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oy “Metromania”

Eloy_Metromania.jpgEloy도 나름 좋아한다고 자처하는 밴드인데, 사실 Eloy의 80년대 음악은 대부분의 (아마도 이제는 거의 아재가 되었을)프로그레시브 록 팬들에게 길티 플레저도 아니고 그냥 길티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고, 따지고 보면 Eloy의 ‘좋았던 시절’부터 그런 낌새는 어느 정도 있어 왔다. Eloy는 1970년대에도 여타 ‘스페이스록’ 밴드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멜로딕하고 적당히 싼티나는 심포닉으로 멜로디를 뒷받침하는 음악을 연주했고, 앨범의 컨셉도… 뭐, 재밌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게는 거의 H. G. 웰즈의 적당히 싼티나는 데드카피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다른 ‘프로그’ 밴드들에 비해서 무게잡고 음악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였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Metromania”를 괜찮은 프로그레시브 앨범이라고 굳이 얘기할 생각은 없지만, 프로그레시브 밴드가 만든 80년대의 멋들어진 AOR 튠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솔직히 ‘Escape to the Heights’는 백투더퓨처 같은 데 들어가도 어울리겠다 싶은데, 앞서도 말했지만 이 밴드의 문제점은 팬들이 백투더퓨처보다는 블레이드 러너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었다는 점. 확실히 데커드가 뿅뿅 신서사이저 연주에 박자 맞춰서 레플리컨트를 쫓아다니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진 않다. 그래도 ‘Follow the Light’ 같은 곡의 직관적인 멜로디는 밴드가 욕을 먹을지언정 어쨌든 저력은 남아 있었다는 인상을 확실히 주는 편이다. 솔직히 가끔은 저 멜로디가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EMI, 1984]

Zemial “For the Glory of UR”

zemial1996.jpg최근에 Electronic Purification에서 재발매했다는 얘기를 보고 밴드 본인들이 꽤 공들인 디지팩으로 재발매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지라 꽤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긴 꾸준하게 재발매된 앨범인 걸 생각하면 그보다는 시세가 높게 형성되고 있는 앨범이기는 한데, 레이블측 광고문구에서야 그리스 블랙메탈의 어떤 마일스톤이지만 사실 내 생각엔 그렇게까지 얘기할 건 또 아닌지라 레이블의 선택이 잘하는 일인지는 어쨌든 의문이 있다. 뭐 하긴 그리스 메탈 밴드가 굳이 수메르 이야기를 갖다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왜 앨범명 끝에 UR는 다 대문자로 써 놨는지 따지자면 처음부터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을 앨범이긴 하다. 각설하고.

뭐 이 밴드의 모든 앨범들이 그렇지만, 흔히 Rotting Christ나 Necromantia 같은 밴드들의 개성으로 대변되곤 하는 그리스 블랙메탈의 어떤 경향과는 달리 전형적인 노르웨이 블랙메탈의 흐름을 좇는 앨범인데, 해서 1996년의 그리스 블랙메탈로서는 꽤 이색적인 앨범이긴 하지만 나 같은 후대의 청자로서는 그런 개성을 쉬이 실감하긴 어렵다. ‘Battle on the Norse Mountains’ 같은 곡에서는 Bathory풍 바이킹의 기상까지 느껴지다보니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그 시절 쉬이 묻혀버린 노르웨이 밴드처럼 느껴질지도. 하지만 노르웨이의 오리지널들에도 그리 꿀리지 않는 수준이다 보니 결국 90년대 중반의 블랙메탈을 즐겨 듣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선택일 것이다. 싼티로 점철된 키보드도 장점이라고는 못하겠으나 2019년에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하다.

[Hypervorea, 1996]

Sol Invictus “Death of the West”

solinvictus1994.jpgTony Wakeford가 네오나치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꽤 많은 얘기들이 도는 편이지만 1994년에 슈펭글러라니 이 양반은 네오나치보다는 그냥 시대착오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 가까울 것이라 짐작하는 편이다. 따지자면 역사의 진보에 대한 부르주아적 낙관주의를 배격하는 시각이니 정치적 올바름과는 별개로 지금의 세상이 그런 눈에 썩 좋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이 시절의)Tony는 스스로를 서구의 몰락이 이미 예정된 운명임을 세상에 일깨우는 ‘영웅적인 스피커’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이런 앨범을 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하긴 20세기 초반 어느 독일 공상가의 역사 비극은 확실히 비장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은 Sol Invictus의 여러 앨범들 중에서도 가장 네오포크의 전형에 가까운 앨범이다. 어떻게 들으면 혹시 트래디셔널이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내놓고 중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Come, Join the Dance’나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아래 고즈넉한 숲을 그려내는 듯한 ‘In the Rain’ 같은 곡이 가장 좋은 예시일 것이다. 밴드의 다른 앨범보다도 확실히 따뜻한 기타 톤(약간은 “Burial” 시절의 Death in June 생각도 나는 편이다)과 Tony의 목소리, 적절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오보에나 브라스 등도 좀 괴팍하지만 그런대로 고즈넉한 – 다 망해서 고즈넉해졌다에 가까울 – 분위기에 일조한다. 그러니까 이 장르를 찾아듣는 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짚어내는 셈이다. 클래식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Tursa, 1994]

Aruna “Running Red Lights”

aruna2005.jpgCynic(물론 그 시절에는 Portal)의 “The Portal Tapes”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Aruna Abrams는 사실 이후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어떻게 밴드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일 인물이다. 아무래도 가장 잘 알려졌을 활동은 Ferry Corsten이나 Armin van Buuren과 함께한 싱글들인지라, 굳이 말하자면 트랜스/EDM 등 일렉트로닉 음악에서 주로 목소리를 비춘 보컬리스트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그나마도 Aruna가 본격적으로 일렉트로닉 싱글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이니, 어찌 생각하면 Portal에서의 활동은 Aruna의 젊은 날의 과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저도 메탈을 좋아했지만 나이 먹으니까 다른 게 좋더군요, 뭐 이런 것이다. 물론 짐작일 뿐이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그렇지만 Aruna는 적어도 꽤 오랫동안 밴드 음악에 중점을 두고 커리어를 끌고 나가려 했던 모양인지 Portal 이후 2005년 이 데뷔작 “Running Red Lights”를 자주제작으로 발표했다. 물론 그렇다고 메탈을 했다는 건 아니고… 앨범은 팝 차트에서 당시 드물잖게 발견할 수 있었던 부류의 팝 락 스타일의 음악을 담고 있었다. 듣다 보면 Vanessa Carlton 같은 이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연주에 자신이 있었는지 건반의 비중이 높았던 Carlton에 비해서는 좀 더 락적인 구석이 있고(이렇게 써서 그렇지 Aruna도 건반을 연주하긴 한다만), 잘 박히는 멜로디를 만들 능력도 확실히 보여주는지라, 그래 당신이 Portal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앨범이 지금까지도 찾아보면 중고로 보이는지라(자주제작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냥 Portal에 있는 게 돈벌이에는 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아 이 분 Ferry Corsten하고 노는 분이구나…하고 현실을 인식하고 다시 정신을 차린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Self-financed, 2005]

Moral Order “Freedom Locked”

freedomlocked.jpgMoral Order는 이 데뷔작을 작년에 발표했다고 하나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고, 근래 Tesco에서 나온 네오포크 아닌 앨범들이 대개 그렇듯이 거친 인더스트리얼-노이즈를 연주하는 프로젝트이다. 물론 이런 류의 음악도 스타일이 있는지라, 거칠고 절도있는 리듬감에 힘을 실어주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꽉 찬 노이즈의 활용을 통해서 ‘월 오브 사운드’를 그네들의 방식으로 구현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많은 개성들이 있을진대 나의 좁다란 경험으로는 아직 보이지 않는 부분이니 그건 별론으로 하고.

Moral Order는 후자에 속한다. 이런 류의 음악에서 리듬을 거칠지 않게 가져가는 밴드가 있겠냐마는, 리듬 위에 얹어내는 드론 사운드나 때로는 앰비언트마냥 자욱한 분위기를 흩뿌리는(특히나 ‘Thirst of Death’) 부분도 있다. 말하자면 레이블메이트 중에서는 Deathpanel 같은 프로젝트와도 비교할 만한데, 이 프로젝트를 굴리는 Fernando O. Paino가 원래 Da-Sein에서 가끔은 댄서블하기까지 한 일렉트로닉스를 보여줬던 점을 생각하면 Da-Sein의 사운드에서 일말의 경쾌함을 걷어내고 묵직한 분위기를 얹어낸 음악이라 할 수 있을지도. 하긴 그 경쾌함의 역할을 Da-Sein에서 Kas Visions가 맡았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도 된다. 그러니만큼 만듦새는 나쁘지 않지만 손을 뻗는 데는 좀 고민을 할 필요도 있다. 쉬이 귀에 들어오는 앨범은 아니다.

[Tesco,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