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ored Saint “March of the Saint”

충분히 유명하기도 하고 오래 됐으면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밴드이지만 나는 꽤나 늦게 접한 편이다. 그냥 음알못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아무래도 John Bush를 Armored Saint의 보컬로서보다는 Anthrax의 암흑기 보컬로 먼저 접한 탓이 아닐까 싶다. 음악잡지들 뒤지면서 음반수집을 시작했기 때문인가? “Attack of the Killer B’s” 이후의 Anthrax의 앨범들이 국내 음악 잡지에서 좋은 평을 받는 건 별로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John Bush는 왠지 듣기 전부터 B급인 것처럼 이미지가 박힌 보컬리스트였다. 그렇게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것이다.

Armored Saint의 이 데뷔작은 많이들 알려져 있듯이 꽤 수려한 헤비메탈을 담고 있다. 특이한 점은 1984년 미국 메탈 밴드의 앨범치고는 NWOBHM의 기운이 강한 편인데, 아무래도 그 시절 선셋 스트립의 동료 밴드들보다는 영국 헤비메탈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더 어울려 보였던 John Bush의 걸출한 보컬에 장단을 맞추자니 그러지 않았을까? 내놓고 Judas Priest를 의식한 듯한 ‘Glory Hunter’나 ‘Madhouse’ 같은 곡이 그런 밴드의 개성을 단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Can U Deliver?’의 쿨하다 못해 슬리지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리프는 이 밴드가 처음부터 80년대 미국 헤비메탈의 토탈 패키지에 가까웠다는 점도 명확히 보여준다. 하긴 프로듀서도 Kiss의 “Creatures of the Night”에 빛나는 Michael James Jackson이구나(물론 지금은 Michael Jackson 짝퉁마냥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말이다). 80년대 헤비메탈 클래식.

[Chrysalis, 1984]

Gospelheim “Ritual & Repetition”

밴드 이름이 Gospelheim인데 북유럽은 커녕 맨체스터 출신이고, 밴드명이 저런데 던전 신스나 블랙메탈과는 거리가 있는 – 보통은 고쓰 메탈 정도로 홍보되는 듯하다 –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라니 꽤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블랙메탈의 기운이 없지는 않더라도 전형적인 형태와는 무척이나 동떨어진 음악만을 내놓은 레이블을 보고 메탈 나름 들었다고 자처하는 메탈헤드는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 범위라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다. 하긴 이 레이블이 작년에 낸 앨범들 중에 그나마 블랙메탈의 기운이 뚜렷한 건 Imha Tarikat의 신작 정도를 빼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비교적 예상 범위였던 첫 곡을 지나가면 앨범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Satan Blues’의 의외로 화끈한 리프와 ‘Praise Be’의 적당히 둠적이면서도 고쓰와 Placebo식 브릿 팝의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멜랑콜리하지만 어둡다고 하기엔 좀 망설여질 분위기, 클린 보컬을 제외하면 기대 이상으로 블랙메탈에 가까운 질주감을 보여주는 ‘Into Smithereens’, 초창기 Paradise Lost식 둠-데스로 시작했다 급격하게 괴팍한 전개로 나아가는 ‘Valles Marineres’ 등의 다양한 스타일들이 공존한다. 고쓰적인 모습도, 고쓰라고는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한 스타일보다는 The 69 Eyes 류의 좀 더 모던한 면모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앨범을 고딕 또는 고쓰 메탈이라고 부른다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장르명으로는 잡아내기 어려운 음악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보컬이 Richard Leviathan과도 꽤 비슷한 편이기 때문에 네오포크와 메탈을 모두 즐기는 이들에게도 좋은 선택일 수 있겠다. 좋게 들었다는 뜻이다.

[Prophecy, 2022]

Wendy O’ Williams “WOW”

Wendy O’ Williams의 이름으로 나온 앨범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Wendy의 솔로 활동 앨범이었던 건 아니고 다만 Plasmatics라는 이름의 사용권이 문제되어 그 이름을 쓰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Plasmatics의 앨범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Plasmatics는 어쨌든 펑크 밴드기는 했지만, 적어도 “Metal Pristess” EP부터의 밴드의 음악은 펑크보다는 사실 헤비메탈에 더 가까운 편이었고, 덕분에 이 앨범도 메탈 앨범이라기에 무리 없는 사운드를 담고 있다.

그래도 Kiss의 멤버들이 대거 참여해서 만들어진 덕분인지 음악은 밴드의 기존 앨범들과는 좀 달랐다. 사실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Gene Simmons가 유일하게 크레딧에 빠져 있는 곡인 ‘Opus in Cm7’ 정도를 제외하면 이 앨범에서 Plasmatics의 기존 스타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나 전작인 “Coup d’Etat”가 과장 섞으면 S.O.D 풍의 스래쉬 리프까지 등장하는 앨범이었음을 생각하면 확실히 펑크풍을 걷어내고 메인스트림 하드록에 가까워진 이 음악은 때로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당연히 이건 의도된 방향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80년대 록의 유명 페미니스트였던 Wendy의 이름을 내건 앨범의 첫 곡이 ‘I Love Sex(and Rock ‘N’ Roll)’일 수는 없어 보인다. Vinnie Vincent 등이 손을 빌려준 덕에 연주의 스케일은 사실 더 커졌지만, 그래서인지 오밀조밀한 리프가 돋보이는 기타 정도를 제외하면 밴드 특유의 에너지는 좀 잦아들어 보인다. 이후 법적 문제로 다시는 Plasmatics라는 이름을 건 앨범이 나올 수 없었음을 생각하면 이 앨범에서 사실상 Plasmatics라는 밴드는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Kiss가 힘을 빌려준 앨범이니만큼 마냥 나긋나긋하진 않고, 적어도 메인스트림 차트에 오른 앨범에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의 거친 맛은 확실히 보여주고, ‘It’s My Life’나 ‘Ready to Rock’ 같은 팝 메탈은 이 앨범이 어떻게 그래미 후보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물론 상은 못 탔음) 짐작케 하는 힘이 있다.

[Passport, 1984]

Mayhem “Mediolanum Capta Est”

Mayhem의 이름값 덕분인지 여태껏 꽤나 많이 나온 라이브앨범들 중 가장 유명한 앨범은 단연 “Live in Leipzig”이겠지만, 앨범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걷어내고 순전히 앨범의 퀄리티로만 본다면 그 중 최고는 단연 “Mediolanum Capta Est”라고 생각한다. Euronymous 사후의 Mayhem을 짝퉁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라면 물론 말이 안 되는 얘기겠지만, 이미 다년간의 경력을 쌓은 멤버들의 묵직한 연주력과 “Wolf’s Lair Abyss”까지의 앨범들을 나름 망라하고 있는 충실한 셋리스트, 사실 라이브 잘 못한다고 욕도 많이 먹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오랫동안 Mayhem의 마이크를 잡았던 Maniac의 나쁘잖은 퍼포먼스, Mayhem 라이브로서는 전례가 없었던 뛰어난 레코딩 등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앨범의 매력은 분명하다.

물론 그래도 이 앨범에 대한 볼멘소리도 꽤 많을 것이다. 가장 주된 이유는 어쨌든 “De Mysteriis Dom Sathanas”에서는 겨우 두 곡만 살아남았다는 점이지 않을까? 그래도 Maniac이 마이크를 잡고 있고, 시절은 “Wolf’s Lair Abyss”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8년 2월이었으니 왜 1집 곡이 별로 없냐고 하는 건 조금은 너무한 얘기일 수 있겠다. 그래도 ‘Deathcrush’도 있고 ‘Chainsaw Gutsfuck’도 있으며, 어쨌든 ‘Freezing Moon’과 ‘From the Dark Past’가 살아남았으니 밴드 본인들은 아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 누구보다도 많은 밴드들을 돌아다니며 노르웨이의 대표 세션맨마냥 왕성한 행보를 보여줬던 Hellhammer가 물 오른 연주력으로 음습한 분위기 따위는 상관없었는지 원곡들을 아예 스피드업해서 연주하고 있는만큼 이 라이브앨범은 Mayhem이 Euronymous 사후 선택한 노선을 더욱 확고하게 확인해 주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이 Mayhem은 내가 아는 그 Mayhem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의 말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닌 만큼 이 앨범에 기회를 한 번 주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저 내한공연에서 이 정도로 뽑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Avantgarde, 1999]

Landmarq “Science Of Coincidence”

Tracy Hitchings가 죽었다. 네오프로그 뮤지션들이 대개 그렇지만 음악계에 한 획을 긋기에는 택도 없었고(Marillion 정도가 예외랄까) 참여했던 프로젝트들에서 핵심적이었다 하기에도 조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남긴 앨범들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는 절창이란 표현을 쓰기에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Landmarq에서의 퍼포먼스는 전임자가 Damian Wilson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모습인데, 보여주는 기량을 떠나서 왜 프로그 밴드가 어떤 때에 굳이 여성보컬을 쓰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까? Landmarq를 먼저 얘기하긴 했지만 Tracy Hitchings가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모든 앨범들은 적어도 서사라는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프로그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Quasar도, Landmarq도, Strangers on a Train도, 솔로작도.

그 중에서 한 장만 고르는 게 사실 크게 의미는 없겠거니 싶지만(어차피 참여한 사람들도 다 거기서 거기이기도 하고) 굳이 한 장을 택한다면 아무래도 Landmarq의 새로운 보컬로서 등장했던 이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Clive Nolan의 손길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도 있고, Quasar의 앨범들에서 지울 수 없는 은은한 싼티를 찾아볼 수 없는 앨범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파퓰러한 건반 연주를 퍼붓는 류의 심포닉이 주류가 되지만 때로는 Camel풍의 분위기에 재즈적인 트위스트를 섞어 나름의 개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모습(‘Lighthouse’), Genesis 따라지를 정말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모습(‘Between Sleeping and Dreaming’) 등 많은 즐길거리들을 던져주는 앨범이기도 하다. “The Vision Pit”이 똥반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앨범이었으므로 더욱 돋보이는 행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내 기억에 꽤 깊이 남아 있는 보컬이자 밴드의 한 장이다. 그저 명복을 빈다.

[Cyclops, 1998]