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yrium “A Wintersunset…”

지금은 뭐 그럴 깡도 객기도 없으며 내 밥벌이하기만도 바쁠 노릇이지만 한창 이것저것 모은다고 발품 팔며 돌아다니면서 생각하곤 했던 진로의 하나는 크진 않더라도 카탈로그 견실한 메탈 레이블 하나 차려서 음반도 모으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하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나름의 롤모델로 삼았던 곳이 Prophecy Productions였다. 뭐 블랙이다 둠이다 고딕이다 하나로 스타일을 정하지 않고 그네들의 표현을 빌면 ‘eerie emotional music’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어떤 장르를 내놓던 일정 수준 이상의 앨범을 내놓곤 했으니 이만큼 퀄리티 컨트롤 확실한 레이블도 그 필드에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간혹 소속 밴드들에 레이블 사장이 자기 취향을 좀 강권하는 사례도 있기 마련인데, 이 레이블을 굴리는 Martin Koller는 간혹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외에는 게스트로 등장하는 것도 없었으니 이래저래 메탈장사를 꿈꾸던 어느 천둥벌거숭이가 사표로 삼기 참 좋았다.

생각해 보면 이 Empyrium의 데뷔작이 그런 Prophecy의 스타일을 제대로 대변하는 앨범이 아닌가 싶다. Prophecy 카탈로그 1번으로 나온 이 앨범은 한창 블랙메탈이 힘을 더해가던 1996년에 둠-데스이긴 하지만 그 시절 여느 앨범보다도 훨씬 서정에 치우친 음악을 담고 있었고, 묵직하지만 자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리버브 걸린 리프와 어쿠스틱 패시지, 그 뒤에 은은하게 흩뿌려진 신서사이저가 그려내는 풍경은 노르웨이의 불한당들이 펼치는 북구의 칼바람에 비한다면 – 안온할 것까진 아니지만 – 비교적 따뜻했던 어느 한 철에 있었을 법한 충분히 평화롭고 낭만적인 하루에 가까웠다. 가끔 블랙메탈식 래스핑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자연의 이따금 보여주는 엄혹함(특히 ‘Under Dreamskies’)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준이야 어쨌건 한창 악에 받힌 것처럼 보이는 음악들을 내놓던 다른 레이블들에서 나올 만한 음악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도 멋진 멜로디와 분위기만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으며, 덕분에 그 악에 받힌 블랙메탈들을 한창 찾아듣는다는 이들에게도 Empyrium의 음악이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음악 듣던 사람들이 시간 될 때 만나서 약간의 스몰타운 토크와 서로의 취향(과 음반)들을 나누면서 더욱 추억을 쌓아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앨범에 가진 추억은 이 음악이 떠올려 주는 어느 가을 내지는 초겨울의 정경이 아니라 그렇게 복작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하루에 가까울 것이다.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Prophecy, 1996]

Welkin “武勇 / Emblems of Valour”

싱가포르 원맨 블랙메탈 밴드(하지만 중국인으로서 자긍심 넘치는 한족이라 하니 중국 밴드라고 해도 좋을지도)의 두 번째 앨범…이라고 하나 나로서는 이 앨범으로 밴드를 처음 접한다.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밴드의 소개를 보면 유, 관, 장 3형제를 기리며 만든 앨범이라고 한다. 또 있는지는 모르지만 드디어 삼국지 컨셉트 블랙메탈 앨범도 하나 알게 된 셈이다.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삼국지가 생소할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찌기 삼국지와 블랙메탈을 연관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라 이런 결합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 삼국지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먼저 생각나는 Hasthur라는 가명을 달고 삼국지 블랙메탈을 연주한다는 것도 조금은 웃기다는 생각도 앞선다.

그래도 음악은 나쁘지 않다. 사실 동양풍의 멜로디가 실린 블랙메탈이라면 Sigh를 필두로 한 많은 밴드들을 통해 이미 접한 바 있고, 동양풍의 멜로디와 생각보다 파워 코드를 별로 안 쓴다는 점만 빼면 트윈 기타를 중심으로 약간의 키보드를 더한 멜로딕 블랙메탈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러니 결국 이 앨범에 대한 호오는, 때로는 짙은 뽕끼까지 느껴지는 저 동양풍 멜로디를 감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The Flying General’의 블랙메탈보다는 차라리 파워메탈에 어울려 보이는 도입부 솔로잉이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이 앨범을 굳이 끝까지 들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Sabaton도 듣고 Graveland도 듣는데 이 음악을 유치하다고 피한다면 그건 좀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꽤 재미있게 들었고, 내용이 내용인지라 곡명만 보더라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니 나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며, 10년 뒤의 중국 메탈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Pest Productions, 2023]

Auld Ridge “For Death and Glory, to the Gods I Cry”

이 밴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O.W.G.A라는 영국 뮤지션의 원맨 프로젝트지만 활동하는 곳은 프랑스라고 하고, 처음에는 포크로 시작했다가 2020년의 “Ascetic Invocation”부터 본격적으로 블랙메탈을 연주했다고 한다. 저 웃기는 이름의 레이블은 뭐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O.W.G.A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니 아무래도 자기 앨범 내려고 구멍가게만한 레이블을 하나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없어보이는 레이블과 나무꾼도 아니고 21세기에 이게 뭔가 싶은 앨범 커버를 생각하면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Garm과도 닮은 구석이 있는 클린 보컬이 어우러진 멜로딕한 블랙메탈… 인지라 결국 “Bergtatt” 시절의 Ulver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Auld Ridge가 Ulver보다는 좀 더 화려하고 변화가 심한 리프를 내세우는 편이고, 스래쉬한 면도 있는지라 Ulver보다는 달리는 맛이 있다. ‘Fyrir dauða ok dýrð við enska brúna’ 같은 곡이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편인데, 무엇보다 원맨 밴드치고 무척이나 안정된 연주가 이 밴드를 수많은 골방 블랙메탈 밴드와는 다른 경지로 올려놓는다. 과하지 않게 신서사이저와 어쿠스틱 패시지를 등장시키는 모습(특히 ‘Henmaen, Gothur Hanes Etta Gweleth’)도 인상적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Garm스러운 클린 보컬을 뺀다면 사실 Ulver보다는 Windir와 비교하는 게 맞아 보인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이제야 이 밴드를 알게 된 게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멜로디가 좀 뽕끼가 강하다고 느끼거나 중간중간 감출 수 없는 싼티나는 건반에 질색할 이도 없진 않겠지만 멋진 앨범이다.

[The Hermetic Order of Ytene, 2024]

Delirium(NED) “Zzooouhh”

Delirium은 정규반이라고는 1990년에 이 한 장만을 내고 망해버린 네덜란드 둠메탈 밴드이다. Sempiternal Deathreign이 역사적인(하지만 별로 알아주는 이는 없는) 데뷔작을 낸 게 1989년이었으니 이 앨범이라고 데스메탈의 기운을 걷어낸 둠 메탈일 리는 없겠다. 생각해 보면 음악만이 아니라 멤버들 본인들도 서로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년 다이나모 페스티벌이 열리는 나라였다지만 그 시절 네덜란드에 그 정도로 묵직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앨범을 내기는 했는데 그 만큼 잘 안 팔리던 밴드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은 Sempiternal Deathreign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Sempiternal Deathreign이 스래쉬메탈의 면모를 짙게 보이던 시절의 데스메탈이 Black Sabbath의 영향 하에 둠 메탈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을 했다면, Delirium의 음악은 Celtic Frost의 스타일이 둠 메탈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려주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케스트럴한 면모는 없으니 굳이 짚는다면 “To Mega Therion”일 텐데, 특히나 ‘Bitch’나 ‘Amputation’ 같은 곡에서의 리프나 보컬은 Celtic Frost의 오마주에 가깝다. 말하자면 Celtic Frost를 좀 더 데스메탈스럽게 만든 스타일의 리프를 이용해서 연주하는 둠 메탈(그런 면에서는 Asphyx와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Mark Hanout의 보컬도 Martin van Drunen 스타일이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내 여유있는 템포로 흘러가는 앨범은 아니고, 소시적의 Pestilence처럼 스트레이트한 구석도 보여주는 ‘Menace Unseen’ 같은 곡도 있고, 전반적으로 꽤 역동적인 구성을 보여주는지라 지루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기타만 좀 더 묵직하게 녹음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Memento Mori의 재발매반이 이 앨범뿐만 아니라 밴드의 모든 데모까지 망라하고 있는만큼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오리지널보다는 그쪽을 찾아보는 편이 좋을지도.

* 수정: 이 앨범을 낸 Prophecy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Prophecy 레이블이 아니더라. 여태까지 완전 잘못 알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

[Prophecy, 1990]

아카이브 취향

‘아카이브’를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그 뜻은 ‘기록 보관소’라고 나온다(옥스포드 영영사전 기준). 그러니까 ‘아카이브 취향’이라고 하면 나처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 두곤 하는 기질의 사람들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자!’ 하고 자신의 취향과 경향을 반영하여 자신만의 도서관 내지는 박물관을 만드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책 서두부터 푸코와 아날 학파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이 프랑스 역사가(이쯤 되면 프랑스는 어쩔 수 없나보다하는 생각도 든다)가 그런 의미로 아카이브란 말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이 고명한 학자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카이브는 그러니까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자신이 직시하려는 ‘역사적 진실'(이런 표현이 그리 적절치는 않겠다만)에 이르기 위해 과거의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적절한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저 푸코의 향기는 이러한 ‘취사선택’이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서부터 깃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승자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얘기와도 연결되는 셈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고, 결국 역사가는 시시해 보이기까지 할, 아카이브의 한 대목을 받아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어떠한 진실에 이른다. 어떤 갈림길에서 흔히 부유하곤 하는 지식인의 특성이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진실마저 사실은 편파적일 수 있으므로, 저자는 역사가 결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라, 아카이브 속에 가라앉아 있는 역사가 그렇게 가라앉은 이유와 경로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결국 현재와 과거와의 소통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민다. 그러니까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을 걸어두긴 했지만 이건 저자가 역사학도에게 제시하는 ‘역사학도로서의 올바른 연구자세’ 같은 셈이다. 덕분에 중간중간 저자의 한창 시절 열람실에서 지리하게 사료들을 필사할 때의 날 선 긴장감도 드러나고, 그러다가 ‘아카이브의 선물’이라고 이름붙인 소기의 성과에 이르렀을 때의 성취감도 엿보인다.

그러니까 요새의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라면 아카이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도 좋겠지만, 당신의 소중한 자녀의 공부는 이런 자세로! 같은 얘기를 아날 학파스럽게 풀어낸 책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그렇다고 출판사가 이 책에 차마 ‘역사학의 거두 아를레트 파르주가 제시하는 공부 솔루션’ 같은 홍보문구를 붙일 수는 없을테니 좀 아쉽다. 붙였다면 어떤 의미로든 벌어지는 광경이 기가 막혔을 것이다. 결론이 왜 이러냐면 쓰는 사람이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다.

[아를레트 파르주 저, 김정아 역,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