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Zabijanie Czasu I”

일단 밴드 이름이 이래서야 음악이 뭐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범상찮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나마 레이블을 보고 어땠든 블랙메탈이긴 하지 않을까 정도만 짐작하며 앨범을 접했는데도 이렇게 짐작이 제대로 빗나가는 경우는 그래도 드물었던 것 같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한 가운데 부클렛을 들춰보니 밴드 편성부터 보컬, 베이스에 클라리넷이고, 스스로의 음악들을 ‘다크 오컬트 펑크(funk)’라고 자처하고 있다. 거기까지 보고 나서야 지금 이런 음악을 들었었구나 조금 가닥히 잡힌다. 물론 가닥이 잡혀도 꽤 괴이한 걸 들었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펑크라고는 했지만 사실 리듬감으로 먹고 사는 음악은 아니고, 그보다는 앰비언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둠에 가까울 정도의 여유 있는 템포를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오컬트 분위기로 승부하는 앨범이다. 베이스가 둠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괴팍한 클라리넷이 이 분위기를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뒤튼다. 기묘한 건 덕분에 앨범을 들으면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별다른 이미지가 없었다는 점인데, 거의 대부분이 임프로바이징으로 구성된 앨범이라니 그래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사실 철저하게 혼돈스러운 구성은 아니고, 부분부분 곡을 구성하는 멜로디나 테마들은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모습이 좀 황당할 정도의 도약이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덕분인지 세평은 꽤 좋은 모양이지만 아직은 이 앨범이 정말 그 정도인지 별 감은 없는데, 그래도 2020년 가장 신기했던 앨범을 꼽으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뭐, 이 EP로 밴드를 첫 선을 보이는데 이만큼 어그로를 끌었다면야 어쨌든 충분히 성공적인 거 아닐까.

[I, Voidhanger, 2020]

Chain “Chain.exe”

Chain은 2002년에야 데뷔작 “Reconstruct”를 발표한 미국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이지만, 이미 Dream Theater의 컨벤션을 극복하기 위해 후배 밴드들의 별별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던 와중에 오히려 좀 더 클래식한 스타일의 데뷔작을 선보인 조금 눈에 띄는 밴드였다. 하긴 Henning Pauly가 1994년 즈음에 만들어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녹음했던 습작을 밴드로 재녹음한 버전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텐데, 그렇게 나온 데뷔작이 기대 이상의 퀄리티였으니 많이들 놀랬는지도 모르겠다. 곧 Henning이 무려 James Labrie와 Frameshift를 결성했다는 뉴스가 프로그 웹진들을 장식했고,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듯 곧 “Chain.exe”가 새로 나온 앨범으로 뒤를 이었다.

“Chain.exe”는 좀 더 다채롭다. Mike Keneally가 참여한 흔치 않은 본격 프로그(뭐 복잡한 음악이라면 이골이 났을 사람이긴 하다만) 앨범이기도 하고, Saga의 Michael Sadler와 Little Atlas의 Steve Katsikas도 끼어 있는 만큼 미국식 심포닉 프로그 바이브가 강하게 묻어나는 편이지만(‘Hot to Cold’의 커버가 있는 것도 그렇고), A.C.T 같은 밴드들이 잘 하던 적당한 심포닉과 아카펠라풍 코러스를 곁들인 헤비메탈도 등장한다. Henning 본인의 기타도 본격 프로그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조금은 Mike Oldfield풍으로 들린다. 말하자면 Dream Theater풍 뼈대에 AOR과 미국식 심포닉 네오프로그 등을 뒤섞고 이음새를 나름의 멜로디감각으로 메꿔내고 있는 앨범이라 생각한다. 결과는 성공적일 것이다. 2004년작을 지금도 열심히 듣고 있잖나.

[ProgRock, 2004]

Paganini “It’s a Long Way to the Top”

Paganini는 밴드명만 보고 무턱대고 다 구하려 들던 천둥벌거숭이 시절 꽤 구하려고 애먹은 밴드였다. 밴드명도 그렇고 리더의 원래 성씨가 정말 Paganini라니 쓸데없는 비르투오소의 그림자가 눈에 씌이고, 라이센스는 커녕 수입으로도 잘 안 보이면서 해설지에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출석체크하는지라 오랫동안 위시리스트의 위쪽에 자리잡았다. 물론 이름만 Paganini지 하필 Marco Paganini의 포지션은 보컬이었고, 하필 Vertigo에서 나온 ‘충분히 메이저하지만 별로 안 팔리다 나중에 인정받은’ 앨범이었으니 다른 레이블이 재발매를 눈독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맘먹고 구하려고 보니까 생각보다 되게 흔해서 저 위시리스트가 본의 아니게 좀 민망해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각설하고.

Paganini의 가장 유명한 앨범은 물론 “Weapon of Love”겠지만, 아무래도 이 80년대 글램 살짝 묻은 헤비메탈 밴드의 가장 메탈다운 앨범은 탑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고 외치는 바로 이 앨범이라 생각한다. 뭐 메탈다워서 결국 탑으로는 못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정통 헤비메탈이라고 하긴 좀 어렵고, “Weapon of Love”의 은근한 어두움을 걷어내고 Van Halen풍의 흥겨운 로큰롤을 헤비메탈 리프의 질감으로 연주한다고 하면 좀 비슷하려나.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좀 더 트리키한 연주를 보여주는 편이다. ‘Mr.Big Mouth’ 같은 곡은 “Loud and Clear” 시절의 Autograph를 좀 더 테크니컬하게 만든 인상을 주는데, 그러면서도 적당히 그루브하기 때문에 그게 밴드의 개성이라면 개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밴드 최고의 약점은 밴드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저 이름을 달고 테크니컬하지 않다면 솔직히 좀 사기성 짙지 않나.

[Vertigo, 1987]

Satan’s Almighty Penis “Into the Cunt of Chaos”

지금이야 Panopticon의 재발매반도 찍고 약간 이미지 세탁을 좀 했지만 Pagan Flames 레이블에 대한 인상은 원래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B급도 아니고 C급 이상으로는 평가해주기 어려울 수많은 블랙메탈 레이블들이 간혹 그렇듯이 유명 밴드들의 과연 들으라고 녹음해놓은 건지 의심스러운 라이브 부틀렉들을 내놓으면서 카탈로그 중간중간 마치 동급인 것처럼 자신들이 발굴한 눈에 띄면서도 지나서 생각해 보면 얼척없는 이름을 붙인 별로 향상심 없어 보이는 밴드들의 EP 또는 7인치, 때로는 풀렝쓰라지만 절대 러닝타임은 길지 않은 앨범들(대개 이런 앨범들은 로우파이의 극에 도전하는 듯한 스타일을 보여주곤 한다)을 끼워넣곤 한다.

Satan’s Almighty Penis의 이 데뷔작은 애매한 레이블과 얼척없는 밴드명 등 그런 요소들을 대부분 충실하게 갖추고 있지만 정작 러닝타임도 꽤 길고 음악이 훌륭해서 기억에 남는 드문 사례다. 데모 수준을 갓 넘어선 듯한 음질로 연주하는 트레몰로 위주의 거친 블랙메탈이지만, 리프도 꽤 독특하게 짜내면서 달려대는 분위기 사이사이 은근한 멜랑콜리(와 Anal Cunt식의 유머)도 묻어난다. 그 독특한 리프 탓에 실험적이라는 소리도 간혹 듣는 모양이지만 사실 곡의 구성 등은 백화점식 나열 같은 모습(이를테면 ‘Befouling The Heart Of Deities’)을 뺀다면 그리 특이하지는 않은 편이다. 정통적이면서도 좀 재미있는 블랙메탈을 찾는다면 시도의 가치가 있다. 나온 지 시간은 꽤 지났지만 지금도 꽤 저렴하고 앞으로도 아마 저렴할 앨범이니 가성비도 훌륭한 편.

[Pagan Flames, 2004]

Oranssi Pazuzu “Mestarin kynsi”

‘사이키델릭’ 블랙메탈이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밴드가 Esoteric(말하고 보니 둠메탈 밴드구나)이라면 Oranssi Pazuzu는 그런 선입견에 가장 강한 도전을 보여준 최근의 밴드였다. 그리고 Esoteric이 밴드 초기의 약 먹은 분위기에서 점차 (물론 상대적이지만)전형적인 둠-데스에 근접해 왔다면, 반대로 Oranssi Pazuzu의 사이키델릭은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해갔다. 사이키델릭이란 말이 붙었다 뿐이지 어쨌든 분명한 블랙메탈이었던 초창기의 스타일은 “Värähtelijä”부터 사이키델릭, 또는 70년대 독일의 약 냄새 물씬 풍기던 아트하우스 전자음악(아니면 크라우트록이나 Steve Reich)의 모습을 닮아갔다고 생각한다.

“Mestarin Kynsi”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Nuclear Blast로 이적하면서 분위기는 갖다버린 평범한 블랙메탈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그 약 분위기는 이젠 Waste of Space Orchestra 이상으로 진해졌다. 리프도 블랙메탈의 기운이 가신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다른 장르의 모습들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신경질적인 리프의 질감에서 Neurosis를, ‘Kuulen ääniä maan’의 일렉트로닉에서 Nine Inch Nails를 발견하다가도, ‘Uusi teknokratia’의 팬플룻 소리에서 프로그레시브의 흔적을 발견하고 약간 뒷목이 뻐근해지곤 한다(이 지점에서 Enslaved 생각을 안 할수 없다). 말하자면 이제는 연주 자체보다는, 밴드 특유의 분위기를 이용해 만드는 ‘서스펜스’로 블랙메탈의 느낌을 재현하고 있는데, 서스펜스 중간중간 느껴지는 싼티나는 신서사이저가 거슬릴 이도 있겠지만 John Carpenter의 팬을 자처하는 이로서는 좋게만 들린다.

아주 좋게 들었는데, 다음 앨범쯤 되면 이제 더 이상 블랙메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은 불안하다.

[Nuclear Blast,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