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nibal Corpse “Violence Unimagined”

Cannibal Corpse의 15번째 앨범. 뭐 부침이 없지는 않았지만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구린 앨범을 낸 적이 없었던(이것도 이견이 있으려나) 장르의 슈퍼스타 – 무려 Pitchfork에 리뷰가 실린다. 평은 좋지만 글쓴이가 정말 데스메탈을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의문을 주는 신기한 글이다 – 인데다, Pat O’Brien의 빈자리를 Erik Rutan이 채웠으니 밴드의 그간의 페이스를 이어가는 데도 별 문제는 없어 보이고, 늘 하던 정도를 예상하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이다. 물론 Erik Rutan이 합류한 만큼 Hate Eternal풍 리프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할 일이고, 특히 ‘Ritual Annihilation’는 흡사 Corpsegrinder가 Hate Eternal에 가입한 게 아닐까 싶은 사운드를 보여주는데, 그러다가도 Paul Mazurkiewicz의 ‘클래식한’ 스타일의 드러밍을 듣자면 이 밴드가 Cannibal Corpse였다는 걸 다시 실감할 수 있다.

말하자면 Cannibal Corpse 특유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Erik Rutan의 가입을 계기삼아 나름 모던한 기분을 가미한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뭐 그렇더라도 앨범을 시원하게 시작하는 ‘Murderous Rampage’나, 라이브용으로 일부러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Surround, Kill, Devour’, 특유의 미드템포에 Rutan이 Cannibal Corpse에 녹아든 스타일의 솔로를 들려주는 ‘Condemnation Contagion’은 밴드가 자신들의 ‘좋았던 시절’ 모습을 아직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어도 “Torture” 이후 밴드가 낸 앨범들 중에서는 제일 좋게 들리고, 2000년 이후 밴드의 앨범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 듣고 “Eaten Back to Life”를 이어 들었는데, 밀리지 않았다.

[Metal Blade, 2021]

Various “Double Exposure”

그래도 굵직한 이름을 남긴 프로그레시브 뮤지션들을 분류하는 방법들은 여러가지겠지만 그 중 하나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그야말로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데 제대로 성공한 일군과,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설득력 있게 잘 엮어낼 줄 알았던 나머지로 분류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많은 이들이 내놓은 뒤에야 음악을 시작한 후대라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방식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80년대 이후 프로그레시브 록의 최고의 거물은 Steven Wilson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쪽에서는 Quentin Tarantino) 뮤지션 이전에 유명한 컬렉터였던지라 주워들은 게 많아서인지 앨범에서 항상 아이디어가 넘쳐난다는(그리고 발견하면 은근 반갑다는) 장점은 쉬이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Double Exposure”는 Porcupine Tree로 슬슬 뮤지션 커리어를 시작할 즈음 Wilson이 직접 만든 컴필레이션인데, The Bond 같이 그 시절 네오 프로그레시브의 거물…까지는 아니고 한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정도는 될 이름은 물론 Anthony Phillips나 Galadriel 같은 (준)거물들, 훗날 SI Music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의 하나가 될 Egdon Heath 등의 이름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당대 영국의 현역 프로그 뮤지션들의 스타일들을 나름대로 망라하고 있는 컴필레이션인데(말하고 보니 Galadriel나 Egdon Heath는 영국 밴드가 아니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와서 주목받는 곡은 Steven Wilson 본인이 참여한 No Man is an Island(훗날의 No-Man)의 ‘Faith’s Last Doubt’라는 게 좀 우습기는 하다. 다른 앨범에 없다고는 하지만 내 귀에는 그리 돋보일 건 없는 발라드이니 이거만 가지고 이 컴필레이션을 구하기는 좀 본전 생각이 들겠거니 싶다. 사실 그렇게 싼 앨범도 아니고.

그래도 Steven Wilson이 그 시절 즐겨 들었던 네오프로그와, 1987년 영국 네오프로그가 대충 이랬었다는 식으로 살펴보는 데는 유익할 것이다. 사실 Steven Wilson의 이름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될 컴필레이션은 아닐 테니 어찌 생각하면 구매자의 목적만큼은 확실히 충족시켜 주는 앨범이라 할 수 있을지도.

[Self-financed, 1987]

Digital Ruin “Listen”

Digital Ruin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아예 방송국 자체가 없어진 경기방송의 ‘조경서의 음악느낌’에서였다.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게스트가 “Dwelling in the Out”을 소개했었고, 정작 게스트가 틀었던 곡은 별로였지만 데뷔작인 “Listen”이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소개가 기억에 남았었다. 듣는 귀는 다들 비슷한지 “Dwelling in the Out”은 이후, 정말 샀던 사람들이 전부 다 팔았는지 중고시장에 셀 수 없이 등장하는 앨범이 되었지만 “Listen”을 손에 넣게 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물론 밴드의 운명은 그리 녹록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구했던 “Listen”도 가격은 배송료 포함 만원 수준이었으니 반응은 그닥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Listen”은 꽤 훌륭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앨범이었다. “Dwelling in the Out”이 “A Pleasant Shades of Grey”의 분위기를 Dream Theater의 방법론으로 풀어내려다 잘 안 된 앨범이었다면 “Listen”은 그보다 어두운 분위기는 좀 덜하고, Fates Warning의 USPM 시절 사운드(또는 초기 Queensryche)를 좀 더 닮아 있다. 그런 면에서 사실 그 시절 가장 비슷한 밴드는 Vauxdvihl이라고 생각하지만, Vauxdvihl은 Digital Ruin보다 훨씬 안 유명하니 이렇게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겠구나. 아마도 밴드의 스타일을 대변할 ‘In the Mirror(Dark Half)’를 꽤 오래 즐겨 들었다.

[Siegen, 1997]

Skagos “Anarchic”

“Ást”는 ‘cascadian’으로 분류되는 앨범들 중에 한 손에 꼽힐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앨범이고, 붙은 레떼르 덕분에라도 포스트락과의 비교는 아마 불가피하겠지만 마냥 포스트락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스타일이라고 하기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앨범이기도 했다. 많은 포스트락 밴드들이 즐겨 쓰긴 했던 침잠하다가 빌드업을 거쳐 한번에 터뜨리는 방식은, 그래도 그 장르에 특화된 방법은 아니었고, 이미 우리는 Woods of Ypres 같은 밴드들의 스타일을 알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같은 ‘cascadian’으로 분류되는 밴드들이라고 하더라도 Skagos만큼은 다른 밴드들과 함께 뭉뚱그리기에는 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 라는 게 사견이다.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앨범은 피드백으로 시작했다가 6분 가량 반복적인 리듬에 ‘청명한’ 코러스 등을 이용한 약간의 빌드업을 거쳐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달린다기보다는 리프 자체의 연주는 앰비언트에 가까울 정도인데, 구성 자체는 전작보다도 좀 더 다채로운 모양새인지라 앨범을 단순하다고 말할 정도까진 아니다. Wolves in the Throne Room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A Silver Mt. Zion(그런 면에서는 좀 더 포스트락스러운 앨범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나… 때로는 Deftones 같은 밴드들도 떠오르고, 때로는 Pink Floyd를 열심히 따라하던 시절의 Anathema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블랙메탈의 질감을 발견할 수 있긴 하지만 이제는 블랙메탈이라 하긴 좀 고민되는 사운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밴드 본인들도 굳이 블랙메탈 밴드로 불리고픈 생각은 전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The Flenser, 2013]

Khallice “The Journey”

Magna Carta에서 나온 앨범은 웬만하면 일단 구하는 편인데, 뭐 이제는 공식적으로 망했다는 얘기만 안 했을 뿐 망한 거나 진배없는 상황이니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서는)전작 컬렉션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 곳이다. 초창기의 빛나는 발매작들은 J레코드에서 저렴하게 라이센스도 많이 됐었는데, 언제부턴가 초기의 발매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지는 앨범들만을 줄줄이 내놓다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에서인지 Robert Berry를 내세운 기획성 컨셉트 앨범들을 남발하면서 레이블의 이름값은 좀 더 떨어졌고, 덕분에 그 즈음에 나온 발매작들은 퀄리티는 둘째치고 일단 묻히곤 하던 기억이 있다.

Khallice도 그렇게 묻혔던 이름들 중 하나인데, Rush와 Pink Floyd, Led Zeppelin, Deep Purple과 Dream Theater를 닮았다는 광고문구가 의외로 정확한지라(정말 조금씩은 다 있었음) 꽤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 중에 가장 비교가 많이 되곤 했던 밴드는 Rush라고 하는데, Alirio Netto의 보컬이 확실히 Geddy Lee와 James Labrie를 짬뽕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흔히 그렇듯이 가끔은 ‘앵앵거리는’ 것처럼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데, 조금은 어색한 영어 억양과 어울려 안 좋은 시너지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주가 빛나는 밴드인지라 음악은 충분히 들을 만하다. 특히나 ‘I’ve Lost My Faith’나 ‘Vampire’의 키보드를 위시한 화려한 사운드는 장르의 팬이라면 귀가 솔깃할 것이다.

[Magna Carta,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