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의 도시 가이드

도시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에 (나름대로는)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걸어다니는 거리가 어떠한 이유와 판단에서,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조차 잘 모르겠으나 짐작건대 아무래도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월급통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열렸던 바야흐로 소개팅의 시대, 남녀가 평등하다지만 현실적인 성공 쟁취를 위해서 나름의 데이트 플랜을 만들자면 일단 어느 동네가 괜찮은가? 그렇다면 그 동네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하는 게 중요한 준비사항이었고, 그러자면 일단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부터 알아봐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개팅은 그런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는 분야가 아니었으므로 보통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했다고 준비하면서 뭔가 재미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국내에는 “파리, 모더니티”로 번역되었다)는 이런 류의 지적 욕구에 뭔가 있어보이는 외피를 부여해 주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소개팅에 가서 할 수는 없었으니 실용성은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실패를 거듭하던 그 남자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있었다… 라고 이제 와서 덧붙인다.

저자가 도둑과 은행털이범 등을 직접 취재해 지었다는 이 책도, 아마도 이 책을 읽어볼 독자들이 도둑과 은행털이범(또는 해당 분야를 준비하는 일종의 ‘취준생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 같은 뜨내기 방문객이라면 절대 돌아보거나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숨겨진 모습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들춰내고 있으니 구성의 난삽함은 둘째치고 독자에게 확실히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다. 사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던 얘기를 새로이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그러기엔 이미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너무 깊게 노출되어 있다) 덕분에 그런 부분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각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임을 실감하기에는 더욱 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도시의 구조, 공간의 구조의 중심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제시하는 ‘도둑을 위한 가이드’는 결국 외부에서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한 ‘감시와 통제’ 목적으로 구성된 도시의 구조를 극복하는 소정의 목표를 달성한 성공담들일 것이고, 덕분에 책의 상당부분은 이제 건축과 공간을 벗어나 도둑과 당국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말하자면 헐리우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안티히어로격 도둑마냥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통제적’ 측면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조지 레오니다스 레슬리가 수많은 헐리우드 케이퍼 무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렇다고 도둑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려서는 곤란하다. 막판에 굳이 처가가 도둑질을 당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은 아마도 그런 사소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 얘기를 했으면 더 효과적이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아마 좀 더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됐을 테니 어쩔 수 없으려나.

[제프 마노 저, 김주양 역, 열림원]

Theoden’s Reign “Mitheithel”

최근에 알게 된 의외의 소식 중 하나는 벌써 문 닫아도 예전에 닫았던 라트비아의 데모 전문 레이블 Elven Witchcraft가 2023년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면 많지는 않았지만 꽤 솔깃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고 Valar나 Uruk-Hai처럼 Chanteloup Creations를 통해 활동을 이어간 사례들도 있었지만, CD도 안 쳐주던 반지의 제왕 컨셉트 블랙메탈 또는 던전 신스 데모테이프 전문 레이블이 2023년에 되살아나서 (이제는 CD도 내주면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반갑기도 하면서도 이해가 잘 되진 않는다. 뭐 그만큼 찾는 이들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간다.

Theoden’s Reign은 이 레이블이 되살아난 뒤 새로운 이름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사례인데, 나야 전혀 아는 바 없으나 Heralder라는 양반이 혼자서 다 해먹는 미국 원맨 프로젝트라고 한다. 반지의 제왕 얘기를 제대로 다뤄낸 미국 밴드를 사실 거의 본 적이 없었고 Elven Witchcraft에서 미국 밴드를 본 적도 없었으므로 우려는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세오덴을 밴드명으로 내세운 거 보면 영화만 대충 보고 반지의 제왕을 다루는 건 아닐테니 어느 정도의 기대는 분명하다. 영화에서야 오랜 세월 정신줄 놨다가 정신차리자마자 전쟁터에서 개돌하다 나즈굴에게 당하는 할아버지 왕… 같은 이미지이지만 원작의 세오덴은 그보다 훨씬 영웅적인 존재기도 하고,

그렇게 접한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이런 밴드들이 그렇듯이 Summoning의 그림자가 분명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Caladan Brood의 모습도 역력한 편이고, 혹자는 뽕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포크 바이브도 강한 편이다. 포크풍이다못해 The Meads of Ashpodel이 연상될 정도인데, ‘Roads Go Ever On…’처럼 흥겨운 인트로가 Summoning식의 꽤 멋들어진 분위기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90년대 블랙메탈 열심히 듣고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머니 속 송곳마냥 문득문득 드러나는 싼티만 아니었다면 CCP에서 나와도 꽤 어울렸을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기대보다 훨씬 좋게 들었다.

[Elven Witchcraft, 2023]

Lönndom “Fälen från norr”

스웨덴 오컬트-포크 록? 정도로 설명하는 게 나아 보이는 밴드의 2007년 데뷔작. 생긴 것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대체 이런 음악이 왜 블랙메탈 레이블에서 나왔는가 싶다면 멤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바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Armagedda의 두 멤버가 Armagedda에서 다루지 않은, 자신들의 근원과 좀 더 자연적인 테마를 다루기 위해 “Ond Spiritism” 녹음 이후 만들었다는 프로젝트이니 이제 이상하게 여겨야 할 건 저 레이블이 아니라 어디 텍사스 귀퉁이에서 카우보이 모자에 통기타로 컨트리를 연주하고 있는 듯한 밴드 사진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Nordvis 자체가 멤버 중 하나인 A. Petterson의 레이블인데다 이 앨범이 카탈로그 넘버 1번인 걸 보면 애초에 이걸 내려고 레이블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당연히 Armagedda 류의 블랙메탈과는 거리가 멀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간혹 블랙메탈의 스타일에 다가가는 부분이 있으나(이를테면 ‘Stállo’) 그럼에도 그 전개는 꽤 ‘관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라 이걸 메탈릭하다고 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최면적인 베이스라인이 돋보이는 ‘Nordafejd’는 과장 좀 섞으면 한때의 Joy Division을 떠올릴 만한 부분도 있다. 말하자면 보통 블랙메탈 출신의 멤버들이 들려주곤 하는, 조금은 차갑지만 분명히 서정을 강조하는 부류의 포크와는 달리 좀 더 ‘오컬트’한 색채를 보여주는 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Armagedda보다는 Graav의 솔로 프로젝트인 LIK에 훨씬 가까운 음악이다. 사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LIK의 이름을 달고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인데… LIK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오진 않았으므로 그런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치자.

그런고로 Armagedda의 팬보다는 차라리 Agalloch나 Waldruna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더 나을 것이다. 가끔은 Joyless를 처음 들었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좋은 앨범이다.

[Nordvis, 2007]

Teitanblood “From the Visceral Abyss”

war-metal이란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추천할 만한 장르의 최고급 웰메이드 밴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일단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처음에 하겠지만(이런 장르에 웰메이드가 웬말이란 말이냐!) 그래도 굳이 답을 찾는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에는 아마 Teitanblood가 있을 것이다. Norma Evangelium Diaboli 같은 웰메이드의 전당… 같은 레이블에서 밀어주는 것도 있고, war-metal이 애초에 사실 복잡할 것 없고 밴드들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공격성 자체에 천착한 작법을 특징으로 한다면 Teitanblood는 장르에서 드물 정도로 ‘분위기’라는 면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장르의 전형에 가까웠던 “Seven Chalices”마저도 적절한 앰비언트 트랙을 통해 앨범 나름의 분위기를 이끌어내는데, 그런 면에서는 전형적인 war-metal 밴드라기보다는 다른 데스메탈 밴드가 war-metal의 작풍을 빌려 나름의 개성을 드러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The Baneful Choir”부터 더욱 뚜렷해진 이런 밴드의 개성은 이 근작에서 더욱 명확해졌다고 생각한다. ‘Enter the Hypogeum’처럼 밴드 본연의 공격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곡도 있지만 의외의 완급조절을 보여주는 ‘Sepulchral Carrion God’은 장르의 다른 밴드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곡이고, ‘Strangling Visions’는 Motörhead식의 흥겨움을 war-metal의 질감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주술적이기까지 한 ‘Tomb Corpse Haruspex’에 이르면 이 직선적인 장르가 모색하는 변화의 단초는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앨범이고, 사실 훌륭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할 수도 있겠다. Teitanblood를 교과서삼아 연주하는 새로운 밴드들이 앞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도 된다. 멋지다.

[Norma Evangelium Diaboli, 2025]

Shotgun Messiah “Shotgun Messiah”

장르의 힘이 슬슬 빠져가고 있던 1989년에 등장한 게 생각하면 아쉬운 스웨디시 글램메탈 밴드. 한창 때는 헐리우드 헤어메탈에 대한 스웨덴의 대답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동향의 밴드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미국 스타일에 근접한 사례이기도 했으며, 특히나 암만 헤어메탈 소리를 들어도 좀 심각한 면모를 시도한 사례들도 등장했던 시절에 웬만한 미국 밴드들보다도 장르 본연의 파티음악 스타일에 충실했던 이 밴드의 앨범들 가운에서도 가장 장르 본연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면 이 데뷔작일 것이다.

당장 Mötley Crüe를 연상케 하는 ‘Bop City’부터가 밴드의 색깔을 그대로 보여주는데(이 앨범은 원래 ‘Welcome to Bop City’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렇지만 아류작에 머물지 않고 밴드는 ‘Shout it Out’에 와서 흔해빠진 Mötley Crüe의 유사 밴드를 넘어서고, ‘The Explorer’나 ‘Dirt Talk’(L.A. Guns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에서는 테크니컬한 연주와 함께 이 밴드가 ‘헤어메탈’ 이상의 모습도 보여줄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며, ‘Nervous’ 같은 곡의 ‘건강한’ 코러스와 키보드 연주는 이들이 80년대 헤어메탈의 전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놀자판 연주에 최적화된 보컬인 Zinny J. San의 목소리에서 엿보이듯 이 앨범에서 어떤 헤비 사운드 같은 걸 기대할 순 없겠지만 애초에 Shotgun Messiah를 알고 찾아듣는 이라면 굳이 이 앨범에서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밴드의 수명은 그 시절 비슷한 입장의 많은 밴드들이 그랬듯이 길지 않았고, 밴드는 나름의 시도들을 하다 못해 “Violent New Breed”에서 웬 인더스트리얼을 시도했다 화려하게 산화해 버렸으며, 밴드의 핵심이었던 베이스의 Tim Skold는 그게 되게 아쉬웠었는지 이후 솔로작은 물론 KMFDM이나 Marilyn Manson에서 못다한 인더스트리얼 쑈를 계속하고 있다. 그 음악도 팬이 있겠지만 이제 그만하고 이 밴드나 재결성했으면 좋겠다.

[Relativity,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