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lij Kuprij “Revenge”

Kenziner 얘기 나온 김에 이것도 간만에. 1999년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런 구리구리한 네오클래시컬 라이센스라면 Artension의 사례가 있었고, “Phoenix Rising”이 나쁜 앨범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든 파트가 나름 균형을 이룬 Kenziner에 비해 중심이 키보드에 확 기울었던 Artension이 더 구리구리한 건 어쩔 수 없었을지도? 그러니 어찌 보면 Vitalij Kuprij의 솔로앨범과는 달리 “Phoenix Rising” 이후의 Artension의 앨범이 라이센스되지 못한 데는 이유가 분명히 있는 셈이다. 뭐 이거는 Artension 앨범 얘기도 아니니 각설하고,

사실 그런 구리구리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솔로앨범들을 포함해서 Vitalij Kuprij의 커리어를 관통하는 내용이기도 한데, 그래도 그런 면이 가장 덜한 앨범이라면 아무래도 이 “Revenge”가 아닐까 싶다. 일단 Vitalij가 남긴 앨범들 중에서는 그래도 덜 클래시컬한 편이기도 하고, 물론 키보드가 가장 날아다니는 스타일이지만 다른 멤버들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정도로 이름난 이들을 대거 모아서인지, 이만큼 Vitalij Kuprij의 건반이 뒤로 물러선 모습을 보여주는 앨범은 보기 드물다. Vitalij Kuprij라는 뮤지션을 아는 이라면 꽤나 흥미롭게 다가올 구석이 많은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뮤지션 본연의 스타일과 다르다는 얘기는 아닌데다, 커리어 내내 보컬곡을 만들어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걸출한 게스트들에도 불구하고 들쭉날쭉한 보컬과 비교적 단조로운 전개가 때로는 껄끄럽고, 결국 앨범의 백미는 ‘Classic War’ 중반부의 이런 건 어떻게 치나 싶은 무지막지한 인터메조가 아닌가 싶다. 하긴 결국은 그런 게 Vitalij Kuprij의 매력이렷다.

[Avalon, 2005]

Kenziner “The Prophecies”

몰랐는데 이 밴드에서 화려한 연주를 들려줬던 Jarno Keskinen이 사망했다기에 간만에. 벌써 몇 달 지난 일이라 이제 얘기하는 것도 그렇지만 생각보다 다작은 아니었던 이 뮤지션이 남겼던 작품들을 내가 생각보다 꽤 갖고 있더라. 정작 음악은 잘 기억이 안 나서 좀 민망하지만 늦은대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각설하고.

metal-archives를 보면 그래도 너덧 밴드들에서 활동한 이력이 보이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활동은 Kenziner와 Virtuocity였고 그 중에서도 본진을 하나 고르자면 이 Kenziner였을 것이다. 그런데 1999년이면 이미 국내에서 록 좀 들었다는 사람이라면 Yngwie 이름만 나와도 음악 안 바뀐다는 얘기가 공식처럼 따라나오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바꿔 말하면 네오클래시컬은 이미 장사가 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용케 한국 라이센스까지 달성한 걸 보면 이미 나름대로 기대를 모으고 있던 밴드였을 것이다. Sonata Arctica의 Mikko Härkin과 Zanister의 Brian Harris가 합류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화려해진 이름값을 생각하면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앨범을 관통하는 B급의 기운은 신기할 정도인데, 애초에 1999년에 네오클래시컬 메탈 들으면서 B급은 안 듣는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테니 문제삼을 얘기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적당히 프로그하면서도 적당한 스피드와 분위기(‘The Razor’s Edge’), 때로는 AOR마냥 말랑한 멜로디(‘Live Forever’), 동시대 여느 핀란드 밴드들보다도 더 화끈했던 보컬 등 장르의 미덕들을 두루 가지고 있으니 라이센스반으로 샀다면 본전 뽑기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Symphony X 레벨을 기대한 사람은(아마 거의 없긴 할 텐데) 만족하기 좀 어렵긴 하겠지만.

[Limb Music, 1999]

Empyrium “A Wintersunset…”

지금은 뭐 그럴 깡도 객기도 없으며 내 밥벌이하기만도 바쁠 노릇이지만 한창 이것저것 모은다고 발품 팔며 돌아다니면서 생각하곤 했던 진로의 하나는 크진 않더라도 카탈로그 견실한 메탈 레이블 하나 차려서 음반도 모으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하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나름의 롤모델로 삼았던 곳이 Prophecy Productions였다. 뭐 블랙이다 둠이다 고딕이다 하나로 스타일을 정하지 않고 그네들의 표현을 빌면 ‘eerie emotional music’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어떤 장르를 내놓던 일정 수준 이상의 앨범을 내놓곤 했으니 이만큼 퀄리티 컨트롤 확실한 레이블도 그 필드에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간혹 소속 밴드들에 레이블 사장이 자기 취향을 좀 강권하는 사례도 있기 마련인데, 이 레이블을 굴리는 Martin Koller는 간혹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외에는 게스트로 등장하는 것도 없었으니 이래저래 메탈장사를 꿈꾸던 어느 천둥벌거숭이가 사표로 삼기 참 좋았다.

생각해 보면 이 Empyrium의 데뷔작이 그런 Prophecy의 스타일을 제대로 대변하는 앨범이 아닌가 싶다. Prophecy 카탈로그 1번으로 나온 이 앨범은 한창 블랙메탈이 힘을 더해가던 1996년에 둠-데스이긴 하지만 그 시절 여느 앨범보다도 훨씬 서정에 치우친 음악을 담고 있었고, 묵직하지만 자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리버브 걸린 리프와 어쿠스틱 패시지, 그 뒤에 은은하게 흩뿌려진 신서사이저가 그려내는 풍경은 노르웨이의 불한당들이 펼치는 북구의 칼바람에 비한다면 – 안온할 것까진 아니지만 – 비교적 따뜻했던 어느 한 철에 있었을 법한 충분히 평화롭고 낭만적인 하루에 가까웠다. 가끔 블랙메탈식 래스핑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자연의 이따금 보여주는 엄혹함(특히 ‘Under Dreamskies’)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준이야 어쨌건 한창 악에 받힌 것처럼 보이는 음악들을 내놓던 다른 레이블들에서 나올 만한 음악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도 멋진 멜로디와 분위기만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으며, 덕분에 그 악에 받힌 블랙메탈들을 한창 찾아듣는다는 이들에게도 Empyrium의 음악이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음악 듣던 사람들이 시간 될 때 만나서 약간의 스몰타운 토크와 서로의 취향(과 음반)들을 나누면서 더욱 추억을 쌓아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앨범에 가진 추억은 이 음악이 떠올려 주는 어느 가을 내지는 초겨울의 정경이 아니라 그렇게 복작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하루에 가까울 것이다.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Prophecy, 1996]

Welkin “武勇 / Emblems of Valour”

싱가포르 원맨 블랙메탈 밴드(하지만 중국인으로서 자긍심 넘치는 한족이라 하니 중국 밴드라고 해도 좋을지도)의 두 번째 앨범…이라고 하나 나로서는 이 앨범으로 밴드를 처음 접한다.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밴드의 소개를 보면 유, 관, 장 3형제를 기리며 만든 앨범이라고 한다. 또 있는지는 모르지만 드디어 삼국지 컨셉트 블랙메탈 앨범도 하나 알게 된 셈이다.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삼국지가 생소할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찌기 삼국지와 블랙메탈을 연관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라 이런 결합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 삼국지보다는 러브크래프트가 먼저 생각나는 Hasthur라는 가명을 달고 삼국지 블랙메탈을 연주한다는 것도 조금은 웃기다는 생각도 앞선다.

그래도 음악은 나쁘지 않다. 사실 동양풍의 멜로디가 실린 블랙메탈이라면 Sigh를 필두로 한 많은 밴드들을 통해 이미 접한 바 있고, 동양풍의 멜로디와 생각보다 파워 코드를 별로 안 쓴다는 점만 빼면 트윈 기타를 중심으로 약간의 키보드를 더한 멜로딕 블랙메탈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러니 결국 이 앨범에 대한 호오는, 때로는 짙은 뽕끼까지 느껴지는 저 동양풍 멜로디를 감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The Flying General’의 블랙메탈보다는 차라리 파워메탈에 어울려 보이는 도입부 솔로잉이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이 앨범을 굳이 끝까지 들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Sabaton도 듣고 Graveland도 듣는데 이 음악을 유치하다고 피한다면 그건 좀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꽤 재미있게 들었고, 내용이 내용인지라 곡명만 보더라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니 나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며, 10년 뒤의 중국 메탈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Pest Productions, 2023]

Auld Ridge “For Death and Glory, to the Gods I Cry”

이 밴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O.W.G.A라는 영국 뮤지션의 원맨 프로젝트지만 활동하는 곳은 프랑스라고 하고, 처음에는 포크로 시작했다가 2020년의 “Ascetic Invocation”부터 본격적으로 블랙메탈을 연주했다고 한다. 저 웃기는 이름의 레이블은 뭐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O.W.G.A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니 아무래도 자기 앨범 내려고 구멍가게만한 레이블을 하나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없어보이는 레이블과 나무꾼도 아니고 21세기에 이게 뭔가 싶은 앨범 커버를 생각하면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Garm과도 닮은 구석이 있는 클린 보컬이 어우러진 멜로딕한 블랙메탈… 인지라 결국 “Bergtatt” 시절의 Ulver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Auld Ridge가 Ulver보다는 좀 더 화려하고 변화가 심한 리프를 내세우는 편이고, 스래쉬한 면도 있는지라 Ulver보다는 달리는 맛이 있다. ‘Fyrir dauða ok dýrð við enska brúna’ 같은 곡이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편인데, 무엇보다 원맨 밴드치고 무척이나 안정된 연주가 이 밴드를 수많은 골방 블랙메탈 밴드와는 다른 경지로 올려놓는다. 과하지 않게 신서사이저와 어쿠스틱 패시지를 등장시키는 모습(특히 ‘Henmaen, Gothur Hanes Etta Gweleth’)도 인상적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Garm스러운 클린 보컬을 뺀다면 사실 Ulver보다는 Windir와 비교하는 게 맞아 보인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이제야 이 밴드를 알게 된 게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멜로디가 좀 뽕끼가 강하다고 느끼거나 중간중간 감출 수 없는 싼티나는 건반에 질색할 이도 없진 않겠지만 멋진 앨범이다.

[The Hermetic Order of Yten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