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Radio Silence “This is Radio Silence”

알고 보면 이런저런 음악들을 꽤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있지만 어쨌든 Naevus의 활동으로 가장 잘 알려진(그리고 사실 Naevus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는) Ben McLees가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 하지만 나야 최근에 알았지만 2006년부터 시작했고 알 만한 사람들은 꽤 알고 있다고 하니 Ben McLees의 또 다른 활동의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프로젝트의 음악은 Naevus의 네오포크와는 많이 다르다. 일렉트로닉의 비중이 강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고쓰풍의 분위기를 머금은 EBM과 고딕 록, 포스트펑크, Nine Inch Nails풍 인더스트리얼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스타일인데, 애초에 일관된 장르를 표방하는 프로젝트는 아닌 만큼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내놓은 EP와 싱글들을 망라한 이 컴필레이션이 이들을 접하기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도? 어느 앨범을 들어도 저 ‘고쓰풍 분위기’ 말고는 일관성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스타일을 내세우건 이들이 수려한 멜로디감각과 세련된 분위기를 낼 줄 안다는 것이다. ‘We Know It’s Over’ 같은 과장 좀 많이 섞으면 The Smiths식 브릿 팝의 흑화된 모습이 드러나는 곡이나, 크라우트록(이라기보다는 Kraftwerk)의 그림자 역력한 ‘Frozen Frames’, 의외일 정도로 묵직한(거의 스래쉬메탈 수준) 기타가 이끌어 나가는 ‘Disappointed’ 모두 과장 섞으면 Depeche Mode에 비견할 멜로디를 만나볼 수 있다. 솔직히 이 쯤 되면 Naevus 얼른 접고 This is Radio Silence에 집중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맘에 들어서 하는 얘기다.

[Disconnected Music, 2023]

Viridanse “Hansel, Gretel E La Strega Cannibale”

1983년에 결성되어 두 장의 앨범만을 내놓았지만 이탈리아 록 음악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밴드…라는데, 심포닉 프로그 덕분에 나 이탈리아 음악 좀 열심히 찾아 듣는다고 자처하는 이들을 만난 경험은 꽤 됐지만 그러는 와중에 이 밴드 얘기는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저런 소갯말에 의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앨범명만 봐서는 아무래도 헨젤과 그레텔의 잔혹동화 버전 음악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이 2017년 앨범에 대한 시각은 꽤 삐딱하게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음반 좀 나름 찾아다녔다는 사람 치고 과장광고에 속아 집어든 똥반을 앞에 두고 본전 생각에 사무쳤던 경험 한 번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게 앨범을 플레이하고 나면 왜 그 동안 내가 이 밴드 이름을 못 들어봤는가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건반에서 살짝 Black Widow 출신 밴드들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스푸키한 기운이 느껴지는 외에는 전혀 프로그레시브와는 상관없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적당히 사이키한 기운이 묻어나는 묵직한 류의 포스트록이라고 해야 할 텐데, 1983년에 결성되었으니 그 시절 Killing Joke스러운 뉴 웨이브를 연주하다가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그게 포스트록의 컨벤션으로 이어졌다…라는 얘기가 잘 어울려 보인다. 그나마 ‘Alle Montagne Dekka Follia'(영어로 하면 ‘At the Mountains of Madness’란다. Lovecraft의 그 소설 맞다)의 리프에서 하드 프로그의 기운을 찾아볼 수 있지만, 포스트록 앨범 치고 이 정도의 트리키함 없는 앨범이 있으려나 싶다. 물론 앞서 말했던 헨젤과 그레텔 얘기도 그저 그림 형제풍의 뒤틀린 분위기를 밴드가 꽤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정도 외에는 밴드와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광인’ 스타일의 보컬을 나름대로 열심히 표현해 내는 Gianluca Piscitello의 보컬이 연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분전하고 있고, ‘Aria’ 처럼 Goblin의 기운도 느껴지는 곡도 있으니 어쨌든 나름의 매력은 있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평은 의외로 꽤 좋은 걸 보면 그냥 나 같은 메탈바보가 들었던 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Danze Moderne, 2017]

Joey Tempest “A Place to Call Home”

“Prisoners in Paradise” 이후 꽤 오래 문을 닫은 Europe을 뒤로 하고 Joey Tempest가 내놓은 첫 솔로작. 하지만 발매 시점 인터뷰부터 Europe 시절과는 다른 음악을 하고 싶고 Van Morrison이나 Bob Dylan을 많이 들었다는 충격발언을 내놓아 많은 이들을 긴장하게 했다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Europe 시절의 호쾌함과는 거리가 있는 음악을 선보여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했다더라…는 게 익히 알려진 얘기다.

뭐 그래도 그런 세평에 비해서는 음악은 꽤나 괜찮다. 이 음악을 듣고 Van Morrison이나 Bob Dylan을 떠올릴 수는 없겠지만(일단 둘 다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분도 아니고) Joey Tempest가 뛰어난 송라이터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는 수려한 멜로딕 록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Europe 시절과는 달리 어디 가서 하드록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랑말랑해졌고, 괜히 Bob Dylan을 언급한 게 아니라는 듯 꽤나 자주 보여주는 미국적인 스타일은 확실히 Joey Tempest의 이름을 생각하면 낯선 모습이긴 하다. ‘We Come Alive’ 같은 곡은 과장 좀 섞으면 John Mellencamp같은 구석이 엿보일 정도? 말하자면 Europe 활동하느라 못 만들어봤던 스타일의 곡들을 대거 손보이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긴 ‘Don’t go Changin’ on Me’ 같은 곡을 Europe의 이름으로 발표했다간 당장 Kee Marcelo를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딱히 처지는 곡 없이 매끈한 멜로디와 노래를 보여주는 걸 보면 확실한 역량의 뮤지션이었던 건 맞다. 그러니까 1995년에 감히 이런 앨범을 Polydor에서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담없이 틀어놓기에 이만한 앨범도 흔치만은 않다.

[Polydor, 1995]

Marillion “Market Square Heroes”

Marillion의 역사적인 데뷔 싱글. 암만 Marillion이라도 싱글까지 어떻게 모으냐… 싶기는 한데, 어쨌든 이 싱글의 수록곡들은 정규반에 수록되지 않았던 곡들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Twelfth Night보다도 데뷔가 늦었던 이 밴드를 네오프로그의 대표주자로 만들어 준 건 이 될성부른 시작점이 무척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하드록 기운이 그래도 좀 있었던 덕분이었는지 네오프로그 싱글답지 않게 Kerrang!의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트리비아도 있으니 나름의 역사적 가치…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네오프로그 얘기하면서 역사적 가치를 얘기하는 자체가 좀 무리일 순 있겠다.

밴드의 일반적인 스타일에 비해서는 확실히 차트를 의식했구나 싶은 직선적인 연주와 아마도 대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Fish스타일로 묘사했을 가사가 의외의 화끈함을 선사하지만 그래도 이 싱글의 핵심은 B사이드의 ‘Grendel’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12인치 싱글을 꽉 채운 17분 40초의 Genesis를 여실히 의식한 연극적인 연주는 밴드 본인들은 나름 불만이 있었던 것 같고(밴드는 1983년 이 후 이 곡을 라이브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사실 그 정도로 과중하게 만들어 놓을 것까지도 없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Grendel’이 밴드의 가장 인기 많은 곡들 중 하나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런 걸 만들어 놓고 정작 정규 데뷔작에는 싹 다 빼 버리는 모습도 Marillion이 처음부터 얼마나 야심찬 행보를 보여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밴드의 초창기 싱글들은 “The Singles ’82-’88” 박스셋으로 다 구제되었으므로 굳이 이 싱글을 사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면 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심플한 A사이드의 ‘Market Square Heroes’와 ‘Three Boats Down From The Candy’에 이어 이제 각잡고 들으라는 듯 ‘Grendel’을 B사이드에 실어놓은 완결성을 봐서라도 이 싱글 한 장 정도 갖춰놓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상태 멀쩡한 판을 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럭저럭한 물건은 어쨌든 20유로 이하에서 구할 수 있으므로 싱글로서 가성비도 충분할 것이다. 하긴 애초에 25분 넘어가는 싱글이란 게 그리 흔치만은 않을거다.

[EMI, 1982]

Panopticon “Kentucky”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이름을 가져오긴 했지만 정작 파놉티콘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음악을 연주하는 이 테네시 출신 블랙메탈 밴드가 데뷔하던 2008년만 하더라도 이들이 소위 ‘cascadian’이라는 나름 새로운(그렇지만 정말로 금방 사그라든) 블랙메탈 조류를 이끄는 사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포스트록식 지글지글 사운드는 블랙메탈에서 그리 보기 드문 모습은 애초에 아니었으니, ‘cascadian’은 새로운 조류도 뭣도 아니고 그냥 Darkthrone에서 시작된 어떤 스타일을 포스트록에서 흔히 써먹곤 하는 스케일로 리버브 자욱하게 걸고 연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여지도 다분했을 것이다. 꼬장꼬장하게 따진다면 ‘atmospheric black metal’ 외에 별도의 용어를 만들어 줄 필요는 전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앨범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얘기들이 “Social Disservices”까지의 대체적인 경향이었다면 “Kentucky”는 ‘cascadian’이 그렇게 공허한 얘기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과, 이 밴드가 동시대의 다른 블랙메탈 밴드들과 같이 뭉뚱그려질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그리고 이 밴드가 블랙메탈 밴드라고 불리는 것에 별 욕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단 블랙메탈 앨범 제목이 켄터키라는 것부터가 나 같은 선입견 짙은 청자에게는 조금 당혹스럽고, 앨범명에 걸맞게 그 어느 때보다도 짙어진 컨트리와 블루그래스의 향내는(아예 앨범의 절반은 컨트리 송이다) 이것이 유럽식 포크 블랙에 대한 미국의 대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생각해 보면 90년대 초반부터 북미에 블랙메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Absu나 Blasphemy 같은 걸물들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지역색을 드러냈던 사례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점은 이 밴드가 앨범에서 풀어놓는 이야기가 그리 가볍지 않은 얘기고(미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다루고 있는만큼) 그런 만큼 비장한 분위기도 지울 수 없지만 피들이나 밴조를 이용한 흥겨운 블루그래스, 샘플링과 함께 등장하는 프로테스트 포크가 신기할 정도로 블랙메탈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Killing the Giants as They Sleep’에서 Jean Ritchie의 커버곡인 ‘Black Waters’로 넘어가는 모습이 단적인 사례일 것이고, 이런 음악은 모르긴 몰라도 미국 밴드가 아니면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 당혹스러운 흥겨움을 즐길 수 있다면 무척 멋진 앨범일 것이고, 아니라면 잘 나가다가 자꾸 이상한 컨트리로 분위기 깨뜨리는 괴상한 앨범일 것이다. 내 생각은 전자에 가깝다…만, 그래도 커버는 지금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거 가뭄 왔을 때 적당히 말라버린 소양강 아닌가?

[Pagan Flame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