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zerkrieg 666 “Panzerkrieg 666”

독일 블랙메탈 듀오의 금년 데뷔 EP. 이렇게 내놓고 해골에 탱크를 박아넣은 앨범 커버는 블랙메탈에서는 드물지 않은 편이지만 그것도 트렌드이려나? 앨범 커버들에서 탱크가 은근 잘 안 보이기 시작한 지는 좀 된 것 같다. 하긴 탱크 앨범 커버라면 Marduk의 “Panzer Division Marduk”이 첫손가락이겠지만 이젠 Marduk의 음악마저도 그 때와는 조금은 달라진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앨범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밴드는 Marduk이고, 당장 ‘Grand Commander’부터가 무척 Marduk스러운 리프로 시작되는지라 그런 인상은 아무래도 지울 수가 없다. 나름 리드미컬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전반적으로 빠르게 후려치는 음악이고, 그런 면에서는 Endstille 같은 밴드와도 비교될 수 있겠지만 리프는 그보다는 더욱 멜로딕하다. 말하자면 건조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듣는다면 조금은 아쉬울 수 있겠지만 스웨디시 블랙을 즐겨 들었던 이라면 좀 더 기분좋게 들을 수 있을 만한 음악이다.

16분 조금 안 되는 러닝타임을 아무리 EP라도 좀 짧지 않나 할 이들도 있겠지만, 이런 앨범이 길면 또 듣기 피곤할 테니 그걸로 흠잡기는 좀 아니잖을까 싶다. 적어도 데뷔작을 기대하게 하는 힘은 있다.

[Human Noise Records, 2022]

Cripple Bastards “Nero in Metastasi”

사실 Cripple Bastards 같은 밴드가 Repulsion, Napalm Death보다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이탈리아 밴드인 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Cripple Bastards의 음악이 좀 더 그라인드코어의 ‘원형’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형이 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참 어렵긴 한데…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밴드들보다 메탈적인 면이 더 강했던 Repulsion이나 하드코어의 그림자 짙었던 “Scum”의 Napalm Death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이들이 다른 장르가 섞이지 않은 그라인드코어의 모습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적어도 Fear of God(스위스의 그 분들)이나 Cripple Bastards는 장르의 선구자들을 얘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이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Nero in Metastasi”는 Relapse에서 나왔으니(프로듀서는 무려 Fredrik Nordstrom) 이 밴드가 참 거물이 됐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겠고, 거의 순수한 증오와 허무함을 표현하던 밴드의 예전과는 조금 달리 ‘리프의 힘’을 꽤나 잘 써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앨범이다. 바꿔 말하면 예전보다 좀 더 데스메탈에 가까워진 앨범인데, 하긴 “Senza Impronte” EP부터는 사운드만으로는 Napalm Death와 많이 비슷해졌으니 이상할 일까지는 아닐지도. 음질도 좋은데다 때로는 스피드메탈 리프까지 나올 정도인만큼 밴드의 입문작으로는 이게 제일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오랜 경력이 일궈낸 웰메이드 데스그라인드.

[Relapse, 2014]

Fallen Christ “Abduction Ritual”

90년대 얘기 나온 김에 좀 더 시절을 거슬러 한 장 더. 1994년이면 데스메탈이 힘을 잃었다고 얘기하긴 좀 이르지만 이미 국내 라이센스반의 많은 해설지들에서는 트렌드에 밀려 힘을 잃기 시작하는 데스메탈의 이야기가 쓰일 시절이었고, In Flames와 Dark Tranquillity가 ‘높은 벽에 부딪힌 데스메탈의 앞길을 수려한 멜로디와 함께 선도하는 신진 세력!’ 식으로 소개되기 시작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커버를 걸고 나오는 그리 전형적이지도 않은 스타일의 뉴욕 데스메탈 앨범이 망하는 건 사실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 앨범은 1994년 나온 데스메탈 앨범들 중에서 최고를 말한다면 첫손에 꼽지는 못하더라도 유력한 후보로 고민할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커버는 사실 블랙메탈 생각이 나지만 정작 음악을 들어보면 “Altars of Madness” 시절의 Morbid Angel을 때로운 그라인드코어에 가까울 격렬한 템포에 실어내는 데스메탈에 가깝고, 아무래도 그라인드코어처럼 직선적이고 짧게 끊어내는 스타일(일단 2분 넘어가는 곡들이 별로 없다)인 이들이 좀 더 거칠게 들릴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 시절 블랙메탈에서라면 그리 특이하진 않을 ‘스푸키한’ 분위기의 건반과 David Vincent 스타일의 보컬도 비교적 잘 어울리는 편이다. 사실 이렇게 격렬한 템포 덕분에 뉴욕 데스메탈 특유의 리프의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렵게 느껴지는 면도 있는데, 그렇다고 이 밴드가 엄청 테크니컬한 정도까진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밴드의 개성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그러니까 훗날 Alex Hernandez가 Immolation의 드럼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는 아무래도 이 앨범에서의 퍼포먼스가 역할이 컸을 것이다. 장르의 팬이라면 만족하기 충분할 것이다.

[Listenable, 1994]

Floodgate “Penalty”

90년대 앨범들 듣는 김에 간만에. 그런데 이것도 “The Visitor”처럼 1998년작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1996년작이더라. 하긴 나쁜 앨범은 아니지만 솔직히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고 이런저런 중고음반샵들에도 자주 보이는 대표 악성재고들 중 하나인지라 나도 이 앨범을 다시 들어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앨범을 한줄요약한다면 Exhorder가 “The Law” 이후 해체하지 않고 다음 앨범을 낼 수 있었다면 나왔을 만한 앨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절을 스쳐간 단기 스래쉬 거물 중 하나처럼 얘기되는 밴드였지만 “The Law”는 어쨌든 Pantera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그루브 메탈 물 많이 먹은 음악이었고, 누가 뭐래도 밴드의 핵심이었던 Kyle Thomas는 밴드가 끝장난 후 숨겨왔던 취향을 드러내듯 더욱 그루브하다 못해 슬럿지 물 왕창 먹은 새로운 밴드로 등장해서 90년대 후반 그루브가 없는 앨범은 내주지도 않는 듯한 허탈한 카탈로그를 과시하던 Roadrunner에서 이 한 장을 내놓았다. 말하자면 나처럼 슬럿지 스타일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구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앨범은 사실 나쁘지 않다. 스래쉬 딱지를 붙였지만 정작 들어보니 슬럿지였던 사례는 이미 Corrosion of Conformity로 경험했으니 당혹스러울 것까진 아니었고, 적당히 블루지하면서도 흙 냄새도 풍기는 모습은 아무래도 Down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음악은 생각보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바꿔 얘기하면 레드넥들이 연주하는 Black Sabbath풍 메탈(특히나 ‘Whole’)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이 즈음 나오던 ‘그루브’ 메탈 앨범들 가운데에서는 그 ‘그루브’에 거부감을 가진 완고한 메탈헤드들을 설득하기에는 이만한 앨범도 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 희망 없는 커버를 견뎌낼 수 있는 이라면 일청을 권한다.

[Roadrunner, 1996]

Arena “The Visitor”

네오 프로그레시브로 불리는 수많은 Genesis 따라지들 중에서 뻔한 카피캣 이상으로 평가되는 사례는 생각보다 별로 없는 듯하고 특히나 장르의 생명력 자체가 빈사상태에 이르렀을 90년대 이후에는 더욱 그렇지만 그래도 90년대 이후에 나름의 입지를 얻어낸 드문 사례라면 Arena는 첫손가락은 혹 몰라도 다섯 손가락에는 들 수 있잖을까 생각한다. 잘 하는 건 알겠는데 특유의 싼티나는 톤이 적응되지 않았던 Clive Nolan도 Arena에서만큼은 확실히 좀 덜한 것처럼 느껴진다. 네오프로그 레떼르가 붙어서 그렇지 이 밴드의 가장 알려진 앨범들은 동류로 분류되는 이들보다는 확실히 메탈에 기운 편이었고, 그 묵직함이 가벼워 날아가려는 키보드 연주를 붙잡고 있는 면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최고작을 꼽는다면 이견은 있겠지만 역시 “The Visitor”일 것이라 생각한다. 멤버가 멤버인지라 Pendragon과 IQ, Marillion(“Clutching at Straws” 시절의)을 적당히 섞은 듯한 사운드이지만 컨셉트에 따라 세심하게 배치된 파트들이 어느 하나 쓸데없이 들어간 곳이 없어 보인다. 가끔은 Tony Banks를 떠올리게 하는 Clive Nolan의 건반도 확실히 분위기를 잡아내는 데 성공적이다. ‘The Hanging Tree’나 ‘Crying in the Rain’처럼 적당히 어두운 분위기의 발라드는 Paul Wrightson이 “Mad as a Hatter”의 연극적인 면모 외에 좀 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고, 수려한 멜로디감각도 확연히 드러내는 편이다.

Pendragon이나 Shadowland 등을 좋아했다면 어떻게 흘러갈지가 좀 예상되는 앨범이겠지만 네오프로그의 상당수가 원래 그런 거 아니겠나? 생각하면 그 점으로 흠잡기는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멋진 앨범이다.

[Verglas,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