴드라고 듣다 보면 헤어메탈 류의 친숙함이 엿보이는 ‘Spontaneous Human Combustion’ 같은 곡은 이 레이블이 남긴 최고의 메탈 트랙…의 후보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미쌍관이라고 앨범의 처음과 마지막을 레이블 색깔에 맞게 빅재미를 노리는 듯한 곡들로 채워넣는 모습을 마주하면 청자는 다시금 정신을 다잡게 된다. 아 멀쩡한 줄 알았는데 그래 돈 주고 살 만한 물건은 역시 아니구나. 그러니까 오늘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Metal Enterprises, 1987]

Supertramp “Crime of the Century”

지난 6일 Rick Davies가 돌아가셨다기에 간만에. 사실 Supertramp의 좋았던 곡이 있었지만 이 밴드를 좋아했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좀 애매했다. Genesis에 뒤질세라 인상적인 심포닉 프로그를 보여준 데뷔작 이후에 밴드가 그만큼 프로그레시브한 앨범을 내놓은 적은 없었고, 프로그레시브 레떼르를 아예 떼버리긴 좀 그렇다 하더라도 이후의 메가 히트가 그 프로그한 맛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공룡 프로그 밴드들이 이미 망했거나 한창 망해가고 있던 1979년에 “Breakfast in America”를 터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Supertramp라는 밴드의 핵심은 적당히 프로그한 맛도 있는 고급스러운 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Breakfast in America”는 취향상 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이들을 위한 한 장이라면 아마 이 3집이 아닐까? 프로그레시브 록다운 면모가 엿보이긴 하지만 어느 하나 팝적이지 않은 곡이 없고, 이후 밴드를 상징하는 Rick Davies의 팔세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Hide in Your Shell’ 같은 오케스트럴하면서도 프로그한 발라드가 있지만 ‘Dreamer’ 같은 본격 팝송이 있고, 라이브 떼창에도 적절해 보이는 코러스와 멋진 토크박스 연주를 선보이는 ‘Bloody Well Right’가 있다. 이게 무슨 프로그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슬슬 팝송 좀 들어보겠다고 이것저것 찾아다니던 어느 돈없는 학생에게 이렇게 고급진 대중가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 준 앨범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Supertramp가 최애 밴드였던 적은 없지만 이 앨범은 인생디스크 중의 한 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앨범과 Alan Parson를 듣고 나서 그 돈없는 학생의 인생은 (그 전이라고 꼭 괜찮은 건 아니긴 했지만) 뭔가 급격하게 꼬여가기 시작했으나 말이다.

[A&M,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