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rlian Camera “Invisible Front. 2005”

Kirlian Camera의 음악이 호오는 갈릴지언정 만듦새가 허접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거의 40년이 되어 가는 뿌리깊은 일렉트로닉 밴드는 2000년에 Elena A. Fossi를 보컬로 맞이하면서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게 사견이다. 보컬도 보컬이지만 Angelo Bergamini 말고도 고쓰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송라이터가 한 명 더 생겼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자기 목소리여서인지 Elena가 쓰는 곡들에서 밴드 특유의 퇴폐 자욱한 스타일이 잘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이탈로 디스코 리듬에 제대로 퇴폐를 얹을 수 있는 밴드는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많지 않다.

“Invisible Front. 2005″는 오랜 커리어 덕분에 풍성한 게스트는 물론, Elena 가입 이후의 앨범들 중 가장 그런 매력이 잘 드러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댄스 플로어 뒤에 등장하는 부유하는 신서사이저 연주에 얹히는 보컬만으로도 이들의 스타일을 대변하는 밴드의 최대 히트곡(뭐 히트곡을 따진다면) ‘K-Pax’를 위시하여, 좀 더 밴드의 초창기 사운드에 가까운(바꿔 말하면 Kraftwerk 느낌이 더 남아 있는) ‘Dead in the Sky’도 있고, 혹시나 피로했을지 모를 귀를 배려했을까 싶은 단정한 피아노 연주의 ‘Recorded Memory’도 있다. 사실 고쓰 묻은 전자음악을 얘기한다면 앨범의 모든 부분들을 빼놓을 수 없을 앨범이니만큼 이렇게 몇몇 곡들을 골라내는 식으로 얘기함은 적절하지 않다. 재발매된 김에 한 장 장만을 권해본다.

[Trisol, 2005]

Dynatron “Aeternus”

Dynatron은 많은 신스웨이브 프로젝트들 가운데 좀 더 ‘감상용’에 적합한 부류에 속한다. 흔히 2010년 이후에 주목받은 많은 프로젝트들이 디스토피아 컨셉트에 거칠거나 또는 꽤 절도있는 묵직한 비트를 발판삼아 곡을 이끌어 나가는 스타일에 가깝다고 한다면, Dynatron은 그보다는 Harold Faltermeyer나 Jan Hammer에서 뉴에이지 물을 뺀 모습에 더 비슷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스페이스한 분위기를 끼얹은 Klaus Schulze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Body Love”가 에로영화 OST였다면 Dynatron의 음악은 SF영화 OST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우주에서의 다양한 이벤트들보다는 우주라는 공간 자체의 묘사에 가까울 음악이다. 그래도 앨범 초반 중력을 극복하는 과정의 경쾌함을 묘사했던 “Escape Velocity”보다도 좀 더 어두운 앨범인데, ‘Escape’처럼 에너제틱한(그래봐야 앰비언트에 하우스를 좀 덧붙인 정도이긴 하다만) 곡도 없지는 않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까진 없겠다. 사실 ‘The Outer Rims of Traversed Space’ 등에서는 John Carpenter를 거의 오마주에 가까울 정도로 따라하는지라 듣기 편하면서도 귀에 걸리는 감이 있는데, Carpenters Brut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하긴 그게 뭐 단점인가 싶기도 하다. 신스웨이브의 팬이라면 일청을 권한다.

[Blood Music, 2015]

Rosetta Stone “Seems Like Forever”

최근 알게 된 지나간 소식들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은 Rosetta Stone의 재결성이었다. 뭐 말이 재결성이지 Porl King이 다시 그 드럼머신 ‘Madame Razor’를 데리고 시작한데다, Porl이 90년대 말에 혼자 굴리던 포스트펑크 프로젝트 Miserylab의 곡들의 재녹음이라니 본격적인 활동을 다시 개시했다기는 좀 그런데, 금년에 또 새 앨범을 준비 중이라니 어쨌든 20년만의 이 재결성이 나름 아주 야심찬 움직임이었긴 했나보다. 물론 그렇게 얘기하긴 누가 봐도 이거 재탕이려나 싶은 앨범명에 정말로 예전 곡들을 재녹음하고 있는 모양새가 좀 민망하긴 하지만, Rosetta Stone을 21세기에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추억 맛을 잊지 않고 있을지니 그게 꼭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은 아닐지도.

그렇다고는 해도 시절이 시절인만큼 예전 Rosetta Stone의 음악과는 좀 달라졌다. 고쓰라지만 쟁글쟁글 펜타토닉에 페달을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써먹던 기타 팝에 가까웠던 모습이 밴드의 초기였다면, ‘Children of the Poor’ 같은 확실히 예전보다 미니멀한 구성의 곡들은 Miserylab이 포스트펑크 프로젝트였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신서사이저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신스 팝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Making A Bomb’의 위악스러운 발랄함은 이 밴드가 예전의 기타 팝을 좀 더 현대적이지만 기괴한 모양새로 풀어가는 단초를 보여준다.

물론 그래도 사실 익숙한 사운드이기는 하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하면서 가져오는 게 포스트펑크라는 데서 이미 많이들 짐작했을 것이다. 하긴 80년대 고쓰 밴드의 재결성을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힐난하는 바보는 드물게다.

[Cleopatra, 2019]

Zero Hour “The Towers of Avarice”

“The Towers of Avarice”는 Zero Hour가 남긴 여섯 장의 앨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뭐 그 여섯 장이 냉정히 얘기하면 다 똑같은 스타일이고 빠지는 앨범은 한 장도 없으므로 그 중에 뭐가 최고다라고 얘기해도 납득할 만한 얘기는 된다. 사실 이런 류의 좀 차가운 분위기를 가져가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들이 대개 다 그런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면서도 서정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서사를 끌고 나가려다 보니(이건 아무래도 “A Pleasant Shade of Gray” 때문이라 생각한다) 테크닉으로 기본점수는 따면서도 막상 명징한 멜로디 등을 기억에 남겨두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런 건 Fates Warning 정도 간지남들이 아니면 진짜 별 사례가 없다.

Zero Hour는 그런 멜로디 대신 djent의 스타일을 음악에 입히면서 기계적인 분위기를 더욱 끌고 나가는 방식을 고른 사례인데, 그러면서 살풋 부유감 있는 톤의 키보드로 나름의 서사도 잊지 않는다(특히 ‘Demise and Vestige’). 아예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듄의 배경을 좀 칙칙한 색감으로 바꾸고 살짝 매트릭스의 외피를 입힌 듯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따라가는 컨셉트도 나쁘지 않다. 전작이 Matt Guillory의 키보드 덕에 뭔가 Dream Theater 다운그레이드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렇지만 종횡무진 다양한 색채로 활약하는 Erik Rosvold의 보컬이 화려한 연주 가운데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지라 듣기는 그리 어렵지 않고, 달려주는 맛이라면 Dream Theater보다도 이런 스타일이 나을 것이다. 리프 따라가는 맛으로만 들어도 충분히 재미있기도 하고.

[Sensory, 2001]

Sine Luce “L’ombra dell’apparenza”

사르디니아 출신 블랙메탈 원맨 프로젝트의 두 번째 데모. 블랙메탈 데모라는 걸 생각하면 기대 이상의 아트워크를 보여주는 앨범인데,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입증하려는 듯 아트워크에 기울인 관심을 절반만 녹음에 쏟았어도 훨씬 귀가 편해지지 않았을까 싶은 음질이므로 기대할 건 사실 별로 없다. 시절은 바야흐로 2008년이었으므로 Xasthur나 그 밖의 미국 DSBM과 Katotonia의 둠-데스 시절을 참고했다는 게 밴드의 자평이다만, 결국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곰곰이 따진다면 Burzum 스타일이라는 얘기다. 물론 그만한 분위기를 뽑아낸다는 얘기는 아니고 빠르잖은 템포에 결국은 조악한 음질과 트레몰로 리프로 분위기를 잡아가는 골방 프로젝트에 가깝다.

그래도 이런저런 골방 프로젝트들보다는 나름의 들을거리가 있다. 마냥 Burzum만 따라가는 건 아니고 ‘L’ombra del viandante’ 같은 곡은 “Transylvanian Hunger” 시절의 Darkthrone를 템포 다운(하고 멜로디를 좀 더 재미없게 만든 듯)한 스타일에 가깝고, ‘Dietro ogni apparenza’에서 이 분위기를 다시 DSBM 리프로 이어가는 모양새는 사실 솔깃한 구석이 있다. 물론 시절은 2008년이니 이 정도 솔깃하게 만드는 데모나 앨범은 사실 이미 너무나 흔해져버렸으니 이 밴드가 빛볼 일은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겠나 싶지만 그래도 5유로짜리 데모 치고는 남아 있는 기억이 좋다. 분명한 기억이 있다.

[Self-financed,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